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누군가? 태정태세문단세...명선광인효현숙경.... 찌질이같은 선조...선조의 아들이 광해군이다. 임진왜란 끝의 어려운 시기에 왕이 되었다. ~종, ~조도 아닌 그냥, 군(君)이다. 대충 벌써 감이 온다. 찌질이 선조의 아들, 임란 끝의 조선, 그리고 君 밖에 안되는 사람...15년간 조선통치.
오늘, 광해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내 기억을 살려) 소개함으로써 실리외교, 개혁, 기득권의 문제를 조선시대에 비춰 살펴보자.
광해군(光海君)은 1575∼1641년(66세 사망)으로서 돼지띠이다. 정치년도로 따지면 (선조 8∼인조 19)년이다. 즉 선조가 왕이 된지 8년만에 낳은 아들이고, 다음 왕인 인조 19년에 사망한다. 원래 선조는 정실(왕비)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고, 후궁의 첫째인 공빈 김씨에게서 아들이 둘 있었다. 형이 임해군이고 동생이 광해군이다. 하여간 어찌어찌하여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일본은 불과 10여일만에 한성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조선을 약탈한다. 임란으로 조선은 절반가량(토지 등)이 잿더미가 된다. 피신한 선조는 평양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分朝, 즉 정부를 쪼갬)를 설치하여 광해군에게 일정부분 조정의 역할을 하게 한다. 광해군은 여러갈래 조선각지를 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고 왜군을 저지하였다. 이 때 의병장 정인홍도 만난다. 그 후 왕위에 올라 후금(청)과 명 사이에 줄다리기 외교를 하고, 서울에 궁들을 재건하며,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개혁정치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강화에 유배, 제주도에 유배하는 등 고생하다 사망하였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을 반대하는 기득권층(서인)이 살제폐모사건을 빌미로 모반하여 반정하여 광해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사건이다. 살제는 동생(영창대군)을 죽인 것이요, 폐모는 인목대비를 유폐한 사건이다. 왜 그랬을까? 왕권을 노리고 반역을 하는 자들이기에 광해군으로서는그럴 수 밖에 없었다. 선조가 찌질이 임금인데 정실 2명, 후실 10명 가까이 되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무슨 군, 무슨 대군들이 수두룩했다. 그래서 기득권층들이 선조의 아들들 중 자기들의 이익에 적합한 아들을 왕으로 모실려고 여러가지를 꾸미다가 광해군에게 들키고 그러다가 부득불 살제폐모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실은 광해군 자신의 포악함과는 무관한 쿠데타 진압에 불과하다. 궁극적 원인은 당시 광해군을 쫓아내려던 기득권층의 야심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살제폐모사건으로 오히려 기득권층이 반격에 나서 광해군을 쫗아 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광해군일기다. 광해군 일기에는 광해군이 포악하고, 주인(명나라)을 몰라보고 오랑캐를 섬기며(후금=청),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강제로 쫓아내고) 궁궐을 지었다, 형제를 죽이고 대비를 유폐했다는 등의 내용으로 광해군을 악한 임금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광해군이 그렇게 나쁜 왕이 아니며, 실용과 개혁을 추구하다가 기득권에 밀린 왕으로 판단되어 지고 있다.
(광해군 일기)
광해군의 외교분야는 실리형이었다. 일찍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실은 의병장 노릇까지 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 국제관계를 주목했다. 이 때 만주사정은 후금의 발호기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풀어진 틈을 타서 건주 여진의 수장 누르하치는 부족을 통합하여 1616년 칸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금(金;後金)이라 하였다. 그 뒤 누르하치(태조)는 요동에 진출하고 선양[瀋陽(심양)]으로 천도하였다. 2대 태종은 내몽골의 차하르부(部)를 거쳐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새를 손에 넣고 1636년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청(淸)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광해군 시기는 대충 후금이 슬슬 세력이 커지면서, 누르하치가 치세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광해군의 안목으로 국제정세로 볼 때 명은 망해가는 나라고 후금은(비록 여진이라는 만주족 오랑캐이지만) 떠오르는 신흥강국이었다.
