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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BY 둘리나라 2007-12-21

  제목: 거울


 “엄마, 제발 그만 좀 해!”

 나의 화난 목소리가 화살같이 날아가 배추 시래기를 줍고 있는 엄마의 등에 꽂혔다. 어릴 적부터 봐 왔던 모습이지만 사춘기가 되니 궁색한 차림이며, 장바구니에 쓸 만한 배추 잎을 주워 담는 가난함이 죽기보다 싫었다. 어쩌자고 엄마를 따라 나온 걸까. 가슴 밑에서 후회가 고개를 쳐들었고, 혹시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며 볼이 붉어졌다. 엄마는 이런 나를 신경도 안 쓰는 듯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시래기 더미를 이리저리 뒤집고 있었다.

 바닷가 마을에서 부자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시절이 있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계급이 제법 높았던 걸로 기억된다. 인근 마을까지 아버지는 자랑이셨고, 마을의 보람이었다. 그런 당신이 군복을 벗고 건축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식구들의 놀라움과 마을 사람들의 실망은 먹구름처럼 폭풍우를 예감했던 것만 같다.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안 가 현장에서 사고가 났다. 안전모를 쓰고 있던 아버지의 머리에 철판이 떨어지고 만 것이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피를 말리는 시간들이 지나갔고, 두 발로 걸어 집에 왔을 때는 우리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여섯 명의 자식과 가난이라는 현실뿐이었다.

 엄마는 졸지에 열 명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고 말았다. 동네 창피하다며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사를 왔고,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아가야만 했다. 식구가 많으니 쌀과 반찬 대기도 벅찬 엄마는 무엇이건 아꼈다. 차비를 아낀다고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 시장에 다니고, 자식들 옷은 손수 옷감을 사서 재봉틀에 만들어 입혔다.  새벽이면 시장 가서 배추며 푸성귀를 주워 와 김치를 담고 반찬을 하는 걸 보며 자랐다. 자신에게는 돈 한 푼 쓰지 않는 엄마를 어릴 때는 고생하고 불쌍하다 생각했는데,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이해가 되지 않고 부끄럽고 싫었다.

 어느 날,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엄마를 만난 적이 있었다. 빽빽한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밀리던 엄마가 겨우 손잡이를 잡았는데, 허옇게 튼 손이 내 눈에 들어왔다. 겨울바람에 여기저기 갈라진 골이 패인 손. 피가 맺힌 그 손을 나는 끝내 외면하고 말았다. 엄마는 아셨을까. 막내딸이 고개를 돌려 창밖만 바라보았다는 걸. 나는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절대로!\'

 세월이 흘러 사는 것이 많이 나아지고 생활이 편해졌어도 엄마의 절약은 계속 되었고, 나는 그런 엄마가 싫어 그만 하라며 소리도 지르고 지겹다며 구박(?)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철없고 모자란 짓인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세월의 흐름 앞에 나 역시 성인이 되었고, 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의 울타리를 만들었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선택했기에 우리의 첫출발은 가난한 생활일 수밖에 없었다. 부엌문도 없는 단칸 사글셋방. 황소바람이 몰아치는 보금자리에서 신혼이 시작되었다. 숟가락 두 개와 냄비 한 개, 이불 한 채가 전부인 우리는 살림살이가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마음만은 정말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눈을 뜨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그러나 사는 건 현실이었고, 작은 것 하나라도 아껴야만 했다. 정말 엄마처럼 살기 싫었는데, 지지리 궁상을 떨며 아등바등 살기 싫었는데, 어느새 나는 엄마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건을 하나를 사도 몇 번씩 생각을 하고 구입했고, 필요한 돈 외에는 일단 통장에 다 넣어 버렸다. 찾으러 가기 번거롭고 귀찮아 고스란히 모여졌다. 조금씩 쌓여 가는 노력의 대가가 더욱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절약의 끝에는 악마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큰 악마였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작은 식당을 친구와 동업했는데, 친구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빈털터리로 거리에 나앉은 우리에게는 갈아입을 옷 한 벌이 전부였다. 맨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삶. 당장 몸조차 뉘일 곳이 없었다.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고, 아이를 데리고 3개월의 노숙 생활을 피눈물을 흘리며 이겨 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죽음을 생각했지만, 내 가슴속 밑바탕에는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엄마의 삶이 있었다. 잡초처럼 살아 온 엄마!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낸 당신의 딸인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아픔이 한 계단씩 생길 때마다 가슴에는 강한 마디가 한 개씩 자라났다. 힘들었지만 전화하지 않았다. 반대한 결혼도 불효인데, 실패해서 거지 생활까지 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이겨내었다. 말로 옮길 수 없는 아픔의 시간을 우리는 희망과 용기로 극복했고, 여러 가지 일을 겪은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처음 시작처럼 단칸 사글셋방에 잠이 들었던 날. 나는 꿈을 꾸었다. 엄마가 시장을 돌아다니며 배추를 줍고 있었다. 손이 부르트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힘들어 보였다. 순간, 나는 보았다. 엄마의 얼굴에 행복이 넘치는 걸. 그렇게 힘들게 다니는데도 얼굴에는 전혀 짜증도, 고통도 없었다. 너무나 편안하고 아름다운 표정. 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춘기의 감성이 엄마의 기쁨을 보지 못했던 거였다. 가족들을 위해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을 기꺼이 내놓은 당신.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내가 당신의 반만이라도 살아 갈 수 있다면…….

