지지난 주 토요일이었어요.
친정을 다녀왔거든요. 가는 길에 차 창 밖을 보니
스쳐가는 산 빛들이 단풍으로 장관이더군요.
“아...이쁘다... 어쩜... 아영아, 저거 봐봐.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엄마 나이가 되면 저런 단풍들이 얼마나
예쁜지 아니?...“
정체가 심한 고속도로 위에서 언제 도착하느냐고 입이
댓 발 나온 딸에게 차창으로 신선을 고정한 체 말을
던졌지요. 제 말에 딸이 뭐라는지 아세요?
“그럼, 저는 엄마 나인가 봐요. 지금도 단풍이 이쁜 걸요...”
영악한 답변에 좀은 뻘쭘 했지만 오랜만에 코에 바람도
넣고 눈도 즐거우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가 있었답니다.
처갓집이라면 ‘내 집도 못 가는데...’로 시작하며
거부반응을 보이던 남편이 어쩐 일로 부탁도 안했건만
일 중간에 나와서 태워다 준다기에 감사히 그 제의를 받아
들였어요. 토요일 아침부터 웬 차가 그리 막히던지 거북이
운행 중이었지요.
하긴, 우리가족이 외출을 할 정돈데, 인구의 반은 움직이지
않았을까, 우스운 생각도 해봤답니다.
늘 막히는 그 구간인지 고속도로 위로
뻥튀기 장수들이 만원(?)이데요... 딸래미 투정에 남편이
다음부터는 출발할 때 교통방송을 확인하겠답니다.
네비게이션 믿을게 못된다나요?
동그란 뻥튀기를 하나 남편에게 사달라니 두말없이 사서 건네더라구요.
뻥튀기로 어린 추억 되살려서 반달도 만들고 별들 만들며
딸이 해달라는 저의 옛날 얘기를 주절거렸답니다.
길이 막힌다며 성질 급한 장인이 얼마나 기다릴까 노심초사
긴장하던 남편의 입가에도 간간히 미소가 떠오르더라구요...
안 듣는 척 듣고 있었나봅니다. 지나온 마누라의 발자취를
들으며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하나 데려다가 내가
그 만큼 사람 만들어 놨다...‘ 싶은 얼굴이던데요?
전 같으면 “왜 그런 얼굴이야?!” 하고 따졌겠지만
그냥 그 즐거운 시간만을 알뜰하게 즐기고만 싶었어요.
친정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나와 계시더군요. 사과나무
한그루는 사과들이 데롱데롱 매달려서 아이들을 반겼어요.
편식이 심했던 아들이 어릴 때 아버지가 가꾸신 방울토마토를
따먹고부터 토마토를 좋아하게 됐지요.
사과를 싫어하는 그 녀석이 이번에는 그 빨간 사과를 하나 따서는
옷에 몇 번 문지르고 ‘아삭’이며 과즙을 흘리고 한입씩 베어먹었어요.
맛있다, 연발하면서요.
남편은 두려운 장인과 말 몇 마디를 나누더니 다음날 내려올 것을
약속하며 일하던 현장으로 다시 올라갔어요. 남편이 올라가자마자
아버지께서 이삿짐에서 쓰이는 커다란 플라스틱 가구에
쪽파가 수북하게 담긴 것을 어딘가에서 내오시더니
제게 까랍니다. 사위가 가자마자 말이지요.
저는 그 순간 제 아버지가 ‘팥쥐 아빠’ 줄 알았다니까요.
다음 주에 김장을 하신다더니 웬 파냐고 제가 여쭈니
김장은 배추만 그때 하고 알타리랑 파김치는 미리미리 하신다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다음 주에 내려오지 못한다는 딸을 위해
공평을 주장하시는 아버지께서 제 몫을 미리 계산하고
계셨나봅니다. 얼마 전까지의 저였다면 분명 궁시렁궁시렁
따지듯 몇 마디 건넸을 테지만 저, 사람 많이 됐거든요.
그래서 헤헤 거리며 앉아서 파를 손질하기 시작했지요.
엄마는 직장에서 오시려면 밤 6시가 넘어야 했거든요.
피곤하실 엄마를 위해 그 안에 모두 해치울 심산으로
손이 뵈지 않도록 움직였어요. 단순 노동 지겹더라구요.
엉덩이, 허리에서 피곤이 장난 아니게 밀려오던데요?
6시간이 넘도록 그 일을 한 것 같아요.
일요일에도 학원을 가야하는 아들은 전날 밤에도 11시가
넘어서 귀가했었고 다음날 아침 7시가 넘어서 외갓집으로
출발을 했으니 무척 피곤할 텐데도 숙제를 마치고 나와서는
몇 시간째 죽치고 앉아있는 엄마 곁으로 다가와
파 껍질을 벗기더라구요. 그러면서 그 기특한 아들이 한마디
했습니다.
“엄마, 이거 부추에요?”
중학생 아들의 입에서 그런 황당한 말이 튀어 나온 것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엄마가 김치를 잘 했더라면 그런
시추레이션을 행했을까요. 저는 너그러운 얼굴로...