후금이 명을 치면서 파죽지세로 공략하자 명은 조선에 지원을 요청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우리 조선도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황폐해졌고 복구가 시급한 처지에 그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있겠는가? 또 자칫 후금과 사이가 틀어지면 결국 후금이 중원의 강자가 되었을 때 외교적으로 참 곤란하다. 그런데, 임란시 명에서 조선으로 지원을 해준 바도 있다.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한 뒤 곧 명을 칠 것이 두려워 명은 조선을 도와 조명연합군을 결성하여 일정부분 힘이 되어준 바가 있었던 바다. 하지만, 명은 조선을 부하 다루듯 하였으며, 여자나 부역이나 달라는대로 다 주어야 했다. 광해군은 이런 점이 썩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조선을 도왔다고는 하지만 결국 명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것이요 또 조선에서 적잖이 노략질도 한 것이 명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광해군은 명의 원조요청을 차일피일 미루며 1년을 끌었다.
하지만 강홍립(진주 강씨)을 장군으로 1만명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금의 배후를 치는(만주쪽에서 공략) 공격을 하긴 했지만 실제 전투에는 소극적이고 그나마 후금에게 항복을 해 버린다. 이는 대단히 실리적인 것이다. 광해군의 입장에서 괜히 저무는 명을 위해 조선인의 목숨까지 바쳐 싸울 필요는 없었다고 판단한 것. 쉽사리 후금에 항복하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고 그 중 상당수가 살아서 조선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박씨등이 남아 지금도 심양에 박씨촌이 있다고 한다. 하여간 강홍립은 중국어, 만주어에 능통하여 포로로 잡혀서도 광해군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국제사정을 서로 나누었다. 후금이 조선을 치려했을 때도 광해군이 물품을 보내 강홍립으로 하여금 후금측에 오해를 풀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실리외교가 당시 기득권층 양반들에 의해서 주군(명나라)을 배신하고 오랑캐를 섬기었다는 핑계, 구실로 왜곡된 것이다. 광해군 일기는 그렇게 오도하였다.
광해군은 내치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적인 정치를 펴서 내치를 안정화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려했다. 서울을 보면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그리고 경희궁, 덕수궁이 있다. 임란 때 많은 부분, 특히 창경궁, 창덕궁은 모두 불타 버렸다. 할 수 없이 왕위계승식도 당시로서는 임시 궁궐인 초라한 덕수궁에서 하였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의 강화를 위해 창경궁과 창덕궁을 복원하려 했다. 이는 왕으로서 전쟁피해 복구차원에 다름아닌 당연한 사업이다. 예컨대 사변으로 인하여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건물들이 파괴되면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복구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중에 기득권층(인조반정세력)은 이를 두고 백성의 민가를 모두 허물고 무리하게 궁궐을 두 채나 지어서 백성의 원한을 샀다고 왜곡하였다. 광해군 일기에서.
대동법...최초의 주창자는 이이(이율곡, 신사임당의 아들, 1536∼1584(48세 사망) 원숭이띠)이다. 대동법은 뭐냐하면 각지의 특산물이나 기타 여러 방법의 세금추징을 하나로 통일하여 대동미(米, 쌀)로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들은 정도껏 낮추어주고 부자들은 조금 더 내게 하는 정책이 대동법인데...시행되지 않고 있다가 광해군이 측위하면서 그 해 바로 경기도에 우선 실시하였다. 그러니 기득권층이 좋아할 리 없다. 원래 세금을 투명하고 공정하게(누진세)하면 기득권층이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하나 둘 기득권층의 앙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것들이었다.
정인홍은 의병장이다. 일찌기 광해군이 분조하여 전국에서 일본군과 싸울 때 정인홍을 알게 되었다. 정인홍은 벼슬로 나가지는 않고 주로 상소의 형식으로 광해군에게 글을 올림으로써 정치에 관여하였다. 조식이란 사람이 왕킹짱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조식 밑에서 배우고 컸다. 정인홍도 조식의 수제자쯤 되었다. 기득권층인 서인에 반해 동인은 쪼개지는데 남인과 북인(나중에 대북, 소북으로 또 나뉨)으로 나눠진다. 북인은 요즘 말하면 열린당이나 민노당처럼 개혁파들이다. 정인홍은 북인에 속한다. 광해군이 정인홍을 대사헌에 봉직케하고 중용하며 대북정권(북인 중 大北)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서인들에게 인조반정의 계기를 삼는 것이었다.
