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익조(比翼鳥)
* 비익조(比翼鳥)는 암수가 눈 하나 날개 하나를 갖고 태어나 두 마리가 항상 한 몸이 되어 날았다는 전설의 새다.
( 1 )
선착장은 자욱한 안개 같은 종점이 짙게 깔렸고 정지한 화면처럼 깊은 정적에 잠겨 있다. 검푸른 해송(海松)을 머리에 빽빽이 덮어 인 산굽이가 선착장 앞으로 삐죽이 나와 흘겨다보듯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건너편 방파제는 하마처럼 길게 쭉 뻗어 누워 엎드려 졸고 있다. 매달린 배들이 파도를 타며 서로 몸을 부딪고 삐걱거리며 내는 소리가 성가시게 들린다.
봉수는 어느 배를 빌렸는지 뒤돌아보며 나에게 물었다.
『한 30분 있어야 출발되겠다고 한다.』
봉수는 내 대답이 그리 신통치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빛바랜 잿빛 구름이 누워 있어 쌀쌀한 겨울날씨를 더더욱 을씨년스럽게 한다. 갈매기는 여기저기 부지런히 날고 있고 방파제 끝에는 낚시꾼 한 사람이 조가비처럼 달라붙어 고기를 낚고 있다. 푸르스름한 바다는 하늘 끝자락을 물고 황량한 들판처럼 휘몰아치는 겨울 바람소리에 소름을 치며 몸을 부르르 떤다. 바다는 견디기 힘든 분노를 머금고 있는지 칼날처럼 윙윙거리는 모습이 이제라도 곧 포효할 것만 같다. 그러나 12월 초겨울인데도 얼굴에 와 닿는 바닷바람은 그렇게 차갑지가 않았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갈매기 한 마리가 선착장 위에 엎어지듯 풀썩 머리를 처박으며 내려 앉아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먹는 듯 선착장 바닥을 열심히 쪼고 있다. 날갯죽지는 다 헤어지고 초췌한 모습이 꼭 박제한 새처럼 활기가 없다. 하는 짓이 여느 갈매기 같지가 않고 불안하게 보였다. 선착장 바닥을 쪼다가 우리를 의식했는지 갑자기 제풀에 화들짝 놀라 푸드덕거리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우리들도 갈매기를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갈매기는 까마득히 날아올라 해송이 덮인 산언덕을 넘어 어디론가 가버렸다. 하늘은 잿빛 구름이 비스듬히 비켜서면서, 싸늘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2)
연주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3학년 때 학교 생물관 앞에서였다. 보통의 키에 청색바지와 목까지 올라온 연두색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초롱초롱한 큰 눈망울을 가진 연주의 모습은 참으로 경쾌하고 영리한 아가씨로 보였다. 봉수가 연주를 소개해 나는 연주와 인사를 나누었다. 연주를 보며 나는 봉수가 참 행복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봉수가 연인으로서 기울어진다는 의미보다 연주가 워낙 빼어난 미모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그 뒤 어떻게 만나며 사랑을 나누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둘이 아주 정다운 관계가 되었다는 것은 소문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부럽기만 했다.
봉수는 대학 졸업하던 그해 가을에 연주와 결혼을 했다. 봉수는 첫 직업을 학교 교사에서부터 시작했다. 일년을 교편생활 했나? 갑자기 이것을 마다하고 울산에 있는 S기업에 입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이 회사도 오래 근무를 하지 않았다. 두 달을 채우지도 못하고 어느 날 느닷없이 그만 두고 다시 고향 부산으로 내려와 D회사에 취업을 했다. 봉수는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도 정서적으로 뭔가 많이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 그런 다양한 직장 편력을 가졌는가는, 그의 뭔가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스스로 그런 불안한 직장생활을 하게 했던 것으로 보였다.
봉수가 만일 D회사에서라도 그냥 조용히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며 살았더라면 그런대로 평탄한 인생은 살았을 것이다. 결국 D회사도 7년을 겨우 채우고 자기 사업을 한다고 사표를 냈다. 사람들이 그를 볼 때는 말하자면 헛된 탐욕으로 더 큰 불행을 자초하는 것처럼 보였다.
봉수는 철이 들 때부터 큰 부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남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던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편안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사업 자금은 그동안 직장생활 하며 푼푼이 모은 돈 삼백만원이 전부였다.
