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 이민자로 미국에 첫발을 딛었지만 미국이 우리 가족에게 낯 선 나라는 아니야.
그 전에 이민자가 아닌 외교관 가족으로 세번에 걸쳐 십년을 살았으니 우리에겐 제법 익숙한 나라라고 할 수도 있지.
하지만 La공항에서의 입국수속부터 그 전과는 전혀 다르네.
외교관 가족의 특권이 없어진 입국수속, 9.11 사건이 있고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은 그 때,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다시 검사하데.
어금니를 꼭 물어 자존심을 눌렀어.
그래,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란 말이지... 한번 해 보자구...
대중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 미국은 자동차가 없으면 발이 없는 것과 같아.
운전을 하려면 면허증이 있어야지.
예전에 쓰던 면허증은 기한이 지났어.
새로운 면허을 받으려면 두 개의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네.
기한이 지난 면허증도 신분증으로 인정을 해 준다기에 면허를 받으러가서 여권과 기한이 지난 운전 면허증을 내밀었지.
안된다네.
그 전 면허가 외교관 면허라서 더 이상 외교관 가족이 아니니까 일반 면허를 내주어도 좋다는 미국무성의 허가가 있어야 된데.
미국무성에서 어떻게 그런 허가를 받아내는 지 알 수가 없지.
참 내, 이런 일로 부탁하는 것은 싫은데 어쩔 수가 없어.
남편이 근무했던 대사관에 부탁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미 국무성은 그런 허가같은 것은 못해 준다고 한다네.
날더러 어쩌라구...
이민 비자는 받았지만 또 다른 신분증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영주권을 받으려면 두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데, 그럼 두 달 동안이나 발 없는 사람으로 살란 말인가...
눈물이 나려고 해.
하지만 이깟 일로 울 수는 없지, 참자, 참자...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는데 영주권보다 남편이 먼저 왔어.
아이들 학교 때문에 폐암 수술을 한 남편을 두고 아이들과 나만 먼저 왔었거든.
남편보고 국제운전면허를 들고 오랬더니 가져왔어.
아, 드디어 살 것 같아.
자동차를 운전하고 맘대로 다닐 수가 있으니 자동차가 생긴 것이 아니라 날개가 생긴 것만 같더라니까.
남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에서 아파트도 얻어 독립했지.
와, 좋다. 좋아.
아이들이야 따로 나가 학교에 다니니까 남편과 둘이 다시 신혼살림을 차린 것만 같아.
신접살림 장만하듯 살림살이도 하나씩 둘씩 사는 재미가 쏠쏠하더라니까.
잠시지만 남편과도 떨어졌다 만나니까 좋더라고, 남편이 없으니까 서러울 때가 꽤 많았거든.
남편 친구 집에도 잠시 묵었더랬는데 글쎄 남편이 외교관이던 때하고 날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르더라고.
그 시절 내가 숱하게 밥해 먹였는데 말이야.
드디어 남편도 오고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다.
남편 가족과 친척도 내 가족과 친척도 모두 농사꾼 아니면 월급쟁이야.
우리에게 무슨 기술이 있겠어, 있을 리가 없지.
이 십 년 동안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웠는데 쓸모 있어뵈지 않아.
이 십 년 전에 수학선생을 몇 년 했었는데 그것도 별로고, 남편은 삼 십 년 가까이 공무원을 했는데 그것도 써 주겠다는 사람이 없더라구.
신문을 뒤적뒤적 구인광고를 살폈어.
이런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몇 군데 전화를 하니 나이를 묻네.
실제보다 어린 호적 나이로 그것도 만으로 대답했는데, 나이가 좀 많네요, 그러더니 면접을 하자는 말도 않하고 전화를 끊어.
여러군데 퇴짜 끝에 면접을 오라는 곳이 있어 갔더니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만 이런 저런 것을 묻고 내게는 그닥 질문도 않더라고.
이미 짐작은 했지만 면접을 하고 왔어도 일하러 나오라는 말이 없으니 씁쓸하고 섭섭하데.
인상 좋고 똑똑해 보인다는 말 많이 듣고 살아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줄 미처 몰랐어. 정말이야.
드디어 한군데서 일하러 오래.
일주일에 겨우 스무시간짜리 샌드위치 싸는 일이야.
하지만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갔어.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니 잘 할 리가 없지.
주인아줌마는 친절한데 주인아저씨는 내가 맘에 안드나봐.
이런 땐 정말 자존심 상해, 여지껏 남의 맘에 안들게 일한 적 없는데 말이지.
하루 네 시간짜리 일인데 돈은 네 시간만 주거나 말거나 가게가 문여는 시간부터 문 닫는 시간까지 하루 여덟시간씩 일해 주었지.
어떤 주인이 싫다 하겠어.
주인아줌마도 주인아저씨도 둘 다 좋다지.
