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개구리 떼가 요란하게 울더니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우산을 받쳐 들고 마당어귀 편지함부터 살펴보았다
첫 번째 딱새부부가 오월 중순경에 여섯 마리의 새끼를 부화 시켜 나간 후 편지함속에 덩그마니 새집만 남아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치워버렸는데 곧이어 또 한쌍의 부부딱새가 부지런히 드나들며 새집을 만들더니 산란을 시작했다.
집배원 아저씨가 우편함에 편지를 던지면 화들짝 놀라 멀리 달아나 안절부절 하는 어미 새가 딱해서 이번에도 임시편지함을 만들어 마당가에 두었다.
참새 과에 속하는 딱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주택의 창고나 신발장 심지어 세워둔 자동차에도 산란을 한다.
사람 사는 주택을 아기 새들이 안전하게 부화 될 수 있는 곳으로 믿는 생존법칙이 지혜롭고 놀라운 놈들이다.
벌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옆 산도 살펴보고, 밤사이 모두가 안녕한지 아래마당에 내려가 작은 채마밭까지 둘러보았다
처음으로 오일장에서 사다 심은 고구마순 한단이 가뭄에 바삭하게 말라 죽은 듯 쓰러져 한동안 몹시 애가 탔었다. 먹어서 맛이 아니라 내 실수로 그것들이 고사하면 너무도 딱한 일이니까.
부지런히 물주기 십 여일 후부터 고구마 줄기가 파랗게 살아나고 끝에서 쌀알만 한 작은 잎들이 돋아나던 날의 기쁨이라니!
질긴 생명력으로 뿌리가 활착이 되고 지금은 손바닥만 한 잎들이 수북하게 올라 비를 반기고 있다.
다른 해보다 일교차가 커서 냉해로 키가 자라지 못했던 옥수수 고추 토마토 가지 참외 등 열세가지 채소들이 비 부족으로 생기가 없이 늘어졌다가 흡족하게 내리는 비를 맞고 곳곳해진 것이 너무 예쁘고 기특하다.
내친김에 아랫길을 따라 논둑에 가보니 동네 아저씨내외가 못자리를 손질중이시다 곧 모를 심을 모양이다
무려 육십 년째 동네어귀 한집을 지키며 살아온 아저씨 내외가 나에게는 시골생활의 지침서 같은 분들이다 작정한 귀농까지는 아니지만 도심을 떠난 시골생활 삼년은 분명 그분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비록 손바닥만 한 텃밭을 만들어 여러 가지 작물을 조금씩 심어 기르고 있지만 농사에 문외한인 나는 모르는 것이 있을 때마다 그분들의 지혜를 빌렸다.
모종마다 심는 시기가 다른 것과 이랑에 비닐 멀칭을 하는 일부터
퇴비를 주는 방법, 순을 솎아주는 법까지 궁금한 것을 여쭈면 곧바로 방법을 일러주는 친절한 분이다.
수십 년 경험에서 얻은 산지식들이 그분의 머릿속에는 가득한 것 같다. 자기 땅은 한 뼘도 없이 대토를 해서 평생 농사를 짓는 분들이 정말 놀랍게 부지런하시다.
고추농사와 벼농사 콩농사 인삼농사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변화에 꼼꼼히 대비하고 지혜를 내어 농작물을 기르고, 어제의 경험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평범한 농부. 한길만 파며 살아왔을 그분의 수식 없는 진솔한 말 한마디가 가끔 내 머리 속 굽은 잣대를 펴고 비만 쪽으로 기울어진 붉은 바늘을 푸른 쪽으로 시원스레 당겨놓는다.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도식적 논리로 빠른 결론을 얻도록 학습된 현대인들은, 느리고 당장에 드러나지 않는 성과를 못견뎌하지만 사실 그들을 안전하게 영위케 하는 것은 기다리며 순응할줄 아는 자연이 저변에 절대존재하기 때문이다.
조급하지 않고 여유 있게. 부족한 듯 넘치지 않게. 힘껏 일하되 과욕을 부리지 않고, 기만 없는 정직함, 거둔 분량에 마음의 크기를 맞추는 자연스러운 밸런스만이 복잡하게 얽힌 정신적 퍼즐을 깔끔하고 조화롭게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효율적 기능에 밀려 절하된 품성 적 가치와, 전염성 강한 헤비급 바이러스인 허영으로부터, 결코 청정지대라고 장담할 수 없는 농촌이지만 그래도 내 경험상 시골은 아직 푸근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조화롭다.
장날 장터에서 그을린 얼굴과 투박한 손으로 손님을 부르며 뜯어 온 나물 한 봉지를 팔려고 애쓰는 분에게 돈 몇 푼을 주고 건네받을 때, 노동에 대한 값이 너무 헐한 것이 아닌가 하여 늘 죄송하다.
덤이라고 얹어주는 손길을 마다하고 많이 파시라는 덕담이 고작이긴 하지만 그나마 그 말끝에 위안을 얻는다.
적어도 나는 서툰 삽질에 허리를 다쳐 고생한 후로 농사의 고통을 알게 됐고, 알 수없는 물것들에게 쏘여 가려움이 심한 팔을 긁어 염증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비설거지를 하다 일손을 쉬고 있는 아랫집 아줌마에게 밭에서 기른 상추와 쑥갓을 뜯어가라 소리쳤더니 서둘러 소쿠리를 들고 와 한가득 솎아가며 함박웃음을 보인다.
가지나 토마토 고추가 익으면, 좋아라하는 친구들에게 나눔을 하는 일이 행복하고, 한 달에 한번 꼴로 내려와 소쿠리에 가득하게 열매를 따며 즐거워하는 아들가족을 지켜보며 행복하다,
애써 기른 유기농 채소를 식탁에 올려 안심하고 마음껏 먹는 일이 얼마나 뿌듯하고 살맛나는 것인지!
고대의 키니코스학파는 아니지만 날마다 작은 꽃에 시선을 잡히고 키 낮은 풀 앞에 허리를 굽히는 일상을 통해 무욕한 자연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음이 기쁘다.
초록이 두툼해지는 토왕지절의 계절에 자연이 나로 인해 힘들어 하지 않도록 조화를 배우며 살 수 있는 여기.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살 수 있는 시골이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