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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BY 그대향기 2008-11-06

 

 

내 나이 올해 마흔 여덟.

미국에서는 나랑 동갑인 흑인 남자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세상이 다 떠들썩한데

그 쪽은 외국식 만으로 하는 나이니 마흔 일곱이고 우린 우리식이니 마흔 여덟.

뭐하다가 나이는 이만큼이나 먹었고, 뭐하다가 지금 이 자리에 까지 와 있을까?

계절 탓 만은 아니고 바쁜 일정들이 거의 다 마무리되고 몸도 마음도 여유가

있다보니 내 존재감이나 정체성이 생각나는거겠지.

무슨 대단한 일도 해 놓지 못했고, 누구를 위해 큰 사업도 이룩하진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내 발걸음을 차분하게 뒤 돌아보며 자신이 어떤 위치에 와 있나를

한번쯤 점검할 필요는 느끼는 밤이다.

 

새로미 언니가 말한 한일합섬.

그 글을 읽는 순간 숨이 헉~~하고 막히는 절대적인 위기감이랄까?

뭐 그런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받은 것 같은 아픔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마산의 한일합섬과 한일여고.

내 아름다운 고교시절이 뜨거운 화학섬유가 뿜어내던 증기 속에 뭍혀버린

어쩌면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치열해야 할 그 시절을 그 속에서 사라지게 했던

내겐 가장 아픈 세월들이었다.

아버지의 시력상실과 오빠의 토지사기 사건으로 거의 바닥을 헤매이던 중학교

시절의 가정형편은 학생회장의 타이틀을 안고 아무리 용감씩씩하게 학교생활을

했어도 , 뛰어 넘을 수 없고 용서 할 수도 없었던 무지막지한 가난으로 해서

고교 진학이 막혀버리던 중 3의 암울한 시기에

중학교 교장 선생님과  진학담당 선생님과 옆반 국사선생님의 여상 진학의 권유도

내겐 들리지 않았고, 전액 장학생의 혜택도 지긋지긋한 집을 탈출하려던 내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성적은 최상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상위권을 유지했었고

친구들과의 유쾌한 친분들이 중 3 내리 반장을 하게 했고

중 3 땐 학생회장까지 무난히 하면서도 단 한번도 집안의 사정으로 우울하거나

덜 용감했던 적도 없었고 덜 씩씩했던 적도 없었다.

중 1 때 어쩌다가 백일장에서 중,고 합해서 장원을 했던 것이 내내 즐거운

학교생활이 되게 했고, 웅변이며 체육을 잘하는 덜렁대는 키 큰 나는 두루두루

잘 나가는 학생이었는데 아버진 가족들을 나 몰라라~술만 마시는 무능한 가장이었고

오빠들? 넷이나 되었지만 변변한  보탬이 되지 못했던 난 탈출를 감행했다.

 

중 3 막바지에 한창 고등학교 진학 상담이 있을 때 진학담당 선생님을 찾아가서

한일여고에 가겠으니 원서를 달라고...

선생님 눈이 화등잔 만해 지시면서 어디서 그런 학교는 들었냐며 원서가 없다신다.

그 당시 우리 중학교는 야간자습도 철저했고 고등학교를 시험치고 들어 갔던 시절이라

성적이 우수했던 선배들이 수석이며 차석도 많이 차지했고 우리 또래들도

모의고사를 치면 늘 그 지역에서는 수석이며 높은 등수를 잘 받던 그런 기수들이라

선생님들의 기대도 컸었는데 학생회장이 산학협동 학교에 간다니....

아예 없던 일로 처리 하시고 제일 잘 나가던 학교에 원서를 접수 하시겠단다.

\"니 성적이면 충분히 합격하니까 아무소리 말고 진학 해. 어딜 간다고?

교장 선생님도 허락 안 하시겠지만 원서도 돌려 보내고 없을거야.\"

만류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믿기지 않아서 교장실로 찾아 갔었고 교장선생님 역시

펄쩍 뛰시며 중학교랑 같이 있던 여상에 장학생으로 들여 보내 줄테니 아예

생각도 말라시며 오히려 날 달래신다.

