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시간을 내어 컴퓨터 동창 찾기 사이트를 둘러보았다. 잊고 지냈던 그리운 이름들이 화면 속에서 보고 싶다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의 말썽쟁이가 되어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새침때기 여중생이 되어 친구들과 매점에서 라면을 먹고, 가랑잎만 굴러도 깔깔거리는 여고생이 되어 학교벤치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모두들 어떻게 변해 있을까? 코끝이 시리도록 추억이란 이름이 뒷덜미를 잡으며 불렀다.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시간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한참을 생각 속에 있는데, 작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울산동여자중학교 1학년 3반 친구들아. 이정진 선생님 반 모여라.’ 반가움에 얼른 키보드를 눌렀더니 친구들 몇 명이 선생님을 그리는 글을 띄워 놓은 것이 보였다. 너희들도 잊지 않고 있었구나.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내가 처음으로 가슴 떨리며 좋아했던 첫사랑!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발령을 받아 오셨고, 사회 과목을 담당하셨다. 약간 그을린 피부에 낮은 목소리로 ‘보리밭’을,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부를 때면 가슴에 두근거리는 바람이 불었다. 가끔씩 시를 읊어 주시고 다방면의 박식함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멋진 분이셨다. 두근거리는 가슴과 빨개진 볼로 바라만 봐도 눈이 부셔서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선생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봄 소풍이 생각난다. 배꽃이 막 피기 시작한 과수원으로 갔었는데, 바람에 눈처럼 날리는 배꽃과 뺨을 스치는 달콤한 향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전부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에 들떠서 소리를 지르고 좋아하는데, 선생님은 “우리 오늘 만큼은 정말 재미있게 놀아보자” 하시며 음악을 틀고 춤을 추셨다. 상상도 못한 행동에 처음에 놀랐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너 나 할 것 없이 모여 춤을 추었다. 부끄러움도 없이.
“놀 때는 열심히 놀고, 공부 할 때는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난 우리 반 모두가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아이들 속에서 어울려 춤을 추며 던진 말이었다. 난 그 말을 생활신조처럼 가슴에 새겼다. 머리는 항상 올바르게 지적으로 생각하고, 가슴은 항상 남을 위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 것이라고 깊게 새겨 놓았다. 그날 아래위로 하얀색 점퍼와 바지를 입고 연한갈색 선글라스를 쓴 선생님의 사진은 내 앨범 속에서 하얀 미소를 짓고 있다.
비틀스와 윤동주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알게 해 준 사춘기의 첫사랑 선생님. 학교에서도 인기 만점이었기에 아이들은 꽃이며 편지며 사탕을 선물했지만, 난 그 흔한 커피 한 잔 뽑아다 드린 적이 없다. 그만큼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얌전한 아이었다. 반에서도 항상 구석에 앉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갔을 때 담임선생님의 놀라움과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성적도 상위권에 있었고 그저 공부만 한다고 생각했을 선생님께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때리는 행동을 한 것이었다. 늦둥이의 막내로 태어나 큰언니와는 스무 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환경에서 자란 나는 엄마와는 다가서기 힘든 불협화음이었고, 어릴 때부터 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꼬마였다. 다 커버린 언니, 오빠들 속에서 가슴속에 외로움만 키워 왔던 나는 반항이라는 극단적인 사춘기를 선택했다. 오로지 아들밖에 모르는 엄마에게 막내딸은 천하에 쓸모없고 동네 창피한,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단 한 번도 엄마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으니 언제나 사랑에 목말라했고, 점점 말을 잃어 가고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집을 나가던 날, 이 세상에는 나 혼자뿐이고 차라리 고아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찬밥 신세인데 아무렴 어떠랴. 그저 눈에 처음 보이는 곳의 표를 끊었다. 대구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흘렸던 눈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사춘기적 감성에 젖어 흔들리는 차창 밖으로 수많은 고민들을 쏟아 내며 멀어져 가는, 눈에 익은 풍경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을 떠난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나 하나 없다고 집에서 찾을 사람이 있을까. 관심도 없는 천덕꾸러기인데.
