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빌려 달라는 것을 거절했으니 그 선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쯤은 둘 다 알았던 것 같아.
선배라는 이가 삐졌는지 사실 연락이 그 전처럼 잦지도 않았어.
어쩌다 만나면 대 놓고 날 안 좋아한다고 하기도 했고.
우리가 만나는 또 다른 사람은 부자야.
한국계 은행의 이사이기도 해서 우릴 은행장에게 인사도 시켜주었지.
우리가 가진 돈을 자기에게 맡기면 이 년 안에 서 너 배로 불려줄 수 있다고 그 은행장이 그래.
그런데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선뜻 그 말대로 내 돈 여기 있소 하고 내 줄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우리도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
그러구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남편이 불안해졌나봐.
이민 가면 자기를 먹여 살리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뭐하고 있느냐고 날더러 신문 광고난이라도 좀 보라고 그래.
누가 달라스가서 살자고 했냐고, 눈물나게 싫다는 사람 데리고 달라스로 간게 누군데...
하지만 그런 것 따지면 뭐해, 또 신문 광고를 뒤적뒤적 했어.
커튼가게를 판다고 광고가 나왔더라고.
그거라면 내가 할 수 있을지 몰라, 한번 보기나 하자.
남편하고 둘이 한번 둘러보기나 하자고 갔는데 덜컥 계약을 하고 와 버렸네.
집에서 싸구려 재봉틀 하나 들여 놓고 취미로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 아내의 솜씨가 대단한 줄 남편은 착각했나봐.
음식점을 하고 싶다고 하면 쌍수를 들어 반대하던 사람이 내가 커튼 가게를 한다고 하면 대찬성이래.
남들은 기술 기술 하지만 사실 기술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거라고 난 그닥 내켜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그만 그것을 깜박 잊었지 뭐야.
내가 커튼을 만들 줄 아는 것도 아니어서 전 주인여자가 이 년 동안 계속 일하면서 도와주기로 하고 계약을 했지.
수더분해 보이는 주인여자가 맘에 들기도 했어.
잔금을 건네고 가게가 완전히 우리 소유로 바뀐 다음부터 천사 같았던 주인여자가 차츰 악마로 바뀌는데 속도가 무척 빨라.
일주가 지났나, 이주가 지났나, 나는 아직 일을 제대로 파악도 못했는데 자기가 한의원이랑 병원에 가야 하니까 일을 하러 나올 수가 없다네.
특별히 아파서가 아니고 그 동안 가게에 묶여서 검진 한번 제대로 못 받아 봤는데 이제 가게도 팔았고 한번 검사를 받아 봐야겠다는 거지.
가능하면 맘씨 좋은 주인노릇을 하고 싶은게 내 바램이기도 했고 어떨결에 당했을 수도 있고...처음엔 그러라고 했어.
재미 붙였나봐.
또 그래, 이번에는 내게 말도 안 해서 다른 일하는 사람에게 전해 들었지 뭐야.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울 남편에게 이야기 했는데 부부사이에 그정도 의사소통도 안되느냐고 약까지 올려.
그 뿐이 아니야, 한 달 동안 그 여자가 주문 받아 만든 커튼 중에 제대로 된 것이 단 하나가 없어.
길이가 너무 길거나 짧거나 손님이 원하던 모양과 다르거나 암튼 다시해야 되는데 바느질을 해 본 사람은 알거야 띁어서 다시 해야 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차라리 새로 하는것이 나을 경우도 많다고.
뜯었다 붙였다를 반복하면 이쁠 수도 없고.
딱 하나 무사 통과 된 것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미심쩍어 주문한 사람에게 내가 다시 전화해서 길이를 수정해서 만들어 갔었거든.
이런식으로 어떻게 4년씩이나 가게를 유지해왔는지 이해가 안돼.
하루는 필로라고 하는 베개를 뜯었다 붙였다 하는데 말 그대로 하루종일 걸리는 거야.
그거 만들어 주고 난 30불 받아서 그 여자에게 하루 주는 일당이 100불 넘는데 말이지.
성깔이나 좋나, 내가 불평하면 덤벼요.
거기에 커튼을 턱없이 싼 값에 주문을 받았더라니까, 천 값에 일하는 사람들 월급 주고나면 나는 남는 게 없어.
계약기간 동안 나랑 같이 주문을 받으러 다니면서 이 여자가 주문을 따내기 위해 턱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했나봐.