\"공부만 열심히 하고 집안 일은 어른들께 맡겨야지. 학생이 무슨....\"

하기 쉽고 듣기 좋아 어른들 일이지 그 때 내겐 어수선했고 늘 쪼들리던 집안이

진짜 싫었으니까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내 길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집에 돌아오면 텔레비젼에서는 자주 한일합섬과 한일여고를 비춰줬고

난 바로 여기야~를 외치며 엄마한테 살짜기 의견을 얘기했고 엄만 울면서 서럽게

그러나 소리없이 우시면서 그럼 가 봐라....힘없는 응원을 했었고 아버지나 오빠들은

날 미친애 취급을 했었다.

여자애가 가긴 어딜가냐고....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놓겠다고.

자기네들 자존심에 먹칠을 한다는 소리지.

오빠가 넷이나 있는데 하나 여동생 고등학교도 못 보내 준다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그 당시엔 집도 저당이 잡혀 있었고 돈을 만들어 놓으면 세째 오빠가 다 들고 가서

거덜을 내고 돌아 왔으니 집에 돈이란 돈이 씨가 말라 있을지경.

담배연기도 싫었고 맨날 취하듯이 마셔야 하는 술냄새도 싫었고 무엇보다도

고등학교야 선생님들의 배려로 간다고 치더라도 허구한날 반복되던 일상이

죽도록 싫었다.미치도록 싫었다.

등록금을 꼬래비로 납부해야만 하던 부끄러움도 웃으면서 감사히 받아 갔지만

그 돈을 이집 저집 돌아가면서 꾸어 오시던 엄마의 초라한 몸이 얼마나

슬퍼보이시던지, 더 이상은 엄말 나 때문에 서럽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라도 없으면 엄마가 덜 꾸러 가셔도 되고 아버지 한테 돈 이야기 덜 해도 되니까

짜증 섞인 아버지의 앙탈도 덜 받아도 되시니 내가 떠나자....막내 오빠 등록금도

보내주며 공부 할 수 있으니 좋지 뭐.....

 

원서가 마감 되었단 한일합섬 총무과의 안내를 벼락 맞은 것 처럼 듣고도

난생  처음 경주를 혼자서 떠나 마산이란 곳에 무작정 찾아 들었다.

엄마한테만 이야기 하고 꼬깃꼬깃 엄마의 비상금을 털어서 준 차비를 들고

첫차를 타고 마산 한일합섬 총무괄 찾았을 때 마감되었단 말은 듣고 왔다~

그래도 난 꼭 여기를 들어가야 하고 반드시 학교도 입학해야만 한다고

총무과  담당한테 떼를 쓰며 원서를 두장 받아냈다.

옆반 친구가 내가 간다니까 자기도 가고 싶다며 꼭 한장 더 받아 오랬기에.

사흘 뒤엔가가 입사 날이라며 시간과 장소를 일러주면서 그 담당자가 하는 말이

\"학생은 어디 내 놔도 밥 굶지는 않겠네~마감이 됐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쳐들어 왔으니 학교생활도 잘 하겠어? 두고 볼께~`ㅎㅎㅎ\"

입사원서를 받아 오는데 난 어쩐지 기분이 좋기도 하고 좀은 서럽기도 했다.

첫차를 타느라 잠이 모자랐던지 긴장이 풀린건지 원서를 받아들고 차를 타서는

자꾸 졸다가 원서를 떨어뜨리곤 화들짝 놀라 일어나곤 했었다.

애들은 다 부모들이 주는 돈으로 즐겁게들 원서를 적고 고등학교를 가는데

학생회장까지 한 내가 이 무슨 일이라니...

하기사 학생회장이 뭐 대단한 감투라고 벼슬도 아닌데......

