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집을 장만하려는 나는 한마디로
무식했다.요즈음도 집을 장만하려면 10여년이 가까이 걸리는데
무슨 내가 돈도 없이 집을 짓는다고 친정엄마는 딸이 빚에 몰려
빚쟁이가 될까봐 남편 뒷바라지 때는 오빠 한태 원성들을 뒷
감당도 않고 논을 팔았지만 집을 장만하려는 내 욕심에는 냉담
하셨다. 고생을 하거나 말거나 일체 돈은 주시지 않았다. 처음
집을 장만 하려고 할 때 신청을 해놓고는 뒷일이두려워 남편과는
멀리도 있었지만 의논할 가치도 없고 해봤자 아무 도움 없는
사람 경주에 계시는 시동생에게 내 집 갖기에 동참했는데 자신이
없다니까 “ 아지매 정 지닐 수 없다면 돌아서서 파실 각오하고
시작해 봅시다. 그 말을 위안으로 삼고 강행한 집이다. 내 집인지
무언지 모르고 이사를 했다. 아들이 집을 짓는다는 말에 어머님은
한 푼 도움은 못 주셔도 궁금하셔서 집짓는 근황을 물으시다 이사
한 후 조카를 데리고 집을 찾아 오셨다. 주소를 갖고 약도를 보고
찾아 오시면서 우리단지 입구에 와서 내 아들도 이런 집을
장만했으면 좋겠다고 맘먹었는데 조카와 약도대로 찾아오니
그런 집이 내 아들 집이라 대문에 들어서시면서 “야야 이게 너의
집이가?\" 정확히 대지가 63평이었다.이사했다고 이웃과 나눠
먹으라고 떡과 감을 무겁게 조카와 가지고 오시어 거실에
내려놓고 앉으시며 기뻐하시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밖에 나가 아들의 문패를 확인하시기도 했다. 아들의 낭비벽을 키운
어머니가 왜 모르셨을까 그렇지만 며느리에 기는 살리고 싶지
않으셨다. 며칠이 지나자 본색을 들어 내신다. “이 넓은 땅에
누가 집을 이따위로 짓자고 하더노? 방이 세 개가 뭐꼬 네 개는
되어야지” 넓은 땅에건평이 작다는 말씀이다.
내 집이 될지 말지도 미정인 상태에 시어머님 욕심이시다.
어른 앞에 절대로 대꾸를 하지 말라는 친정엄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님은
말썽 많던 아들이집을 짓고 산다는 그 자랑을 몇 년 동안
계속하셨다. 석 달 동안 계셔서 그 동안 아이 문제는 걱정
없었지만 봉급날 빌린 돈 이자를 갚고 나면 생활비가 없을
정도다. 남편의 봉급은 보내줘야 주는거다. 집 짓는 것을 남편
에게는 남의 집 일이다. 처음부터 집 짓는 걸말렸으니까 아무
말없이 사표내지 말고 근무만 잘 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
이었다. 그 때는 부동산 투자 붐이 없어서 무리를 해서 집을
짓는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내 놓은 집도 있었다. 참고로
그 당시 집 짓는데 총 450만원이 들었다. 200만원은 일 년 거치
19년 상환으로 직장을 담보로 담보대출을 일괄적으로 받았다.
내 수중에는 사십이 있고 방 두 개 전세가 30만원 150정도빌린
셈이다. 그 당시 사채이자가 5~6부였다. 직장에 여자들이 많아서
신용만 있다면 돈 빌리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그 때 내 봉급은
10만원이조금 넘었다. 그런데 그 집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다.
요즘말로 인테리어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머님은 계시는
동안 아들 딸 들을 부르고 싶어 셨다.잔디 보도 불륵삿시가
되지 않는 상태라 둘째 시숙이 보시고 다른 집 모양으로
하려면 얼마가 드느냐고 물으셨다. 25만원이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송금해 주셨다.참고로 그때 우리 집 값어치가
둘째시숙 집보다 높았다. 그때는 대구 서울이 지금처럼
차이가 많이 나질 않았다. 나는 동료들에게 빌려 석 달 만에
돈을 갚았다. 이왕 맨몸으로 시작한 일 내 자존심상 구질하기가
싫었다. 그런데 직장이 있다는 건 너무 좋은 일이다. 내가 늘 집을
팔까 말까 걱정을 하니 나를 너무 좋아하시는 분이 나를 부르셨다.
결혼을 해도 박 양하고 불렀다. 정년을 곧 앞둔 분이다. 그 당시
아들이 강원대학교 음악교수였다. “내가 돈 50만원을 3부에 빌려
줄 테니까 비싼 이자는 갚고 박 양이 돈이 생기는
대로 갚아라. 너는 절대로 돈 떼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려는 게 너무 기특하다.“ 그 당시 은행이자라고
생각이 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 물건을 언제나 한보따리 사
가신 분이다. 아들도 내 보다 나이가 많아서 나를 자식처럼 생각해
주셨다. 오랫동안 연락하고 살았다. 아들 댁에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듣고는 소식이 끊어졌다. 지금은 90이 다 되신
어른이라 돌아가셨으리라 생각이 든다. 대구에 계실 때 가서 용채를
조금 드리니 너 가 준 돈 보람있게 쓸게 하시면서 너무 기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