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유류분 제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444

또 다른 의미의 축복


BY 들꽃 2008-10-02

남편이 학교 수업 조정하고 서울로 문상을 왔다.

평상시 남편의 태도로 미루어 봤을때, 거의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시는 분 들은  이제 23살 짜리 아이들 사랑놀음에 부모가 너무 오지랖 넓게 설쳐 되는것 아닌가 라고 눈쌀 찌푸릴 수 도 있음이다.

 

우리 부부는 연애 10년의 기간을 거쳤다.

여고 3학년 때 각학교 별로 시화전시회가 문예반을 중심으로 열병 처럼 번질때,

우리 학교 시화전에서 그를 만났다.

엄밀히 말하면 일대일이 아니라 문예반원 팀 끼리의 만남 이었다.

첫 미팅 후 남편이 목을 맸다.

오빠들 많은 속에 성장해서 솔직히 남자에 대한 신비감은 애초에 물건너 갔었고, 그래서였던지 남자들 앞에 내숭떨기 보다 쿨하게 할말 다하고 오히려 그들의 뜨악해 하는 반응을 즐기는 편 이었다.

 

그의 애정 공세는 질겼고, 호흡이 길었다.

예민해 보이면 잠수 탔다가 잊혀질만 하면 주변을 맴돌며 자신의 존재를  변죽 건드리며 상기 시키곤  했다.

어쨌던 우리집의 반대는 너무나 거셌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결혼식 당일 새벽, 목욕하러 나가는 내 목욕 바구니 붙잡으며 \'지금 이라도 안 늦었다. 니가 마음만 바꿔 주면 뒷 수습은 내가 다 하마.\' 라고 엄마는 그 시각 까지도 미련을 접지 못했으니까.

 

우여곡절 끝, 결혼식을 했으나  2년 이상  엄마는 막내 사위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지도 않았고 명절에 한 두 번 받는 절조차 삐딱하게 돌아 앉아 받으셨다.

 

아들이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 나에게 이런말을 했다.

\"엄마!  아빠로 인하여 우리 가족 마음에 상처 안 받은 사람은 없어요. 나도 참 많은 아픔이 있지만 가장 큰 피해자가 엄마 이기에 , 감히 엄마 앞에 입열지 않을 뿐이죠.

그런데 어느날 문득 아빠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보니 엄마와는 차원이 다르게  아빠도 피해자 일 수 있겠더라구요.

서운 하겠지만 제 말 끝까지 들어 보세요.

명절에 친가와 외가를 다녀 보면 분위기가 극과 극 이예요. 외가는  다들 최고 학부까지  마쳤고, 넉넉한 살림 살이에 사람을 귀히 여기는 성품들 까지...

아내인 엄마도 능력있어 함께 돈 벌고 있죠, 모두 고개 절레절레 흔든 할아버지 할머니 모셨죠, 헛 말 이라도 엄마 입에서 \'하이고, 나같은 마누라 있음 나와 보라고 하세요\' 라는 말 한마디 없으니 아빠의 그 자존심에 내성적인 성격에 엄마께 파고 들 빌미가 전혀 없었겠더라구요

아마 표시나진 않았지만 많이 주눅들고, 많이 눈치 보고 하셨을거예요.

그런 아빠가 떠 오르자 혼자 주체할 길 없는 눈물이 마구 흘러 내리면서 아들인 나라도 예우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서 참 맘 고생 많았을 겁니다\"

 

미처 헤아릴 마음 없었던 남편의 아픔을 아들은 예리하게 조목조목 짚어 나갔다.

문득 그사람의 상처가 나보다 더 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함께 한 세월의 곰삭은 정에 가려져 그 사람의 소중함을 잊고 지냈음을 부인 할 길 없었다.

 

더 충격적 이었던 것은 그 해 가을, 남편과 둘이서 조촐한 술자리를 가지면서 \'당신은 아들 복도 있습디다\'

서두를 꺼낸 뒤 아이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옮겼는데....갑자기 목고개가 꺾이더니 어깨 들썩이며 울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그날 우리가 술을 좀 마시긴 했지만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그가  결코 술힘 때문만은 아닌, 가슴 깊은곳에 뭉쳐있던 서러움이 꺼억꺼억 울음으로 토해져  나왔다. 

 

뭉클한 그 무엇이 내가슴을 찌릿하게 관통해 나갔다.

 

그래서였을까?

아들의 여친은 대학 공부도 1년이 남아 있는 상태이고 얼핏 들은 얘기론 빚정리 때문에 경기도 변두리에 있는 아파트 팔아도 다 못갚을거란 말이 있었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 기준을 그런곳에 둔 적 없다.