 

그렇게 받아든 원서를 다시 접수하고 교장선생님이하 담임선생님과 옆반 선생님의

걱정스런 만류를 뿌리치고 졸업도 하기 전에 입사를 하러 갔고, 엄마와 둘이서

마산엘 갔는데 내일이면 입산데 엄마랑 허름한 여관에서  짐을 풀고 ,근처 중국집에서

짜장면으로 저녁을 먹고 아침 일찍 달랑 가방 하나를 들고 양덕동 한일합섬 정문을

통과해서 총무과 어딘가에서 입사식을 하는데, 엄만 뒤에서 연신 눈물을 닦고 계시고

입사식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되고 엄만 건강하게 잘 있으란 말로

하나있는 딸과의 긴 이별을 하시면서 작고도 작은 몸을 돌리시며 가시는데....

아...

난 왜 엄마랑 짜장면으로 저녁을 먹었을까?

더 맛있는 저녁을 사 드릴 수도 있었는데.

비상금이 떨어지면 무서울 거 같아서 돈을 아끼느라 난 엄마를 허름한 중국집

나무 의자에 삐거득 거리며 저녁을 잡숫게 해 드린 불효녀였다.

 세월이 한참이나 더 지난 후에도 그 중국집만 지나치면 엄마가 생각 나 우울했었다.

 

입사가 완료되고 열 여섯 어린 숙이는 모포가공과라는 이불 만드는 과에 배치되고

소위 말하는 공순이가 되었다.

고등학교 공부를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기쁨 만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재미있게 하자~

아무리 험해도 이쁘게 보자~공부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졸업장만 딸 수

있다면 뭐든 다 참자~~~

3교대를 아시는지요?

생산라인에 들어서면 새벽 6시 교대

오후 2시교대 , 오후 10 시 교대.

하루 8 시간 일하고 교대 후에 식사하고 바로 씻고 학교가서 4 시간 공부하고

잠깐 기숙사에서 잠 자고 또 교대근무.

어린 열 여섯 나이의 꽃다운 여학생들이 낮 근무는 또 모르는데

야간 조가 되면 누렇게 다들 얼굴이 떠서 비몽사몽간에 기계 앞에서 졸기도 하고

걸어가면서 졸기도 하며 오로지 가난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을 돌 볼 시간도

없이 뺑뺑이를 쳐야 했다.

가끔 기계 앞에서 큰 사고가 나는 과에서 근무하던 또래 친구들의 슬픈 소식을

접하곤 등골이 오싹했던 기억도 난다.

장갑이 말려 들어가면서 무시무시한 커트 날에 손가락이 잘리는 끔직한 사고도

자주는 아니지만 어저다 나는 날이면 하루 온 종일 공장 분위기가 가라 앉는다.

 

졸업식은 입사하고 중간에 하루 휴가를 내서 왔고

친구들이 내가 없어진게 이상하다며 어딜 가서 졸업식에만 왔느냐고 난리였었다.

알량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까 봐 아주 친한 몇몇한테만 이야기 하고 그냥 갔으니..

졸업식에서 약간의 장학금과 공로상, 답사를 읽고 황망히 또 마산으로 돌아 왔다.

중 2 때 담임선생님은 내게 두꺼운 내의와 영양제를 챙겨 주시면서

꼭 가야만 하는 사정이 못내 안타까우셔서 밥은 꼭 챙겨 먹어라셨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다시며.....조용히 우셨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오신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날 친 여동생처럼 많이

챙겨주셨고 우리 반이 꼬래비로 등록금을 납부해서 교무실에서 당하셔도

우리 애들한테 미안해서 말도 못하시던 가슴이 참 따뜻하신 선생님이셨는데...

난 그 선생님께서 선물해 주셨던 옷을 십수년이 지나도 간수했었고 결혼 후에도

한참을 가지고 다니다가 최근에야 처분했었다.

누우렇게 빛이 바래고 장농 속에서도 때가 묻으면 세탁을 해서 다시 넣고를

몇번이나 했던가......

