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같던 그 일상
소나무 가지를 걸친 햇살이 부드럽다. 참새 떼 한 무리가 몰려와 부산을 떠는 바람에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던 소나무를 놀라게 한 모양이다. 새순이 돋지 않은 암녹색의 솔가지가 떨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놀란 솔가지의 떨림에 참새들은 더 놀랐는지 작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무채색 하늘을 향해 일제히 날아올랐다. 침묵하던 바람도 가세를 하고 낮은 산자락 뒤에 숨어 있던 구름도 몇 점 구경하러 나왔다. 잔잔하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작은 소란이 몇 그루 소나무가 서 있는 정원에 일고 있다. 작은 일에도 화들짝 놀라는 내 모습을 본 듯, 소나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온해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먼지 같던 일상은 특별할 것 없는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른 아침 분주한 식탁을 차려내는 일이나, 딸아이들 등교를 위해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겨주는 일. 대문에 걸린 주머니에서 우유를 꺼내는 일을 시작으로 화단에 물을 뿌리고 주차장과 계단 청소를 마치는 사소한 일들, 철 따라 옷장을 정리하고 계절에 맞는 찬거리를 준비하는 일, 월말이면 배달되는 고지서들이며 습관적으로 해질녘이면 시장을 나가는 일들까지 그때는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들이, 이즘 어찌 그리 아름답고 살뜰하게 다가오는지 모를 일이다.
구석에 무심하게 내린 먼지에도 자리를 내어 주지 못하고 거실로 화살처럼 내리 꽂히던 햇살에게 조차 고약하게 굴던 때가 정말 있기는 했었을까. 빈집에 종일 혼자여도 쓸쓸함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때, 커다란 양푼에 열무김치를 넣고 밥을 비벼 우적대며 먹은 후 이 사이에 고춧가루 낀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면서 양치질할 생각도 하지 않고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골목에 나가 수다를 떨던 그 시절이 사뭇 그리운 것을 보면, 그동안 너무 포장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때론 침묵이 아름다운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사는 일은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기억해 내려 애를 써봐도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는 시절이 있는 반면,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파워포인트를 쏘아 올린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절은 어쩌면 고통과 어울린 시절이 아닐까 한다. 일부러 기억을 지우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겨우내 짠 털 스웨터를 봄볕 받으며 풀어버린 것처럼, 어느 기억은 흔적 없이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버리고 싶다 하여 버려지는 것이라면 쓰레기 분리수거 하듯 정리했을 것이다.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먼지 같던 일상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직은 살아야 하는 날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겨우 10여 년 지났을 뿐인데, 그 시절이 태고 적처럼 느껴지는 것은 몸으로 치른 세월은 10여 년이지만 마음은 억겁의 세월을 부둥켜 안고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내 사랑만 진짜이고 네 사랑은 가짜라고 우겨대며 가슴에 대못을 박아대던 일이며, 하루치 쌓인 먼지 만큼의 잘못도 용서하는 방법을 몰라 치맛자락에 찬바람을 몰고 다니던 어린 여자는 흰 머리카락하며, 이마에 주름이 생기고서야 넉넉한 가슴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먼지 같던 그 일상들이 있어 나를 살찌우게 해 주었고 폭풍이 이는 바다를 안전하게 건너는 용기와 울창한 숲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지혜를 알려 주었음에도, 그 모든 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급작스럽게 세상에 내 던져진 상황을 이해는 하지만 인정하지 못한 오류 때문이리라.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차하고 있을 때는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법이니, 출발하기 전에 사방을 눈여겨 봐두어야겠다. 몇 정류장을 지난 다음에도 서 있던 곳의 아름다움을 기억해야 하니까. 먼지 같던 일상이 있어 내 삶이 행복했고 그 일상으로 인하여 삶을 영위할 수 있었고, 지고 있는 짐도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느 날 기적처럼 먼지 같던 그 일상 속에 들어가 살고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