나역시 주위에 있던 가장 낮은 여건의 사람을 지아비로 맞았으니까.

 

남편은 두말 않고 서울로 왔고 부의금을 좀 넉넉하게 준비해 전했다.

장례식장에 함께 가긴 했지만 무슨 좋은 구경거리 났다고 부부가 부산을 떨 것인가?

남편 혼자 보낸뒤 병원에서 준비해 둔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올 줄 알았는데 남편은 의외로 시간이 지체됐다.

30분 쯤 뒤, 와이셔츠 앞섶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고, 눈은 벌겋게 충혈된 남편이 그때까지도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내품에 얼굴을 묻고 어버지~~우리 이제 어떻게해요? 우리 엄마는 벌써 아빠가 보고 싶다시는데...제가 어떻게 다독여 드려야 하나요?... 하는데... 그냥 애 등만 투덕투덕 두드려 줬다\'

 

잦은 발걸음 뗀 후 힐껏 뒤돌아 봤더니...세상에나...23살의 그 애가 하얀 소복 차림으로 우리를 멀거니 바라 보고 있는게 아닌가?

 애송이 같은 그나이... 아직은 그런 이별 경험 하지 않아도 되련만...

눈 부신 가을 햇살은 무심히도 밝았고, 높고 푸른 하늘은 어찌 그리도 아름답던지.

 

세상살이 힘겨움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곤 한다.

근심. 걱정. 미움. 증오. 사랑. 돈욕심. 명예욕심. 기쁨. 즐거움. 애환 등등...

살아 있기에 누리고 화해하고 문제점 해결 하려 종종걸음을 치는 것이리라.

이 육신이 땅에 발을 디디고 하늘을 이고 있음에 가능한 일들이지 않는가?

이글을 쓰고 있는지금, 탈렌트 최진실이 목 매단채 자살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어차피  한번 받은 목숨, 지겨워하고 고한탄스러워도 백년을 살지 못하고 다음 세대에게 자리 비켜 주어야 한다.

요즘엔 자살이 대세인것 같다.

말못할 고민, 내 맘 몰라 주는 야속함도 시간의 흐름에 마음 헹구다 보면 스스로 해결 되어 지거늘.

죽이고 싶은 증오도, 혼자 왕따 된것 같은 서러움도, 살아 있음에 따라 오는 또 다른 의미의 축복이지 않을까?

늘 웃을일, 늘 행복한일상은 어쩌면 나태와 헤이함을 불러와 더 빠른 속도의  파멸로  이어 지는건 아닐까?

분명 숨 쉴 구멍 없어 허덕이고, 그 고통이 빨리 해결 되어지길 염원한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그 터널을 빠져 나왔을 때, 자신감은 물론 이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안목이 길러 진다는 점이다.

 

행복도 불행함도 삶이 가져다 주는 또 다른 의미의 축복임을 깨달아 살아 있는 동안엔 모두 넉넉한 가슴으로 즐겨야 할 것 같다.

 

배웅 하고 돌아서며 남편의 뒷 모습을 가슴에 담았다.

 함께한 세월이 그  무게 만큼의 고단함으로  남편  어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 부터 였을까?...저 늙음의 뒷태가..

내일은  오랫만에 남편 한테 간다.

햇살 밝은 창가에 앉아  머리 뉘여 놓고 돋보기 끼고 귀지도 파주고 목덜미 부근 제 멋대로 나있는 흰머리도 솎아 주고 올 참이다.

밤엔 욕조에 뜨거운 물 받아  아이를 씻기듯 정성을 손길에 담을거고,  몸서리치게  미워했던 내 마음의 묵은 때도   한꺼풀 한꺼풀 벗겨 내고 올 참이다.

내가 잘나서 이 세월을 견딘게 아니라 그가 내 곁에 존재해 있었음으로 바르게 버틸 수 있었다 고백도 하련다.

 

어리게만 여겼던 아이들이 우리처럼 사랑을 하고 둥지를 틀 계획을 마음에 깔고있다.

이세상에서 엄마 다음으로 제일 사랑 한다는 그애, 그래서 우리에게도 소중 할 밖에 없는 그애를 사랑 중에서도 제일 정제된 참 사랑을 주고자 노력 하련다.

 남편이 느꼈던 아픔을 그애가  다시 느끼게 할 순 없는 것이다.

 

그래...

마음 자락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렇게 부자가 되는것을.

나의 잘남도  가족이 곁에 있음으로 빛을 발할 수 있음이고, 육신이 떠나면 끝날것 같지 않은 애증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그애 아버지가 교훈으로 남기는것 같다.

 

부디 좋은곳에 가시길...... 고인의 명복을 비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