흙이 묻은 손을 주먹을 쥐고 아들의 머리에 알밤을 날리며
뻘쭘을 달래고 쪽파를 설명했어요. 이번에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이어지대요.
좁은 집에 작은 김치 냉장고를 쓰고 있는 딸이 안쓰러워
또 다시 남편의 욕을 늘어놓으셨어요. 아무리 달래도 아니되는
그 부분이 슬슬 부아가 치밀려고 했지만 ‘아컴’에 심청이되어
올렸던 글을 떠올리며 다시 헤헤 됐지요.
아버지께서 엄마 힘들다며 손수 알타리를 버무리시며
제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십니다.
제가 뭘 안 다구 말이지요...
“이 정도만 절이면 되겠지?”
“아빤, 내가 어찌 그걸 알어, 몰라...”
“이거 맛 좀 봐봐라. 아빠가 멸치를 사다가 젓갈 담궈서
2년을 숙성 시킨 것과 육젓을 섞어서 양념했기 때문에
맛있을 거야“
살림꾼 다되신 아버지께서 이번에는 파를 다듬는
딸 곁으로 버무린 알타리를 들고 계단을 올라오셨어요.
“아빠, 맛있는데...좀 짜.”
딸의 투정어린 말투에 아버지께서 껄껄 웃으시며
그간이 맞는 거랍니다. 무에는 아직 간이 덜 들었다나요?
제가 이렇습니다....
“음, 그럼 맛있는 거 같어,”
다시 맛 평가를 내렸더니 기분 좋아지신 아버지께서 다음에
김치 떨어지면 손수 올라와서 김치를 담가주시겠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말씀 드렸어요.
“아빠, 그게 내 복이잖아. 내가 작은 집에서 작은 냉장고
쓰면 어때, 이 세상에서 딸 김치 담가준다는 친정아빠가
나 밖에는 없을 걸? 난 그게 복이야. 그치 아빠? 그러니까
아빠랑 엄마랑 150살까지 살아야 돼.“
“김치 담아주라고?”
“응!!!”
그날 저녁 엄마와 저는 또 간만에 만나 새벽 3시가 넘도록 수다를
떨었어요.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나서 피곤했지만
곧 가야할 시간이기 때문에 그 아까운 시간을 잠으로
버릴 수 없어서 제가 깰까봐 조심조심 움직이는 부모님
곁으로 다가가서 또 수다를 떨었지요.
오는 길에 황토 밤고구마 한 포대와 따놓고 보관하신 포도와
사과를 한 박스씩 실었고 또 아버지께서 첫 수확하신 쌀 20kg 12포대를
실고 올라왔습니다. 떠나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와서 손을
흔드시는 부모님을 보면 저는 아직도 엄마 떨어지는 어린 아이처럼
슬픔이 밀려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아직도 철부지라며 놀리곤 해요.
지난 토요일에 친정에서 김장을 했는데 남편이 일을 마치고
밤 12시가 다 되어서 혼자 친정으로 내려갔네요.
아이들이 학교 등교와 학원 보충까지 있어서 저는 내려가지
못했거든요. 어쩐 일로 남편이 착한 일을 자처하며 알아서 하더라구요.
성질 급한 저희 부모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기에 새벽 3시부터는
일을 시작하실 것을 걱정해서 그리 늦은 시간에 내려갔는데 안쓰럽고
고맙고 그러더라구요.
저만 빠진 김장을 남편을 비롯해 동생 부부들까지 합류해서
즐거이 마치고 남편이 올라오면서 또다시 차 한가득 부모님의
사랑을 실어왔네요. 여러 김치들과 수확하신 호박으로
해마다 만들어주시는 즙을 저만 2박스를 보내주셨대요.
들기름도 두 병 넣어주시고 1주일 전에 가져왔던 그 많은
포도로 가족들 주스 만들어 먹였는데 또 그만큼 포도를 보내셨어요.
그리 보내 주시고도 맛난 것 많이 못 보냈다며 엄마는
아쉬워하시네요.
철딱서니 없는 저는 오히려 잠깐 사랑이 넘치신 부모님
때문에 짜증이 났었답니다.
김치 통만 채워 보내달라며 그리 부탁드렸는데 3박스를 더
실어 보내셔서 그 처지 곤란한 애물단지들을 어째야 할까
골머리로 하룻밤을 지샜더랬죠. 작은 집에 대용량 김치
냉장고를 사다 넣으면 그 위에서 잘 판인데...살 수도 없구...
어쩔 수 없는 해결책으로 비닐에 김치를 덜어서 냉장고까지
비집고 넣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김치가 많이 남았는데
아무래도 맛이 더 들기 전에 이곳저곳 인심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힘겹게 담아주신 그 귀한 사랑을 말이에요.
살며 고비고비 참 많이 넘긴 그 좌절, 이제 또 한고비를
넘겼습니다. 살다보면 더 높고 힘겨운 고비도 나타나겠지요.
곧 죽을 듯 포기할 듯 좌절하다가 언제 그랬냐며 변덕을
떨면서 살아갈 수도 있겠지요...
올해도 겨울 월동 준비는 편하게 마쳤습니다.
제가 갖은 복을 부러워하실 분들 많으시지요?
저는 그래도 복이 많은 거겠지요?
그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