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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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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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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버지...(11)


BY 솔바람소리 2008-11-03

 

아버지는 손에 무엇을 들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분이 일 년에 한두 번 출타를 하던 날이면

어김없이 내 선물을 들고 오시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인형을 들고 오셨고

그 후로는 책을 사들고 오셨다.

천자문 책부터 동화책에 이르기까지

어느 때는 열권도 넘는 책을 한꺼번에

사들고 오시기도 했다.

한 때는 동네에 한 대밖에 없던 이모네 TV를 보기위해

우리 남매가 필사적으로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자고 있던 나를

누군가 흔들어 깨워서 일어나 보니 눈앞에

떡하니 TV 한 대가 놓여있었고 그 곁에

뿌듯한 얼굴로 아버지가 서있었다.

우리 남매는 한밤중에 동네가 떠나 갈듯이 고함을

질러댔다. 우리 집 부자다!!!, 면서...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제일 먼저 차고

다녔던 내 까만색에 동그란 모양이 예쁜 손목시계도

아버지가 사다 주셨다.

바다가 잔잔한 날에는 배에 태워서 낚시를 데리고 다닌 적도 있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우리였는데도 크리스마스

아침마다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 있기도 했다.

비록 우리들이 갖고 싶어 하던 것들은 아니었지만...

찐빵, 사탕, 과자같은 먹을 것들이 놓여있었다.

우리는 매번 산타 할아버지가 바쁘셔서 잘못 알고 주셨나?

아니면 착한 일을 조금밖에 안 해서 이런 것들로

줬나보다, 며 조금은 실망했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산타의 존재를 믿고 컸다.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연탄을 굴리다가 실패했던 어느 날

아침에는 대문 앞에 완벽하게 모양을 갖춘 눈사람이 양동이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기도 했다.

누가 만들어 놓았을 것 같냐는 엄마의 질문에 나는

‘엄마’를 대답했다. 엄마는 아니라며 ‘아빠’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겨울밤에는 동생과 공기놀이를 하는데 아버지가 엄마랑

함께 편먹고 하자고 자처하고 나서기도 했다.

바다일로 손이 곧은 아버지의 공기는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소리가 요란했다.

방학이라고 뭔가를 특별하게 원하던 우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놀이동산’에 갈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을

어기시곤 했다. 그런 어느 날은 갑자기 바다건너 ‘행당섬

(지금의 행당도)에 데리고 가셔서 빌려온 사진기로

우리들의 모습을 찍어주기도 했다.

흔치 않던 그 일들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함께한

좋은 추억의 전부다.

가슴 아픈 얘기꺼리들은 며칠 밤낮으로 떠들어도 모자란 반면 그에

비하면 아주 짤막하고 초라한 추억들이다.

며칠 전 아버지와의 속 깊은 화해가 있고 보니 그런 추억이

라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지만 그 당시에는 크게 감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착한 사람이 됐나보다 했던 아버지는 며칠가지 않아서

다시 못된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심을 할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늘 불쌍하다고 했고

왜 불쌍하냐고 물으면 외롭게 커서 그런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둔했던 내가 엄마의 깊은 뜻이 담긴 말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 아이를 키우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만약에 내 자식 중에 하나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살아도

장애자가 될 가능성에 놓인 채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면 나는 과연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그 삶을 살아 온 나로서는 아버지처럼 ‘장애자’가 되게

하느니 ‘죽음’을 선택할 것도 같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살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마음은 진즉에 나 홀로 용서를 해드렸다.

 

부모반대를 무릅쓰고 한 남자를 만나서 살던 나는

큰 아이가 4살 되던 무렵까지 얼굴에 철판 깔며

친정에 자주 내려가 있었다.

헤어지자는 내 말에 남편은 목숨같은 내 자식을

고아원에 보내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다.

도망치듯 아이만 데리고 오던 날, 아버지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내 방에서 밥 먹고 화장실 갈 때 외에는

두문불출하듯 지냈다.

그러던 며칠 후 밤 남편이 자고 있는 내방 창문으로

아이만 데리고 올라가버린 적이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버린 아버지는 노발대발하는

엄마와는 달리 태연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준비해서 상에 올리게 했다.

그렇게 태연하던 아버지가 아이와 함께 다시 내려온

사위를 앞에 두고 몸을 떨며 흥분하셨다.

역시나 엄마처럼 ‘감히...’를 서두로 말을 이으셨고

세상 둘도 없는 귀한 딸을 운운하셨다.

“저거 잘못되면 니놈 내 손에 죽는다.”며

무릎 꿇은 남편 앞에 주먹 쥔 손으로

진노하셨다.

둘째를 낳고도 내게는 남편과의 고비가 있었다.

서울로 부모님 두 분이 올라 오실정도로 큰 싸움이었다.

아버지께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씀을 하시는데도

오기처럼 입은 닫은 사위 앞에서 ‘가자’ 시며 내 손을

잡고 나섰다.

내 새끼들은 나두고서 아버지 자식 손만 잡고 계셨다.

 

나는 그 옛날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며 한번도

편들어 주지 않던 아버지가 남편에게 하는 행동들조차

탤런트의 연기만 같았다.

아버지 자존심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다.

안 살 듯이 했다가 자식 때문에 다시 돌아서는 나를

아버지가 가슴 아파한다는 엄마의 말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누가 그 딸 아니랄까봐 증명하듯 나 역시도 술 좀 마셨다..

그런 딸이 술 취한 어느 날 아버지에게 한 말씀드렸다.

“아빠가 좋은 남편이었다면 엄마 팔자 따라간다는

딸도 좋은 남편 만났을 거야!!!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모두 아빠 때문이라구...“

 

사춘기 때도 자존심을 이유로 입 밖으로 내뱉지 않던 말들을

결혼하며 삶이 궁핍해지고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힘겨움을 핑계로

비관하며 서슴없이 해댔다. 술로 아버지가 엄마를 힘겹게

하더니 남편 역시 술로 나를 미치게 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술을 내가 먹어 없애겠다며 안주도 없이 대접으로

따른 소주를 한입에 마셔댔다.

작은 폭력성을 보이는 남편에게 나는 더 큰 폭력으로

대응했다. 살림을 집어 던지면 나는 살림을 박살을 냈다.

고스톱으로 고리를 뜯었다며 돈을 내미는 것을 받아서

쫙쫙 찍어 버리기도 했다.

‘나는 참 지지리 복도 없는 년’을 속으로 쏟아내며

남편과 죽을 듯이 싸웠다.

그러던 내가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지가 1년이 넘었다.

술에 깨면서 전 날 내가 한 행동들이 기억에 없는

허무함이 싫어졌다. 삶도 더 허무했고 나도 허무한

인간만 같았다. 그래서 안마시기로 내게 약속하며

지켜나가고 있다.

생각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에 따라서 마음이 바뀐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내 부모님의 삶을 지켜봐야 했던 나만 손해를 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동안 내가 부모님께 끼친 걱정에

비한다면...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정리하듯 지난날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 보니 내 잘못이

더 큰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