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8년만의 귀국이었다.
한국을 떠나 이민을 가신지는 30년 ,
나는 거의 잊고 사는 아버지를 ,절절히 못잊는 친정여동생의 주선으로 팔순잔치는 한국에서
전처 자식들과 함께, 어쩌면 생애 마지막 이될지도 모르는 만남을 , 1년전부터 구상해서
브라질에 있는 큰 남동생이 비행기 여비를 준비하고, 자식들 각자 분담으로 생일상과
모시기 ,큰딸인 나의 몫은 친정어마니와 함께 국내 여행을 맡기로 하였다.
금새 1년이 흐르고 ,6월 8일 귀국하셔서 꿈결같은 한달이 훌쩍 지나고 7월8일 11시 비행기로
미국으로 가셨다.
어색한만남. 우리에겐 부모이신 친정모친과 아버지..그러나 다른 부인과 재혼하여 배다른 동생들과
미국에서 사시는 어버지와의 이별은 40년이 지났건만 ,엄마는 늘 어제의 일처럼 기억의 파편들이
튀어 오를 때면 한바탕 아버지 욕을 해대시곤 한다.
그 영감님과 함께 마지막 여행을 하게 한다는 것은 자식들의 희망사항이였을 뿐 ..그앙금을
모두 지우기엔 친정 모친은 버거우셨나보다.
아버지는 이민을 가시더니 열열한 기독교쟁이가 되어 돌아오셨다. 당신의 귀국목적 중90%는
자식들에게 전도를 하실목적이였음을 적나라 하게 보여주셨다. 생일상을 차렸는 데도
마음에 들지않는 다고 절을 받지않는 아버지의 똥고집 때문에 , 내 생애 처음 기독교식 기도를
하게 되었다. 기도속에 하고싶은 이야기를 넣어 기도를 하자 내속을 알아 차린 친정 여동생은
배꼽이 빠지는듯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솟옷에 오줌을 즈렸다고 한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대화가 될리가 없었다. 아버지 말씀은 진실로 자신의 잘못으로 김순옥 여사(모침)를 불행하게
만들었고,자식들 앞길도 막아 불행한 결혼으로 혼자된큰딸과 손주들에게 미안해 한다고
말씀을 하시지만 정영 그렇게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당신의 고집스런 성격일것이다 라고
이해한건 거의 떠날때가 다 되어서이다. 마지막이 될것같은 마음에 해드리고 싶은 것들은
해보고 싶었는 데, 당신이 마음에 안드는 것은 말리시는 통에 돈이 굳기도 했다.
자기관리가 철저해서 ,매식때마다 빠지지않는 메뉴로는 부로콜리,당근 ,양파 ,하루에 과일반쪽이상
적은 식사량과 비흡연 등으로 80이 되었으나 ,너무도 건장한 60대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아버지는 아마도 100살도 더 사실것 같아 보였다. 그에 비해 재작년 위암수술을 받으신
모친의 모습은 75세 에 비해 젊어보이긴 했으나 ,대꼬챙이처럼 말라계셔서 아버지가
놀라셨나보다 .당신생각은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 다정하게 사과하실 의향을 가지고
오신듯하나 ..그 긴시간 속에서도 남아있는 미움의앙금을 버리지못하신 모친의 툭툭 뱉는
어감속에 포기를 하신듯했다.
엄마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진작에 잘헤어졌네..잘헤어졌어..\" 진심이기보다는
위로의 말이였고 마음에 담지마시길 바라는 딸의 표현 임을 아실지..
아버지가 오신다는 것을 모친께 말하면서 당부를 한말이 \"엄마 이제 마지막이고, 미움일랑은
모두 버리세요 , 이제와서 마음 상할것두 없으니까...엄마 성당에 나가시니까 기도하세요\"
\"그래 .이제와서 ,뭐하것냐..기도할께..\" 그러나 그끈질긴 미움은 잘 가셔지지가 않는 듯하다.
아버지는 작심하신듯 당신이 일찍 6.25 전쟁 참여와 .홀홀단신 이북에서 1.4후퇴시 남한으로 오셔서
엄마를 만나 우리들을 낳고 바람을 피워 사단이나서 가정파탄이난것.왜이민을 가게되었는지
새엄마와 딸아이들과의 갈등 증폭으로 도망치듯 가 신이야기등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들속에서
어쩌면 마지막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아버진에 대한 감정은 미움이 더크다. 어려서는 어긋난 결혼을 하게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였으나, 세월을 살면서 불행한 한여자의 삶 ,(엄마의 거친 인생)을 하게한 미움이 더컸다.
그러나 이번 방문을 통해 다 비워 버리기로 마음 먹고 있었기에 오신다는 기쁨보다는 덤덤한마음이
더 컸다. 동생들이 주선하니 따라갈수 밖에 없는 불효의마음이 앞서 있었다고 볼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뵙고.함께 따라다니다 보니..참으로 피는 못속인다고 ..어려서 특별히
큰딸을 귀여워 해주셨던 기억들..당신 무릅에 어린꼬마 큰딸인 나를 앉치시곤 동태알이라던지..
맛있는 반찬들을 먹여 주시던 기억들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에대한 마음을 일게 되다보니..따나시는 공항에선 마음이 하얗게
비워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참으로 이상했다. 남들과 다른 핏줄들만이 할수 있는 교감때문일게다.
동생 큰아들이 소령진급하면 다시오신다는 약속을 하시고 떠나셨지만 .
다시 오실지는 반반이다. 그래도 아이 들에게 할아버지에대한 추억과 자기자신의 뿌리인 조부의
모습을 심고 떠나셨다. 평생 한두번의 만남으로 기억되는 할아버지 라도 생존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떠나시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든다.
공연히 마음이 바쁘고 예산초과 지출도 있었으나 .아버지가 한국에 오신 거제도를 비롯해서 부산 경주 영천등 경남지방을 함께한 여행에서 아버지가 매우 만족해 하신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평생 안보구 싶었던 친정 아버지...
팔순잔치를 핑게로 만난 이번의만남을 통해 미음을 비웠다.
작정하고 저지르는 잘못이 어디 있으랴.... 살다보면 생각의 미숙으로 감정들이 다치고
그 결과들로인한 자식들까지 아픔에 동참해야 했지만.. 어떻게하랴,, 버릴수 없는
부모이고 형제들인데 이제 내나이 50중반 ..부모님들 이 헤어지신 나이는 30대..
나의30대를 되돌려보니 참으로 철없던 나이 .. 그래서 자식들은 아픔속에서 성숙되었고
나 이제 내 자식들이 나를 평가하고, 나로인해 아팠던 기억들을 가지고 살것이다.
내려가는 사랑이고 ,흐르는 세월속에서 묻혀가 고 잊혀져간다.
그것이 인생이고 삶일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나의부모님들에대한 기억은 자식인 내가 품을 것이고 나에대한 기억들은
내 자식들이 품을 것이다.
이제 부터라도 좋은 기억을 품어줄수 있게 부모인 나의 남아있는 삶들을 아름다운 만들어야겠다.
딸이없어 서운한 나.. 언제쯤 딸같은 며느리들을 만날수 있을까?
그래야 즐거운 기억들을 만들수 있을 터인데.
이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나의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언젠가 ,아버지80살 생일을 기억하며 .당신을 그리워 하는 날이 다시 올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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