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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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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버지...(8)


BY 솔바람소리 2008-10-29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엄마의 말대로

나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울지 않았다.

탈장이 빠지는 힘겨움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겨울에도 땀으로 옷을

적셨지만 나는 체육시간에도 빠지지 않고 달렸다.

꼴찌를 하더라도...

한여름 뙤약볕에 몇 시간씩 계속되던 운동회 연습으로

쓰러지는 아이들이 속출했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앙 물어야만 했다.

나 자신과의 싸움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계집애’는 조신하게 집에만 있어야 된다는 아버지의

말을 나는 언젠가부터 생글거리며 어기기 시작했다.

잔뜩 때가 낀 그물에서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르고

뒹굴며 놀았고 대나무 낚싯대를 휘두르며 놀기도 했다.

밤마다 다리부터 시작되는 쥐의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래도 숙제를 끝마치면 곧장

나가서 뛰놀곤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뿌듯해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총싸움, 칼싸움을 장난으로

시작 했다가 결국 싸움질로 번지기도 수두룩했다.

특히 내 바로 밑에 남동생은 또래와 싸움을 시작해서

그 애의 형에게 맞고 오기 일쑤였다.

우리 부모님은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밖에서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편들어 주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듣기라도 했지만 아버지는 맞고

울고 들어온 동생에게 매까지 들었다.

세상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아버린 나였기 때문에 우리끼리라도 똘똘 뭉쳐야

했고 동생들만은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생을 때린 녀석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나보다 나이가

3~4살 많은 선배들과의 싸움도 마다치 않았다.

바닷가에 살면서 입이 거친 뱃사람들의 말들을 들으며

컸기에 욕도 옴팡지게 잘했던 나였다.

삐쩍 마른 것이 그것들을 상대로 싸워 맞는 것이

당연지사겠지만 맞는 것이 두려워 물러 난 적이 없었다.

죽이라고 덤비며 잡아 뜯고 물어뜯었다.

나를 피해 끝내 산으로 도망쳐버린 녀석들을 이를 물고

쫓아다녔다. 그래도 못 잡으면 그 집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

나는 참 독종이었다. 몇 번의 그런 싸움을 격고 나니

아무도 내 동생을 건드리지 못했다.

한번은 낚싯대로 맞고 들어 온 동생 때문에

두 손으로 들어야만 들렸던 장작을 들고 가서 싸운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그만 아버지가 보고 말았다.

계집애가 밖에서 창피한 줄도 모른다고 혼을 내는대도

굽힘없이 싸움질을 해댔다. 그런 나의 한쪽 팔을 억지로

끌고 아버지가 집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히죽거리며

보고 있던 녀석들의 얼굴과 그런 상황에 다른 집 부모라면

자기 자식 편을 들었을 텐데 한번도 우리 편이 되어 준 적 없는

부모님께 섭섭한 마음까지 복받쳐서 끌려 들어온 나는

동생처럼 매를 맞은 것도 아닌데도 서러운 통곡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발까지 동동 굴렀다.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가 한 말씀하셨다.

 

“기집애가 왜 그리 성질이 못 됐어?!”

 

그 말에 나는 더 서럽게 울어대며 말했다.

 

“아빠는 내 진짜 아빠가 아냐!!! 새 아빠지!!! 나는 질수 없어!

엄마처럼 맞은 수 없어. 나는 내 동생들도 맞는 거 못 봐!!!“

 

동생이라면 맞아도 수십 번도 더 맞았을 상황이었다.

용납치 못할 딸의 행동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가셨다. 그리고 머지않아 엄마가 바다에서 허겁지겁

달려오셨다. 아버지가 집에 얼른 가보라고 하셨다며

놀라서 달려오신 엄마에게 나는 울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딸의 얼굴을 엄마는 웃으며

옷소매를 끌어올려 닦아주셨다.

 

“엄마는 이제 우리 딸이 있어서 마음 편하게 살아도

되겠다. 이렇게 씩씩한데...잘 했어. 아빠가 너 자장면

사주라던데 먹을래?“

 

엄마의 행복한 미소에 서러움이 조금은 사라졌지만

분은 삭일 수가 없었다.

 

자라면서 생긴 주체할 수 없는 분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해댔던 폭력을 보며 품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완전한 인정을

받을 수 없던 ‘장애’의 몸 때문이었는지...

엄마가 알아버리기 직전에 끊을 수는 있었지만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담배를 태웠다.

학원의 올 라이트를 핑계 삼아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때로는 선생님들에게 반항을 해서 교무실에 수없이

드나들었다. 끝내 학교에서 연락이 가는 바람에

부모님을 놀래켜 드리기도 했다.

가출을 계획했던 친구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나는

고등학교까지는 힘겹게 졸업을 했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에도

내 결정에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객기도

부렸다.

 

-난...그 결정에 두고두고 후회를 하고 있다. 내 엄마의 말처럼...-

 

누구에게 끌려 다니기보다 내가 리더의 자리에 있기를

좋아했다. 선생님들이 3대 명물 속에 나를 집어넣는 것을

뿌듯해 했다. 거침없는 행동으로 남녀공학이었던 중학교시절부터

응원단장과 오락부장을 도맡았다.

외할머니 댁에서 지내가다 집으로 내려가던 날

아버지께 또 매를 맞아 상처를 안고 있는 엄마를

보면 그렇게 사랑하던 내 엄마에게 바보라며 울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집에서는 부담없이 흘렸다.

아버지와 제발 이혼을 하라고...왜 그렇게 당하고만 사느냐고...

엄마가 가만히 있으니까 아버지가 더 그러는 거라고...

이제 나도 다 컸으니까 나 때문에 산다는 말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밖에서 장사할 때는 사람들과 지지 않고

잘도 싸우면서 왜 아버지에게만은 그렇게 당하고 사느냐고...

엄마도 싫다며 서럽게 울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