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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


BY 들꽃 2008-08-08

날씨가 너무 무더운 탓일까?

모든일에 의욕이 안 생긴다. 그냥 멍 한 하루를 보내기 며칠째.

어제 아침, 여느 날 처럼 휴대폰이 울었다.

낯선 번호...

\"혹, ㅇㅇ 씨.... 폰... 맞나요?\"

자신 없는 목소리, 그러나 격양 되어있다.

외모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 지지만 그 사람 고유의 음성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유경이? 너, 송유경 아니니?\"

\"문디 가시나~~살아는 있었네~~\"

여고시절, 단짝 친구중 하나였던 유경이.

공부도 잘했고 성실 했으며 엄청 노력파였다

 

엄하고 고지식 했던 유경이 아버지는 맏딸을 서울로 보낼 생각은 아예 없었고, 지역의 국립대학도 남녀가 섞여 있는 곳이라 원서 한번 써 볼 기회 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자대학 장학생으로 선발 되어 졌으나 서울쪽 대학에의 꿈을 기회 한번 가져  보지 못하고 접으려니    한으로 고스란히 남더라고 했다

 

우리 세대의 서글픈  현실 이었다

부모밑에 조신하게 자라 좋은 혼처 자리 나설때 까지 연애 같은 것 하지 않고 정갈한 몸으로 시집 가야 하는...

\"내 인생, 그때 부터 꼬였나봐...\"

마른 목 축이며 씁쓸히 내뱉는 그애 말 뒤엔 마른 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대학 3학년 여름 즈음 대꼬쟁이 같던 아버지가 쓰러져 돌아 가셨고 세상 물정 어둡고  천상 여자였던 어머니와  셋이나 되는 동생만이 맏딸 이라는 명분 아래  곁에 덩그라니 남겨졌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아이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빚잔치 하고 아버지뻘 되는 남자한테 시집 간 댓가로 동생들 공부는 마치게 했다는 확인 할 길 없는 소문만이 이리저리 입에서 입으로  쏠려 다니곤 했다.

 

약속 장소에 나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팍삭 늙어 버렸지만 나보다 십년은 더 살은듯한 유경이가 웃고 서 있었다

\"많이 늙었지? 동기들이 첨엔 잘 못 알아 보더라구... 그래도 넌 옛모습 많이 남아있다\"

 

북한산 부근 식당에서 팥칼국수 먹고  동네 식당서 제육볶음으로 저녁밥 먹을때 까지 가족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니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던 무슨 상관이냐?

순수했던 시절, 재잘재잘 깔깔깔 대며 꿈꾸던 소녀적 친구이면 된거지..

무거우면 덜어내고 가슴속에 쟁여 놓은들 어떠냐...

얼굴 바라보며 그리움 녹여내는 친구면 된거지.

 

\"혼인 신고만 하고 남편 따라 케나다로 떠났어. 애는 셋인데 아들 둘 딸 하나..모두 결혼 시켰어\"

이 말 이 후 헤어질 때 까지 남편 얘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 너 참 부러웠다. 아니...굉장히 얄미웠어\"

\"엥 ? 왜? 내가 그렇게 밉상 굴었니 너한테?\"

\"아니~~그 반대지. 문디 가시나, 난 간이 떨려 시도 한번 못해 봤건만 쌤들 눈 피해 별들의 고향 같은 영화 다 보고 다녔지~~

흥미 없는 수업 시간엔 소설책 열나게 읽었지~~연애 편지 몽땅  대필해 주고 하고 싶은짓 다하고 놀것 다 논 너나 코피 쏟아가며 공부한 나나 성적은 얼추 같이 나왔으니 약올라 미치겠더라구...\"

그랬다. 어른들 앞에선 엄청 착실한 척 했지만 부뚜막 남먼저 올라가 즐길건 다 즐겼다. 시험 운도 따라줬다

 

\"영감쟁이~~그렇게 빨리 갈거면 성적도 넉넉 했는데 의대 공부를 시켜 줬던지, 너처럼 서울 쪽으로 대학을 보내 줬으면 내 인생의 색깔이 지금보단 고왔을텐데...\"

몇잔 마신 술기운 탓이었을까?

깊고 깊은 상처로 남았을 과거사 조금은 내 비췄다

 

손을 잡으니 손바닥이 나무껍질 같다

그 고단했을 삶, 거친 손바닥이 세월을 대신한다

 

\"10년 전 나왔을 때 널 무척 찾았는데 아무도 너 그림자도 못봤다는거야.. 어떤 애는 니가 몸이 약했으니 죽었을거라는 말도 하더라 살아 있으면 이렇게 안 나타날수 없다면서...

너도 참 모질다. 어쩜 그리 독하게 사니?  우리가 살면 얼마나 오랫동안 살겠니~~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교류도 하면서 그렇게 살자\"

\'서울쪽 아이\' \'대구쪽 아이\' 이름과 전화번호 적힌 종이 두장을 내밀며 날 찾게 되면 꼭 연락해 달라는 명단 이라며  질곡의 세월살이, 문득 정신 차려 돌아보니 모든 연락은 끊긴채 홀로 버둥 거리고 있었다 

그 암담했던 현실에 물꼬를 터주며 꼭 만나 보라는 숙제물을 남겼다

 

찾다찾다 마지막으로 친정집 바뀐 전화국번을 알아낸 뒤 뒷번호는 그대로 전화를 걸었더니 셋째 오빠가 내 연락처를 알려 주더라고 했다

\"널 만날줄 알았으면 좀 멀리 비행기표를 끊을걸. 돈 없다는 말 도 빈 말들인가봐. 티켓이 없데..

어차피 들어가도 혼자 삶인데.. 엄마 모시고 들어 가려고 두번째 걸음인데 노인네 고집이 왠만 해야지. 며느리년 한테 그 구박 받으면서도 아들집서 죽겠단다

그래도 엄마는 니 청춘 담보 잡아 우리가 이렇게나 살고 있는데 또 너한테 짐 지우기 싫다 라는 말씀이나 하는데 동생들은 어서 엄말 자기들 눈앞서 내가 치워줬으면 하는 눈 빛이야

내가 핏줄에 덕 없음일테지...슬픈 각시 오나가나....\"

 

혼자 웅얼웅얼 하는말 들으며 유경이 삶이 그림처럼 펼쳐져 보인다

두번이나 나를 찾았으니 한번 건너 오라고 했다

 

우리 나이대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 하는것 같다.

거친 세파에 시달렸어도 혼신의 힘으로 뭍에 기어 올라 온 사람과  잠수되어 흔적 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들.

세가지 네가지 제주가 있어야 밥벌이 할 수 있다는 아이들 세대...

그 치열할 경쟁에 맘 아려온다

멋모르고 살아내온 우리 삶들이 더 행복함일까?

 

30여년 만에 만난 친구와의 해후.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밤을 밝힌다

 

나는 조만간 멀리 떠날 채비를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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