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가 길다보니 사이에 없어진 부분을 올려야 할 것 같아서 올려드려요. 올린 글은 그래도 보이는데로 수정을 했던 건데 더 많은 오타가 있을 수도 있겠고 문장이 좀 매끄럽지 않아도 언제나처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요...)
아버지께 딱 한번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 쓰며 직장생활을 이유로
수원에서 자취를 한 적이 있었다.
운수회사의 본사에서 경리를 보던 시기였다. 밤이면
근육의 경련이 일어나는 ‘쥐’가 심하게 일다가 마비처럼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수원에서 있을 때였는데
나는 몸을 단련시키겠다고 일부러 버스를 두 정거장 전에
내려서 출퇴근을 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몸의 이상은 날로 심해졌다.
음식을 먹는 것은 물론, 배출하는 것도 힘겨웠다.
남들은 덥다는 사무실 난로 옆에서 나는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도 한기를 느꼈다. 몸살 정도로만 생각하고 하루 병가를
내고 홀로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심각한 표정의 의사가
보호자와 함께 오라고 했다. 나는 부모님께 연락하지 않고
근처에 살던 간호사였던 작은 외숙모와 함께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CT촬영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주사바늘로 배의 이곳저곳을
찔리는 끔찍한 일까지 당했지만 그 병원 이외에도 3군데의
병원을 전전하다가 을지로 백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을 당시였다. 그래서 삶에 애착이 없었다.
개그맨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장애인 개그맨을 보지 못했다.
군인이 되고 싶었다. 장애인 군인을 본 적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은 ‘장애’란 족쇄 때문에 할 수가 없었고
내 몸에 맞은 것을 찾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부터 난 내 장애를 심각하게 인식했던 것 같다.
그런 것을 누구에게 말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란 명목으로 열등감에 똘똘 뭉쳐있던 나였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 구차한 삶에 애착을 갖으며
몸에 칼까지 대면서 살지는 말자고 했다.
-어쩌면 나는 비겁한 겁쟁이였는지도 모른다.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장애를 무기삼아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부터 했으니... 스티븐 호킹 박사를 보며, 또
얼마 전에는 시작장애인이 비장애인도 힘들다는 사법고시를
패스했다는 소식에도 때때로 매스컴을 통해서 세상을 놀래킨
그들의 성공 앞에서 사지 멀쩡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 꿈을 위해서 굽힘없이 노력했더라면 우리나라 제 1의
장애인 개그맨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데...-
한시가 급하다는 의사의 말에도 나는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주변의 애를 태웠다.
엄마는 그때부터 물 한 모금을 안 드셨다.
내가 죽는 순간에 함께 죽겠다고 하셨다.
그 당시 큰 동생은 목표대학의 입학을 목적으로
재수를 하다가 병원에 계신 엄마를 대신해서 공부의
꿈을 접고 아버지 곁에서 배를 타고 있었다.
그 동생에게 한 날 병원으로 전화가 왔다.
“누나는 누나 혼자라고만 생각 하지마. 누나가 잘못되면
우리 모두가 잘못되는 거야. 아버지가 어제 밤에
누나가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면서
울먹거리셨어. 나도 힘들고 막내도 힘들어. 엄마도
누나 곁에서 많이 힘드실 거야... 누나가 생각 좀 잘했으면
좋겠어...“
아버지의 울먹임 따위는 상관도 없었다. 나의 죽음을
바라던 아버지였는데...그런 분이 울먹일 필요는 없었다.
나 때문에 고생하는 동생들과 곁에서 이틀을 꼬박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엄마 때문에 나는 마음을 돌렸다.
두 달 동안 8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허리와 옆구리로
2번이나 받아야 했다. 의사의 말들이 그 몸으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것이 기적이었다니 내 명은 타고
난 듯도 하다. 쇠를 박아 고정시킨 척추는 3년 정도는
조심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안정을 위해서 그렇게
벗어나고만 싶었던 집에서의 생활이 시작이 됐다.
