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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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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으로...


BY 낸시 2008-05-14

우리는 특별한 사랑을 하는 줄 알았다.

갈등도 없고 오직 행복할 줄 알았다.

열 살에 만나 스물 일곱에 결혼할 때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면 있었지만 서로의 사랑은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도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천정이 높고 널따란 집을 좋아하는 남편, 야트막한 천정에 아늑한 공간을 좋아하는 아내, 새동네를 좋아하는 남편, 오래된 동네를 좋아하는 아내, 티비를 좋아하는 남편, 티비 소리에 짜증이 나는 아내, 골프를 좋아하는 남편, 골프는 속빈 사람들의 자기과시쯤으로 생각하는 아내, 두터운 이불을 좋아하는 남편, 얄팍한 이불을 좋아하는 아내, 단정하고 값 비싸 보이는 옷을 좋아하는 남편, 허름하고 털털해 보이는 옷이 편하다고 좋아하는 아내...

어찌 그 뿐일까... 하나가 남을 돕는 일을 해보자고 하면 다른 하나는 우리는 아직 그런 것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월급을 두고 남편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쓰고 남는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의견을 같이 하는 경우 우리도 의견의 일치를 볼 때가 다 있다고 신기해 한다.

아무튼, 신기할 만큼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이라는 것을 이루고 살았다.

참 많이 싸웠다.

성질이 급한 남편과 의견차이는 때로 폭력이라는 결과에 맞닥뜨리기도 하였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만심이 많고...초등학교 성적표 가정통신란에 빠지지 않고 기록될 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많았던 만큼 상처도 컸다.

몇 달 각방을 쓰기도 하고, 심각히 이혼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그만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몇번이었을까...

하지만 허니문 베이비로 태어난 아들, 연년생으로 태어난 딸이 있었다.

어리숙하지만 착한 아들, 외모는 몰라도 마음씨는 날 닮았다고들 그랬다.

야무지고 똑똑한 딸, 외모도 마음씨도 아빠를 닮았다고들 그랬다.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던 난 솔직히 딸이 이쁘지 않았다.

딸의 욕심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같이 살면서도 난 남편이 아들과 딸을 편애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랬었나보다.

딸은 그렇지 않다는데 아들은 아빠에 대한 상처가 크단다.

어리숙하고 착한 아들이 남편에게는 바보로 보였던가보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이르렀을 때 우리 가족의 문제는 극에 달했다.

둘 다 고등학교를 중간에 그만 두었다.

아들을 컴퓨터 게임에서 딸은 친구에게서 피난처를 찾았다.

가출을 일삼는 딸, 방에 틀어박혀 며칠씩 밥을 굶는 아들, 그 아이들이 부끄러운 아빠...

내가 왜 살았을까...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남편에 대한 화가, 아들과 딸에 대한 섭섭함이, 자신에 대한 미움이 걷잡을 수 없었다.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의 수단을 택하고 정신병동에 갇혀 있으면서 내 모습을 보았다.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내 모습, 착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내 모습, 현모양처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명심보감, 커서도 옆에 끼고 살면서 바르게 살기위해 노력했었다.

채근담은 화장실에 두고 읽으면서 마음을 비우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었다.

그래서 난 착한 사람인 줄 알았다.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들 그리 말해주기도 했었으니까 정말 그런 줄만 알았다.

그리 착한 나랑 사는 남편과 아들과 딸은 왜 힘들어할까...

사실 남편도 아들도 딸도, 아내인 나를 엄마인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남들에게 자랑할 때도 있는데...

내 가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내 선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갈 수 밖에 없는 내 선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몇 달 후 내 선함을 내려놓았다.

남편이 아들이 딸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이용해 그들을 상처 입히려 했던 내 추악한 모습도 인정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려 애썼다.

내 잘못마저도 따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냥 너도 나도 연약해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 애썼다.

없다고 도리질하던 신의 존재도 인정하였다.

 

몇 달 후 우리 가족은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이학년에서 각각 학교를 그만 두었던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갔다.

개성이 강한 우리 가족들, 지금도 여전히 갈등이 고조될 때가 있다.

하지만 에전과  달리 견딜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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