대구에 도착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밤이 내려앉은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다리가 아프면 쉬고, 또 걷고, 머릿속이 하얀 도화지가 될 때 까지 돌아다녔다.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낯선 도시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술에 취한 아저씨들, 총알처럼 달려가는 많은 차들, 그리고 하나씩 셔터를 내리는 가게들. 거리는 차츰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내 작은 간은 가출도 할 수 없었나 보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니 얼마의 돈이 잡혔다. 이 돈을 써 버리면 집에 갈 차비는 없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밥이냐! 집이냐!
마음의 결정은 내리지 못하고 어둠이 깔리는 거리를 무작정 걷기만 했다. 우스운 일은 대구터미널 근처만 뱅뱅 돌고 있을 뿐 열네 살의 소녀는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몇 번을 고민하다 새벽에 선생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저예요.”
“너, 어디냐. 어디 있는 거냐.”
떨리는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들렸고, 몇 시간 후 우리는 대구터미널 앞에서 만났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더니 손을 잡고 선생님은 나를 식당으로 데려가셨다. 밥부터 먹고 이야기하자고 손에 숟가락을 쥐어 주며, 어서 먹으라고 밥을 앞에 놓아 주었다. 부모님께 걱정 마시라고 전화 드렸다고 하시며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셨다. 끝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선생님은 집에 가자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안 다치고 아무 일 없으면 된 거라며.
첫 차를 타고 내려오며 선생님은 미안하다고 하셨다.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지 못한 것을. “수정아. 진정한 용기는 마음속에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고 네 고민과 아픔을 밖으로 내놓는 거야. 큰 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너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되는 거란다.”하시며 손을 꼭 잡아 주셨다. 동전을 보여 주시며 “세상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아침이 있으면 밤이 있고, 희망이 있으면 좌절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다. 이렇게 항상 붙어 다니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산다”고 하셨다. “지금 너의 뒤를 돌아보렴. 즐거움과 신나는 마음이 보일 테니까.”
동이 터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들려주셨던 그 말들은 지금까지 삶의 지침이 되어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아니,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다. 떠오르는 해의 붉음이 가슴으로 들어오며, 따스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되어 선생님과 헤어져서 다른 반이 되었지만 가끔씩 만나 고민도 털어놓고 했었는데, 여름방학에 상상도 못한 전화를 받았다.
“수정이니? 어떡하니. 이정진 선생님이 돌아 가셨대.”
“뭐어? 그게 무슨 말이니!”
친구들이 모여서 선생님 댁까지 어떻게 갔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선생님 댁이었다. 서른셋 젊은 나이에 부인과 네 살 된 아이만을 남겨 두고 억울하고 가슴이 아파 혼자 가실수가 있었을까. 아이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방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무 놀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데 사진 속에서 선생님은 웃고 계셨다. 너무나 밝게 웃고 계셨다.
온통 울음바다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나오면서 하늘을 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이 하늘도 동전의 양면처럼 희망이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기쁘고 맑은 하늘이지만, 절망한 사람들에게는 원망의 하늘일 테지. 가슴속 쌓인 멍을 하늘에 대고 쏟아내니 하늘도 시퍼렇게 멍들 수밖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또 닦았다.
며칠을 사랑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앓아누웠다. 내게 해 주셨던 많은 말들과 하나씩 읊어 주셨던 시들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며 괴롭혔다. 그러나 시간은 조각난 가슴도 붙여 놓고, 상처 난 부위도 아물게 하는 요술을 부렸다. 내성적이었던 내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선생님의 덕분이다. 해마다 배꽃이 날리는 계절이 오면 가슴 설레는 첫사랑을 생각하는 것도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견디기 힘든 시련이 올 때마다 나는 동전을 본다. 그리고 용기를 얻는다. 1년만 더 있으면 돌아가실 때의 선생님 나이가 된다. 시간의 힘은 너무나도 무섭다. 그러나 가슴속에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있는걸 보니 시간도 뛰어넘을 수 없는 공간이 있나보다.
다른 친구들도 선생님을 잊지 못해 컴퓨터라는 공간에 남겨 놓은 걸 보며, 추억은 가슴에 묻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