선생님을 졸업 후엔 딱 한번, 중간엔 몇번 만났었지만 결혼과 함께 교단을 떠나셨고

울산 어딘가에 계시단 소식을 접하고는 모교의 교장 선생님의 인맥을 다 동원해서

백방으로 수소문 해 봤지만 헛 수고였다.

최종학교는 알 수 있었지만 주소지나 고향은 수사가 아니면 안 가르쳐 주신단다.

참 섭섭했지만 접을 수 밖에.

선생님.

언젠가는 꼭 한번 만나고 싶은 분이셨는데 어디 계시는지요?

그 때 가슴이 아프다시며 안타깝게 마산에 보내셨던 그 숙이가 건강하고

씩씩하고 애들 셋을 잘 키우는 여자로 살고 있답니다.

보고싶습니다.

만나면 선생님 품에 안기면서 떠났듯이 이젠 선생님을 따듯하게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결근하루에 월급이 차이가 났으니 당연히 돌아 올 밖에.

친구들이 하루 쯤 놀다 가라고 말렸지만 친구들은 내 절박함을 몰랐으니 그런 말이

무리는 아니지만 난 그러지를 못하고 마산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안녕 친구들아~~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서 만나자.

 

그렇게 돌아온 마산에서 모포를 수도 없이 만들고 있을 무렵

졸다가 끊어먹고 주임한테 혼나고 같이 기계 만지던 언니는 안스러워 날 달래며

꾸벅꾸벅 마주 보며 졸다간 둘이서 같이 또 끊어 먹으면 둘이 쌍으로 혼나고

돌아와서 기계 뒤에서 몰래 우린 같이 웃었다.ㅎㅎㅎㅎ

그러다가 입학을 하고 자그마치 한 학년이 30 학급.

조별로 학습을 하니 A조,B조 ,C조 , 주간조......

한 학년에 서른 학급이 있으니 전국에서 모인 애들이 다 풀리면 왁자지끌 소란 야단.....

입학식을 하는데 우...와...

대강당도 어지간히 크더만 꽉 차고 무슨 애들의 집안들이 그리 어려운 애들이 많은지...

경상도,전라도,경기도,강원도, 울릉도에 제주도까지.

골고루 다 모였고 얼굴도 가지가지, 형편도 가지가지, 성적도 가지가지....나이까지도.

기숙사를 배정 받고 학년별로 들어 가 있는데 학생과 비학생의 구별도 있고

고참과 신참의 차이가 우.. 와 ...엄하다 엄해.

난 덩치가 있으니 함부로 못하고 또 학교에서 어쩌다가 반장이 되었다.ㅎㅎㅎ

한 덩치 하는 여학생이 듬직하게 맨 뒷자리에 무게 잡고 있었으니

들어 오신 선생님께서 \"어이~`맨 뒷자리 학생? 임시 반장 할래?\"

그 말씀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 투표를 할 때도 반장이 되었고 내리 3 년 동안

줄반장을 하게 만들었다.

학교생활도 나름 열심으로 했고 직장에서도 특유의 유쾌한 성격으로 좌중을

잘 웃기는 재미 있는 학생이요 공순이었다.ㅋㅋ

1 학년이 마무리 되어 갈 무렵 사무실에선 나를 부르더니 성적이나 반장의 이유로

큐씨 활동 그러니까 품질관리과를 들여 보내주었다.

현장에서 모포를 만들지 않아도 되었고 소음을 듣지 않아도 되었고 졸다가 모포를

끊어 먹지 않아도 되었다.

과장님의 특별한 배려로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가끔 발표회에서 발표를 잘 해서

상도 받고 칭찬을 받으면서 즐거운 공순이 시절을 보냈다.

 

엄마한테 꼬박꼬박 돈을 보내고 저당 잡힌 집도 풀면서 허투루 돈을 낭비하지 않고

엄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이를 악 물고 공순이라는 아픈 이름도 달게 들었다.

오빠의 고등학교 등록금도 보태는 기특한 외동딸이 되었다.