 새로운 시작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텅 빈 방 안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하러 신규아파트 입주 단지를 발이 아프도록 뒤지고 다녔다. 장롱과 책장과 문갑을 구하고, 그릇도 구했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햇살 아래에서 웃으면 딸아이도 덩달아 웃었다. 아이들 옷은 아파트의 의류 수거함에서 구하거나 한 달에 한 번씩 벼룩시장을 이용했다. 동화책이며 장난감은 재활용품 수거일에 맞춰 동네를 한 바퀴 돌면 제법 많이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쓰이는 곳은 먹을거리와 기름과 방세가 거의 전부였다. 둘째 아이의 출산용품도 정보지에 ‘무료로 주실 분’ 광고를 내어 무료로 얻을 수 있었고, 냉장고는 주인집에서 새로 바꾸고 내다 놓은걸 깨끗이 청소해 지금까지 쓰고 있다.

 몇 년째 계속되어 온 우리 가족의 재활용은 많은 걸 변화시켰다. 아이에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환경교육이 되어, 저녁이면 불필요한 불을 끄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이 맡아서 하고 있다. 쓸 수 있다 싶은 것은 주워와 고치고 기름칠하고 닦아서 필요로 하는 곳에 주기도 하고, 집에서도 쓰니 덕분에 좋은 일도 하게 되었다. 나는 꼭 사야하는 물건들만 메모해서 시장을 보고, 가끔은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새벽시장에 배추 잎을 주우러 장바구니를 들고 간다.

어쩔 수 없는 엄마의 딸인 모양이다. 내 아이들도 엄마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을까.

 어제는 길에 내놓은 책꽂이를 보고 마음이 급해 땀을 흘리며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가을볕이 따갑게 화살을 쏘는데도 분홍 페인트를 사와 정성을 다해 몇 번이나 칠해서 방에 놓았다. 상자에 담겨있던 책을 꺼내 정리하니 어두운 곳에서 살던 책들이 반가운 빛을 맞아서인지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야! 햇빛이 보인다라며. 새것보다 정이 더 가고 예뻤다.

 어렵고 힘들게 시작했고, 실패를 맛보았고,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길 위에 지금 우리 가족은 서 있다. 가난하지만 서로 아껴주기에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신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들의 구멍 난 양말을 꿰매며, “혜빈아, 양말 새로 사야겠다”했더니 “아직 더 신을 수 있어”하며 크게 웃었다. 아끼며 산다는 게 무조건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다는 건 아닐 것이다. 흐르는 돈은 얼지 않는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돈이란 요소요소에 적절하게 가치 있게 쓰고, 절약은 나와 가정이 생활할 수 있을 만큼만 쓰면서 아끼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아끼는 엄마가 집 마당에 커다란 솥을 걸어 음식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먹던 기억이 난다. 나누는 여유로움을 엄마는 알고 계셨나 보다. 나에게는 철저히 정확하고, 남에게는 베푸는 사랑을 하셨던 당신을 이제는 자식을 낳아 키우며 조금씩 알듯하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부모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는 인생의 거울. 엄마의 삶을 불평하고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닮아간다는 걸 느낀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보아온 절약의 삶에 감사드린다.

 내 아이도 나를 보며 자라날 것이다. 훌륭한 거울이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짠순이 엄마라고 싫어하면 어쩌지? 슬쩍 딸아이를 보았더니 몽당연필로 전단지 위에 엄마를 그리고 있다. 크게 ‘사랑하는 엄마’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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