가게를 팔려고 하니까 주문이 더 많다고 호들갑을 떨더라고.
아니면 이 여자가 물건은 제대로 못 만들어도 원래 싼 값에 주문을 받아 자기 남편이랑 아들과 같이 일하면서 인건비가 안드니까 그럭저럭 유지가 가능했던지.
사실이야 무엇이든 난 화가 나더라고, 도저히 그 여자 꼴을 볼 수가 없어서 간신히 한 달을 채우고 그 여자를 해고해 버렸어.
커튼도 만들 줄 모르면서 그나마 명색이 기술자를 자처하던 여자를 해고했으니 다른데서 기술자를 구해야 되는데 어디가서 구하나.
가게에 들락이던 디자이너라는 한국여자가 진짜 기술자를 안다고 만나보래.
내가 해고했던 주인 여자도 그 사람에게 배운 것이 많다고 했던 사람이어서 반가웠지.
남편이 은퇴한 목사라니까 인품도 그 전 주인여자보다는 나을거라고 기대되기도 했고 다행이라 싶었어.
만나서 이야길 하는데 그 전 주인여자 흉을 보면서 내 가려운데를 살살 긁어주어 마치 동지를 만난 것 같더라고.
같이 잘 해보자고 했어.
그런데 막상 써 보니 기술이 그 전 여자보다 나은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고 인품이 더 나은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어.
잘 난 체 하는 것도 알겠고 내가 일을 못한다고 무시하는 것도 알겠는데...
같이 일하는 멕시코 여자에게도 한국말로 흉도 보고 마치 어린애 취급을 해.
그러면 일하는 분위기가 나빠지잖아, 주인인 내 입장에서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이지.
영어도 잘 못해.
그 전 주인여자도 영어를 못해서 손님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목사사모님이랑 또 힘들게 일하면서 밤엔 집에서 열심히 책을 보고 연구를 했어.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에 진학한 내가 혼자서 공부하는 거라면 제법 하거든.
바느질엔 원래 소질도 좀 있었고.
금방 기술자라는 사모님보다 내가 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사모님도 쫒아냈어.
그런데 해 보니 커튼 가게가 커튼만 만들 줄 안다고 되는게 아니야.
돈이 되는 것은 디자인이더라고.
커튼 만드는 기술은 쉽게 익힐 수 있지만 디자인 감각이야 어디 그리 쉽게 내 것이 되냐고.
디자이너를 고용했지.
젊은 남자였는데 파리에 가서 의상공부도 하고 왔다고 해.
자기가 그린 그림첩도 가지고 와서 보여주는데 내 눈에는 대단한 실력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
하는 짓이 여자 같아서 쫌 그런데 사람들이 디자이너는 게이가 많다니까 어쩜 디자인 하나는 확실히 해 낼 것도 같아.
처음엔 맘에 들게 잘 했어.
일하는 사람도 하나 더 늘렸지.
그것도 내가 인터뷰를 한 게 아니라 디자이너보고 너가 잘 아니까 인터뷰도 너가 해서 좋은 사람을 골라보라고 했구.
잘한다, 잘한다, 그러니까 너무 잘해 탈이 났어.
손님을 설득해서 자기 의견을 앞세우기 시작하더라고, 디자인에 관한 한 자기가 낫다고 생각했나봐.
물건을 만들어가면 손님이 싫다고 해.
자기가 원하던 색깔이나 무늬나 디자인이 아니라고.
난 디자인은 몰라, 하지만 손님이 싫다고 하면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내게 돈이 안되잖아.
디자이너가 고른 기술자도 맘에 안들어.
기술자를 고른 것인지 같은 게이라서 고른 것인지 아리송해.
기술자라는 게 일도 못하면서 툭하면 지각에 조퇴에 그만두라고 했더니 근로자 권익을 대변하는 기관에 신고하겠다고 협박까지 하더라고...
난 싸움이라면 그닥 겁나는 사람이 아니야.
할테면 해보라고 소리쳤지.
남편도 디자이너라고 하는 친구도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 달래라고 그러잖아.
싫다고 버티다가 내가 졌어.
솔직히 서툰 내 영어가 조금 켕기기도 했고 미국은 변호사가 누구냐에 따라 유죄가 정해진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 달래는 쪽을 선택했지만 기분 엄청 나쁘더라.
하지만 그 녀석 꼴은 더 이상 안보니까 시원하기도 했지.
그런데 디자이너가 점점 말썽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