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여고생들의 장래 희망이 현모양처인 적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강요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그렇게들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그 중의 하나였지 싶다.
사랑에 눈 멀었던 시절,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 낳아 기르고 살림하며 산다는 생각에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시동생들 시누이와 우애하고, 그것이 내가 열심을 내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리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하였다.
시집 식구들이라는 새로운 가족 안에서 내 위치를 찾아간다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결혼하고 십년이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착각도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남편의 입에서 \"당신이 뭔데 나서?\"라는 말을 듣고 내가 뭘까를 곰곰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구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며느리도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면 뭐하나, 남편이 나를 자기 가족으로 인정을 안하는데...
결혼하고 나니 내 부모를 보러 친정에 가는 것도 눈치를 보게 되었다.
친구와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얼마나 현모양처 노릇을 잘했던지 남편은 나랑 결혼하고 십년을 살아도 친구랑 전화하거나 만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흉을 보았다.
아니지, 은근히 자랑하고 다녔다.
이십 년이 지나 모처럼 친구와 만나 점심식사하고 시부모 저녁상 차리려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부랴부랴 서둘러 들어선 현관문에서 시아버지의 꾸중을 들어야했다.
그저 웃음으로 넘겼지만 가슴에 섭섭함이 쏴아~ 밀려들었다.
내가 가꾸는 꽃밭에 심는 꽃나무 위치도 시아버지의 간섭을 받아야했다.
친정아버지였으면 내 꽃밭이니 상관하지 말아달라고 할 수 있었을텐데 허물없이 지낸다고 지내도 시아버지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보필하고 자식을 잘 키우는 일에 보람을 건 내 인생이 점점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심할 뿐 아니라 잘 해 낼 자신이 없어졌다.
잘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것도 커다란 착각이었다.
같이 살자는 둘째의 제의에 시아버지는 그러셨단다.
내가 왜 니까짓 것들하고 사냐...
우리 형편 같은 것은 묻지도 않고 우리랑 살기로 결정하셨다고 하였다.
맏며느리인 내 맘이 벌써 변해버렸는데...
큰 아들의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한 남편에게 말했다.
난 이혼을 하고라도 아이들이랑 이민 갈꺼야...
그렇게 버리고 온 시집 식구들, 가끔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나이들어 가면서 시부모가 자식들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마음도 이해되고 그만 모든 것 버리고 가서 모시고 살까 생각도 한다.
그러다 도리질한다.
내 몫이 아니야.
그것이 내 몫이라면 내가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해.
마지못해 할 수는 있어도 기쁘게 할 수는 없어.
그럼 포기하는 것이 좋아.
나도 타고난 인생을 누릴 권리가 있지.
남편 하나도 내겐 벅찬 상대야.
남편과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 셋이면 내가 감당할 수 없어.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없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몫만 하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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