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엔 비로 얼룩진 풍경이 스치고 빗물로 지워진 풍경이 달려온다. 가방을 챙기며 많은 생각들이 왔다가 사라지는 어젯밤처럼 오늘은 비로 인해 생각이 얼룩지고 지워진다. 고속도로엔 비에 젖은 차들이 앞으로 앞으로 달려간다. 내가 가는 길들은 평탄한 고속도로는 아니고 비포장도로였다고 여겨지지만 인생길이 고속도로였다면 매순간 순간이 소중하거나 안타깝거나 슬프거나 하는 여러 가지 감정의 폭이 넓지 않았으리라 본다.
가방엔 밤잠이 안 올 때 볼 책이 한권 들어 있고, 이 책은 친구가 준 전경린님의 엄마의 집 이 들어있다. 이혼한 엄마와 기숙사가 있는 대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딸 입장에서 쓴 소설인데. 친구가 이 책을 구입해 읽으면서 내 생각이 났었다고 했다. 꼭 너 같더라. 읽어본 결과 주인공 엄마는 나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현실적이고 당찬 여자였다. 나는 약하고 여리고 감성을 첫째로 여기는 감성에 허우적거리는 여자. 감정에 빠질 것을 조심하자, 조심하자, 어리석은 년! 너는 감정이 첫째가 아니잖아. 현실을 보라고 이 천지 바보야!
내가 빗길을 마주보며 가는 곳은 경기도 안성 막내이모가 살고 있는 곳이다. 따지고 보면 막내이모네 집이 아니고 시댁이면서 시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다. 뭐, 다시 따지고 들자면 막내이모 집이지만 말이다. 시골집을 개조해 잔디를 깔고 꽃을 심고 동물을 기르는 것이 꿈인 막내이모가 드디어 꿈을 포크레인으로 착수해 뜰을 만들며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네 생각이 나더라, 꽃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꽃과 함께 살고 싶다던 네가 생각난다, 어여와라, 널 기다리고 있으마.
가방엔 민들레 꽃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작은 공책과 사인펜이 들어있다. 샘플 화장품과 구겨 넣어도 되는 챙이 넓은 모자가 있다. 꽃 심을 때 입을 편한 바지와 면티와 따뜻한 겉옷 그리고 50개짜리 커피믹스 한 통과 모닝 빵 한 봉지. 도시를 떠나 시골로 잠입하는데도 도시의 맛을 버릴 수는 없나보다.
내가 태어날 때 막내이모는 일곱 살이었다. 막내이모는 나를 업어 보고 싶어서 억지로 업고 서서는 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힘이 안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막내이모와 나의 인연은 학창시절에도 처녀시절에도 결혼을 해서도 헛헛한 헛바지같은 인연이 아닌 질경이처럼 질긴 인연으로 살아왔다.
칠년전 막내이모가 암수술을 받을 무렵 나는 이혼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름보리처럼 누렇게 뜬 얼굴로 막내이모 병실로 찾아들었을 때 막내이모도 익을 대로 익은 누리 팅팅한 보리밭이었다. 우린 울지도 않았다. 서로 기가 막혀서 위로의 말도 못하고 토독토독 떨어지는 항암주사액을 보며 이모는 시한자락을 읊었다. 삶이 우리를 속이더라고 절망하거나 노하지 말자. 그러자, 알았지? 그렇게 이모는 암과 맞붙어 밤을 새울 무렵 나는 혼자된 씁쓸함에 잠을 못 이뤄 가슴 시린 새벽을 맞곤 했다.
살면서 매 순간 순간 절망할 때가 많다. 숨쉬기조차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잊혀지고 덤덤해 지는 것, 이모는 암에 대한 공포로 인해 우울증이 생기고 혈압과 당뇨가 있어 하루에 두 번씩 약을 영양제려니 하고 꿀떡 삼키면 나는 커피가 보약이려니 하고 하루에 두 잔씩 홀짝홀짝 마신다.