고등학교 3 학년 땐가?

학급비를 받아서 가방 뒷칸에 넣어 둔 걸 누가 훔쳐가는 일이 생겼는데

아무리 조사를 해도 범인은 안 나오고 다들 돈을 버는 애들이라서 누가 가져가서

수중에 돈이 있는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곱상하신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내가 반장이 되는 것 보다

 작고 이쁘고 고운 애를 선호하신 선생님이 우락부락하고 애들을 몰고 다니던

내가 반장이 되니 늘 꼬투리를 잡지 못해 안달이었다가 덜컥 그런 일이 생기고 나니

그 책임을 물어 나를 반장에서 밀어 냈고 난 애들이 뽑은 반장이니 애들 뜻에

따르겠노라 선언을 했고 , 반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다시 반장이 되고 보니

선생님의 노기는 이루 말 할 수 없고 보다 못한 난 스스로 물러나고 애들은 새로

임명된 반장의 말은 듣지 않다보니 방과 후에 새 반장이 기숙사 내 방까지 찾아와서

좀 도와 달라고 했다.

도저히 자기 말은 애들이 안 듣는다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튿날 학교에 가서 애들을 모아 놓고 반 회의를 해서 애들한테 새 반장의 말을

들어 줄 것과 난 자격 미달이니 이젠 잊으라고...

반의 돈을 잘 간수하지 못한 불찰이 크니 이젠 됐다고.....

애들은 흥분했지만 난 애들이 나를 따라 준 것만도 고마워 더 이상은 반장을

괴롭히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학교를 당분간 쉬는 \"우\"를 범했다.

그런 선생님이 싫었고 그런 친구들이 싫었다.

남의 가방에서 돈을 가져간 친구는 끝내 찾진 못했고 그 빌미로 날 미워한 선생님이

더는 보기 싫어 학교를 무단으로 1 주일이나 쉬고 말았다.

 

그 당시에는 학도호국단이란게 있었고 .

전학년 전체의 연대장을 뽑을 무렵 교련선생님께서 날 조용히 부르셨다.

\"야 임마~~왜 그랬어? 난 너를 연대장에 추천했다가 챙피를 당했잖아.

결석이 사흘 이상이면 안 되는데 넌 일주일야. 왜 언제 그랬어?

넌  임마~ 성적도 되고 일학년 때 부터 내가 계속 지켜봤는데 연대장감 이던데

언제 결석을 그렇게 한거야? 도로 물리지도 못하고 아쉽다 임마~~\"

그러시면서 어깨를 툭~`치시며 미안하다고 하신다.

장학금을 줄 기회였는데 놓치고 말았다며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셨다.

그 선생님은 교련시간에 구령도 곧잘 하고 성적도 바닥이 아니고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던 날 눈 여겨 보고 계셨고 추천을 하셨다가 결석수가 오버 되었던

나로 인해서 무안을 당하셨다니 참 미안했다.

지나가다가 날 보시면 씨익 웃어주시고 \"임마~`잘 하지?\"

인사를 해 주시던 분이셨는데 실망을 드려 죄송했다.

그냥 대대장으로 그쳤고 연대장도 그런 사정을 알기에 나랑은 조가 달랐지만

교대시간 마다 인사도 잘 했었고 졸업 때 까지 친하게 지낼수 있었다.

 

내 고교시절은 그렇게 지나갔고 졸업과 동시에 퇴사를 하고 기숙사생활의 아프고도

썰렁했던 시절도 같이 마감을 했다.

겨울엔 세탁시간에 더운 물이 나오는데 100 미터 선수들도 그렇게는 못 뛸 거다.ㅎㅎㅎ

점호가 끝남과 동시에 물 대야를 들고 뛰는데 웃기지도 않는다.

자리다툼에 바가지 다툼, 목욕탕의 속옷 분실은 예사고 수천명이 사용한 기숙사니

그 속 사정이야 오죽 했으랴~~ㅎㅎㅎ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던 3 년의 대 장정을 끝내고 미련도 없이 마산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졸업장 하나만 달랑 들고.