임란 이후 광해군은 대포의 제작에 열을 올린다. 그 중에서도 기마병을 상대할 목적에 적합한 대포를 생산하였는데...만일 광해군이 왜구를 적으로 우선시 했다면 모르겠으나 기마병을 상대한다는 것은 바로 후금을 의식한 것이다. 즉, 명이나 후금이나 우리 조선에게는 잠재적 적국이며 따라서 외교적 줄다리기는 하되, 결국 맞짱 뜰 때를 대비해서 기마병을 상대하는 대포를 많이 제작했다는 소리다. 광해군은 명이든 후금이든 잠재적 적으로 봤던 것이다.
이러저러한 기득권층의 불만, 즉, 광해군이 정실의 아들이 아닌 빈의 아들(서자)출신인데다가, 명(明)을 거스리고 후금과 가까이 지내며, 대동법을 실시하여 부자들의 세금을 무겁게 하고, 더구나 개혁파인 정인홍 등 북인을 중시하였으며 특히 살제폐모 사건으로 자신들의 정치입장이 무너지자 감행하게 된 것이 인조반정이다.
집권한 서인들은 광해군 일기를 통해 광해군을 왜곡, 폭정의 군주로 묘사하고, 자신들의 반역(쿠데타) 정당성을 보이려 했다.
보여지는 역사와 달리 그 진면목을 우리는 잘 못보는 경우가 많다. 광해군도 그러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조선시대를 사화, 당쟁, 중국 사대주의에 찌든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조시대는 부끄럽지도, 사대적이지도 않는 형이상학적 이상을 추구하던 국가였다.
내가 언젠가 말했지만 누구나 왕(대통령)이 되면 잠시잠깐이나마 진정한 애국자가 된다. 나는 조선시대 모든 임금들이 모두 진정한 애국자라 생각한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왕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 엄격한 학문을 수양하며 겨우 세자로 책봉되고 또 수많은 양반들의 견제와 치열한 권력다툼 속에서 임금이 된다. 그러면, 내 나라 조선의 참된 발전과 모든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즉위(취임) 2년 정도만이라도 모든 왕(대통령)은 진실로 진정한 애국자로 산다. 하지만, 그게 오래 가지 못하거나 스스로 자포자기에 빠지는 것은 기득권층의 반개혁적 성향때문이다. 중국 사대주의도 사실 그렇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중국은 완전 최강국이다. 어중간하게 까불다간 조선백성들이 죽어나간다. 임금이 중국의 눈치를 보는 것이 참 부끄럽지만, 실제 조선이 개박살 나면서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것보다는 낫다. 약소국의 비애이지 임금이 사대주의에 쩔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구든지 왕(대통령)이 되면 진실로 나라를 걱정한다. 나라가 잘되길 바라는데, 그럴려면 무언가 개혁을 해야 한다. 개혁은 내가 언젠가 말했지만 무슨 정파, 정당의 편을 들어 반대세력을 무력화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개혁은 말 그대로 시간이 흐른다는 것, 역사가 흐른다는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개혁은 영원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명박이든 노무현이든 광해군이든 누구든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시간이 흐르는 것이 바로 개혁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은 반드시 기존 세력의 양보를 요구한다. 그래서 모든 권력자는 기득권층과 대립할 수 밖에 없다. 이명박도 반드시 기득권과 대립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군과 폭군과 성공한 대통령과 실패한 대통령이 나뉜다. 훌륭한 권력자는 기득권층을 잘 아우르며 그들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여 무리하지 않게 조금씩 그들을 축소시키며 보다 큰 국정을 잘 다스린다. 세종이 그러하고 영조도 그렇다. 하지만, 개혁때문에 기존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고 정쟁에 휘말리면 비록 그가 애국자요, 개혁적, 실리적이며 참된 성군의 적격자라도 결국 이러저러한 시비에 휘말리고 실패한 임금으로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연산군, 광해군, 효종, 대원군 등을 그러하다고 본다.
초라한 광해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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