이모네 집은 시골집을 개조했기에 소박하고 단출하다. 넓은 마당에 잔디만 들입다 깔아 놓아서 동네 어떤 여자가 산소 같다고 했다는데, 이모네 마당에 잔디를 깐 사람들 전문직종이 묏자리 잔디를 깔아주는 업체라고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파란 스레트 하늘 지붕, 방과 방 사이엔 세월처럼 오래된 나무 마루가 깔려있다. 구들장이 놓인 불 때는 방을 그대로 살려 두었고, 부엌 옆으로 부엌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이 내 방이었다. 막내이모는 연분홍 꽃무늬 벽지를 바르며 이 방을 네가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인생이 별거 아니더라,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살면 되는 거지.
막내이모는 도시에서 살 때 꽃님이었고, 나도 도시에 살 때 꽃순이었다. 우린 꽃만 보면 주책을 있는 대로 떤다. 오머나! 이게 무슨 꽃이야, 으아~~ 꽃이다, 아흐흐 넘 예쁘다.
뉘신지 모를 무덤 주변에 엉겅퀴 꽃을 보며, 보라색 꿀풀꽃을 케면서 샛노란 애기똥풀꽃을 뽑아오면서 개망초꽃을 바라보면서 호들갑을 떨고 응큼한 신음소리를 냈다. 우린 꽃에 맛탱이가 간 미친 여자들이다. 우린 꽃에 미치미치해서는 허벌나게 웃는 여자들이다. 어느 한 곳에 미치면서 우린 살아야 한다. 그 대상이 바로 지천에 깔린 야생화 꽃들이고 들길에 소복하게 올라오는 코스모스 꽃이다. 고속도로가에 샛노랗게 고개를 흔들며 인사를 하는 금계국이고, 생명력이 끈질겨 시골 사람들이 진저리치는 개망초꽃이다. 이모는 나는 꽃에 미쳐 하루하루를 산다.
이모는 융단처럼 깔린 초록 잔디가 소원이라서 넓은 마당 속속들이 잔디를 심었다. 잔디 가장자리로 우리는 꽃을 심어댔다. 손가락만한 꽃모종을 어지럽게 뱅글뱅글 돌려가며 심었다. 아침 먹고 심고 점심 먹고 심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으로 심었다. 귀하고 고급스러운 꽃들은 가격이 비싸기도 하고 소박하지 않아서 어릴 적에 본 꽃을 중심으로 심고 심고 심었다. 몇시간씩 꽃을 심고 일어나려면 허리가 곧게 펴지질 않았다. 이러다가 허리 착 꼬부라진 할망구가 되겠구나, 손가락도 호미를 닮아가겠거니 한다.
꽃분홍 꽃망울이 옹망졸망 모여 피는 끈끈이 대나물, 노란 코스모스 금계국, 동요를 흥얼거리며 심던 과꽃, 담 밑에 피던 봉선화, 한복 저고리 같은 앉은뱅이 채송화, 땅위에 연잎 한련화, 보라색의 신비로움 벌개미취, 야생 달맞이를 낮에도 피게 만들어 낸 원예종 달맞이꽃, 산골짜기 고향 생각 도라지꽃, 한여름 태양을 닮은 패랭이꽃, 하얀 교복 입은 소녀 마가렛, 백일동안 변하지 않는 마음 백일홍, 천일동안 사랑을 나눈다는 천일홍, 쟁반처럼 큰 얼굴 부용, 들판에서 훔쳐온 엉겅퀴, 꿀단지 꿀풀, 줄기가 꿩의 다리를 닮은 꿩의 다리. 물가에 피고 또 피는 부처꽃. 산사태를 막아준다는 사철푸른 맥문동.
이모와 나는 뿌리를 내려 고개를 쳐들고 있는 꽃들이 대견해서 밤에 후레쉬를 비춰가며 꽃들이 잠을 못 자게 수다를 떨며 웃고 또 웃어 제겼다. 세상 것들 다 물러가거라. 다~~아~~ 잊어버리자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모든 부스러기들……. 낄낄낄 웃는 거야, 꽃처럼 말이야. 그치, 이모? 그럼, 그럼, 망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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