친해지니까 주인아줌마가 뭐하고 살았냐고 물어.
집에서 밥하고 애 키우고 살다가 이민을 와서 뭔가 하고 살아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까 샌드위치 장사를 해볼까 한다고 솔직히 고백했지.
자기네가 도와주겠다고 그 후부터 이것저것 가르쳐주더라고.
고마운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집에 있던 남편이 부동산 중개사 공부를 해보재.
실은 내가 해보자고 했던 것인데 싫다고 하더니 집에만 있으니 심심했나봐.
샌드위치 장사보다 나을 것 같아 둘이서 중개사 시험공부를 시작했지.
입시지옥이라고 일컬어지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험을 치른 세대라 시험이라면 그닥 어렵지 않아.
자기네 말로 시험보는 사람들도 한번에 붙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데 첫 시험에 둘 다 떡 붙었지.
신문에 부부 사진을 나란히 싣고 광고를 시작했어.
광고를 해도 대개는 처음 몇 달은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데 광고를 시작하자마자 연락이 오더라고.
부부가 모두 인상도 좋고, 광고 문안도 맘에 들었데.
때도 좋았지, 우리가 자리를 잡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일대에 부동산 붐이 일어 자고나면 집 값이 오를 때였거든.
너도 나도 집을 사려고 난리였지.
걸림돌은 엉뚱한데서 오더라고, 남편이 싫데. 남들이 자기를 사깃꾼 취급하는 것만 같다고.
에구 내가 미치지. 미쳐...
부동산 중개를 하려면 차도 좋은 차를 타고 다녀야 사람들이 신뢰한다고 해서 거금을 주고 벤츠도 샀는데...
결국 한건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그만 두었어.
남편 아는 이가 텍사스 달라스에서 주유소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였거든.
불난데 부채질이었지.
그렇잖아도 실실 내키지 않던 차에 얼씨구 한거지.
어떻게 해.무엇이든 해서 먹고 살아야잖아.
주유소 같은 것은 난 정말 하기 싫은 업종이지만 남편이 그 전부터 노래를 하던 것이니 한 번 가보자고 했어.
달라스를 한바퀴 둘러보고 나니 눈꼽 만큼도 정이 들지 않아.
나는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남편 친구가 가장 꽃과 나무가 많은 좋은 동네를 구경시켜 준다기에 갔는데 어찌나 삭막하게 느껴지는지 그만 가슴이 아파오고 눈물이 찔끔 나더라니까.
달라스에서 남편친구도 만나고 선배도 만나고 다른 아는 사람들도 만났지.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있었던 주유소도 살펴보았는데 남편 선배가 주유소를 같이 가서 보더니 하지 말래.
남편이 그 말을 듣더니 주유소를 쉽게 포기하더라고, 반가웠지, 그 선배에게는 고마웠고.
난 주유소는 정말 싫었거든.
있잖아, 그 미국에 흔한 권총강도 말야, 신문보면 주유소가 가장 많이 당하는 것 같더라고.
남편의 선배는 도넛의 대가라는데 우리보고 도넛 장사를 하면 자기가 도와주겠데.
선배 말이라면 꺼뻑 죽어야 하는 줄로 아는 남편, 쉽게 그러마고 둘이서 죽이 맞아 돌아가는데 난 내키지 않아.
도넛 장사도 내키지 않지만 달라스라는 도시에서 살 생각을 하니 눈물이 다 나는데...
싫다는 내 말은 귓가에 들리지 않나봐, 남편은 달라스에서 도넛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면서 신이 났어.
눈물나게 싫지만 그러지 뭐.
우유부단하다고 평생 흉보며 살던 남편이 이리 쉽게 결심했다니 한편 신기하고 반갑기 조차 하네그랴.
홀려도 단단히 홀렸지, 열흘만에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 워싱턴에서 짐을 싸들고 달라스로 이사했다니까.
남편 선배라는 이가 도와 준다더니 차일피일 미뤄.
우리 일보다 자기 일이 급하다고 돈을 빌려 달래.
우리 일 도와 달라면서 그 사람 일 안돕겠다면 말이 안되지.
돈 빌려 주었네.
돈까지 빌려 주었는데 우리 일은 말로만 하고 안 해줘.
또 돈 빌려 달래.
우리도 참 순진하지, 그냥 선배인가, 고등학교도 선배고, 대학도 선배지. 안 빌려 줄 수 없어.
안 빌려 주었다가 우린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데 안 도와주면 어쩌나.
또 빌려 주었네.
해도 너무 하지, 우리보고 서둘지 말라면서 자기 사정이 급하니 또 돈 빌려 달래.
내가 아무리 순진해도 그렇게는 못하지.
남편보고 내가 반대해서 못한다고 하라고 했어.
남편도 아무리 선배지만 너무한다고 생각했나봐, 순순히 내 말을 듣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