몸통 전체에 맞춘 보조기를 착용하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사들의 당부가 있었다.
퇴원하고 1달이나 됐을까... 프라스틱 보조기의 조임이
골반과 척추 뼈에 닿으며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을 줬다.
그래서 보통은 침대에 누워서만 생활을 했다.
보조기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착용할 수도 벗을 수도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친구들이 학교로 직장으로 다들 바쁜 일상에서 틈틈이
주말마다 내게 다녀가곤 했지만 평소에는 무료한 시간을
그들이 선물한 책을 보며 달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어느 날 밖이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 속에서
아버지의 욕이 들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무슨 일인지 걱정됐지만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했던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웅성거림이 가까워지더니 이내 집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술도 체하지 않았는데 화가 나서
있었다. 자주 접하던 상황인데 이번에는 엄마가 아닌
큰 동생의 옷이 잔뜩 찢어진 채로 아버지에게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의 머리도 산발이었다.
동네 사람들과 둘째 이모와 이모부까지 가세해서
모두들 무어라며 화가 난 아버지를 달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와장창, 쨍그랑...’ 아버지의 주먹질에
응접실의 유리문이 모두 박살이 나서 거실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감히 어디서 말대답이야?!!!
너 어디 그 아구리 다시 나불대봐!!!“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내가 아는 동생은 아버지와 눈도 못 마주쳤었다. 재수를
하겠다는 동생에게 돌대가리를 운운하며 공부를 때려
치우라는 말에도 눈물만 꾹꾹 눌러 참던 동생이었는데
아버지에게 말대답을 했다니 나조차도 놀라운 일이었다.
엄마와 내가 병원에 있던 2달 동안 배를 탔던 동생이
변해있었다. 그 순한 아들이 아버지께 지지 않고 말대답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엄마한테 해준 것이 도대체 뭔대요?
왜 불쌍한 엄마한테 욕을 하고 때리고 그러세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동생을 무참하게
때렸다. 말리는 엄마도 때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말렸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거실바닥으로 유리조각이
융단처럼 널려있는 위에서 동생과 엄마가 맞고 있었다.
내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제 버릇 개 못주고,
검은 개꼬리 3년 땅에 묻어봐야 황모 안 된다는 말처럼
아버지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내 앞에서만은
욕은 하더라도 엄마를 때리지는 않았는데...
다시 어린 날의 지난 아픔들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도 아버지 피를 이어받은 그의
딸이었다. 나도 터져나는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는
더러운 성질의 그의 딸이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의사의 말 따위는 필요 없었다.
어차피 살고 싶지 않은 삶이었다.
그렇게 나의 생명을 원했다는 사람들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내 옆에서 보이는 그 행동들이 나를
이성을 잃게 했다.
팔로 기어서 침대 아래도 떨어졌다.
눈앞에 벌어진 아비규환을 행해서 내 몸이 뱀처럼
기고 있었다. 아버지 못지않은 이글거리는 분노를 안고
나는 내방을 나와 유리 파편으로 널린 거실바닥으로
몸을 끌고 나갔다.
맨 살과 다리로 유리가 파고드는 것을 느꼈지만 그런
고통 따위는 내 마음에 거대한 상처와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작
은 아픔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나를 바라보다가 말렸지만
나는 모든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며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바닥에 쓰러져있던 엄마와 동생도 나를 보았다.
공허한 눈으로 맞고 있던 그들의 시선과 내 눈이 마주쳤다.
넋이 빠졌던 엄마 눈에 맞을 때도 없던 공포가 보였다.
엄마가 개처럼 유리파편 위로 기어서 내게로 왔다.
나는 엄마의 손도 뿌리치고 아버지에게로 곧장 향했다.
그리고 당당히 서있는 아버지의 다리의 옷자락에 매달려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의 눈도 놀란 토끼 눈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