그 졸업식에서 엄마랑 아버지 막내 오빠도 참석했고 우린 마치고 또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켰는데 그 땐 짜장면이 아니었다고 기억난다.

친구들과 삼년을 울고 웃던 마산의 한일합섬을 떠나던 날

다른 건 하나도 안 섭섭하던데 기숙사를 돌아가던 학교 길이랑 교대시간에

출근부에 체크하던 그 사무실은 그립고 아련~할 것 같았다.

강당에서 합창부 노래 연습을 하던 일이며 방송반이 되어서 막 방송을 하려하다가

 없어져서 섭섭해 하던일, 운동장에서 교련연습을 하면서 구령을 넣으며

보부도 당당하게 학생들을 호령하던 일, 밤 늦게 하교 하면서 야간 근무가 싫어서

기숙사 방에서 최대한 늦게 일어 났다가 지각시간이라 뛰고 뛰고 또 뛰어 출근부

체크 하던 일, 야간근무 마치고 퇴근하면서 양덕동 먹자 골목에서 싸구려 튀김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가난했던 시절.....

 

그 시절이 있었기에 난 살면서 어떤 어려움도 아무것도 아닌게 되었고

우리 애들한테는 아무리 어려워도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한은 공부 뒷바라지를

해 주리라 굳게 마음 먹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같이 아픔도 슬픔도 나누었기에

가끔씩은 보고 싶은데 워낙에 졸업하고 소식을 끊고 살아서 어디들 있는지.....

내 모습이 다분히 남성다운 면이 있어서 날 본의 아니게 남자로 오인하고

많이 추종하던 어린 후배가 몇몇 있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학교를 쉬고 있을 대도 어쩌다가 감기라도 걸렸다 싶으면 달려가서 밥이며

약을 챙겨 주는 정성에 다른 친구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받아야만했다.

질투에 부러우ㅡㅁ 까지.ㅎㅎㅎㅎ

난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많이.

나 스스로 해 냈다는 자긍심도 있고 중간에 탈락하던 친구들도 많았는데

난 끝까지 버텨 냈으니 장하기도 하지......

고교동창회가 마산에서 지금까지 있다는데 앞으론 가 볼 참이다.

이 맘큼 시간도 지났고 내 친구 중에는 대학교수도 있다고 하고

총장 사모님도 있다고 하니 참 대단한 친구들이다.

잠도 안 자고 복도에서 눈이 벌겋게 되면서 까지 책과 씨름하더니만 대단해 대단해.

장한 내 친구들.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보같이 그 즘에서 주저 앉아버린 내 자신이 부끄럽다.

공부를 아주 잘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더라면 나도 대학은 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ㅎㅎㅎㅎ

 

지나간 시간들이 나를 이만큼 오게 했으니 나도 시간들에게 감사해야지.

이 자리에 설 때 까지 내가 겪은 아픔이나 설움은  바람한테 선물하고

지금이 행복하니 더 무얼 바래?

남편도 애들도 건강하게 잘 있어주니 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지 않을까?

곧 있을 휴가 때 아내의 허리에 무리가 갈까 싶어 차를 바꿔주는 세심한 남편.

멀리 과테말라에서 엄마를 걱정 해 주는 큰 딸 내외.

둘째의 무슨 공모전 입상과 두 개의 연구실 조교자리.

막내의 무난한 학교생활.

내가 선택한 남자와 이 만한 애들을 낳고 키우며 살고 있는 지금이 난 좋다.

나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스물 넷의 남자를 나꿔채서 결혼을 하고

세 아이들을 낳아서 건강한 가정을 꾸리고 지금까지

알콩달콩 닭살 돋게 살고 있는 내가 난 자랑스럽다.

난 내 선천적인 낙천성이 좋고 고맙다.

그런 성격으로 어떤 급한 일도 어려운 일도 다 이겨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난 내가 차....암 좋다.

 

누가 뭐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