봉수는 엔지니어였기에 조그만 기계공장을 차렸다. 공장설비는 작은 선반 1대, 용접기 하나, 그리고 자질구레한 공구들이 전부였다. 창업은 쉬웠어도 정녕 수성은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르고 있었다. 시작은 그 어렵다는 공장 설림과는 거리가 먼 공장이니 참으로 쉬웠다.
시작 초부터 공장은 삐거덕거렸다. 막상 공장이라고 간판을 걸고 일을 찾으니 우선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가 과제였다. 봉수는 그래도 끈질긴 투지는 있었다. 숱한 문제점들을 봉수는 자신의 특이한 재치와 능력으로 해결해 나갔다. 처음은 유압공구의 수리와 단순 기계 가공품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조선회사를 찾아가 의장품을 만들어 주는 일로 사업의 규모가 커져 갔다.
사업이란 것을 시작하고 만 3년째가 되자 그래도 애쓴 보람이 있어 운영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망망대해에 가랑잎 같은 조그만 사업체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험한 파도를 어찌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나. 이제 허리 좀 펴는 듯 보였는데 예상 못한 IMF라는 불경기가 들이닥치자 일거리가 줄어들며 운영경비의 부족과 노임 체불로 봉수는 그만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추락하지 않으려고 몇 달을 메우고 메우며 일거리를 찾아 헤맸지만 도무지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식이었다. 봉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숱한 문제점들이, 하나 해결하면 또 하나 불거지고 아무리 풀어도 언제나 그 자리라 결국 봉수는 스스로 지겨워서 사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반듯하게 기반 한번 잡아보지도 못하고 사업체를 파산시킨 봉수로서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사업체가 파산하자 사업의 고충보다 더 심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할 때는 어쩌다 한번씩 목돈 들어오는 기회가 있었기에 생활이 어려워도 메워가며 버틸 수 있었지만 파산하고부터는 돈을 융통할 곳이 없었으니 생활은 어릴 때 보릿고개 넘기던 시절보다 더 어려웠다.
봉수는 원래 한미한 집안이었기에 빌 붙일 친척도 없었다. 그래도 좀 여유가 있었던 처가에 보릿고개라도 좀 넘기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결혼할 때부터 이미 눈 밖에 난 딸인데다 또 연주 역시 자기 아버지한테 고개 숙여 구걸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기 때문에 처가로부터는 쌀 한 톨도 얻어오지를 못했다. 연주 아버지는 인색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라, 출가한 딸이 어렵다고 도와줄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사업하던 해였다. 연주 아버지가 픽업을 갖고 있었는데 사업에 보탬이 된다면 봉수에게 주겠다고 귀띔하고는 3개월을 뜸들이다 결국 그 차를 팔아 자신의 새 차를 사는데 보탤 정도로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처가가 이런 형편이었으니 봉수는 나무그늘 하나 없는 망망한 먼 산길을 혼자서 걸어가야만 했다.
밑바닥 생활은 정말 배운 게 더 거추장스러웠다. 배운게 없으면 막노동이라도 할 수 있겠는데 그럴 상황도 만들 수 없었다. 결국 봉수는 지금까지 시간과 돈과 열정을 쏟았던 곳에서 살 방도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봉수는 그 동안 거래했던 업체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소위 공사 뚜쟁이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때는 장래가 밝게 보였던 사람이었는데, 사업 파산하고 먹고 살려고 쫓아다니는 봉수의 모습이 자신들의 일처럼 안쓰러웠던지, 그들은 일이 성사되면 선심 베풀 듯 몇 푼씩 건네주어, 이 돈으로 봉수는 어느 정도 가족의 생계는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생활이 2년 동안을 계속했다. 뚜쟁이 노릇으로 집안 생활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에 봉수는 언제나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래서 애들 공부라도 편안히 시키고자 취직이라도 해야겠다고 여기저기 부탁도 해보았지만, 아무도 그 부탁을 귀담아 들어주지를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직원 하나 없어도 밖에 나가면 사장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 없는 사장이 사업을 하려 하니 얼굴은 철판을 깔아야 했고 가슴은 다 썩어야 했다. 이런 세월을 보내면서도 봉수는 언젠가 쨍하고 해뜰 날이 있을 거라는 희망에 하루하루를 속으며 살아갔다. 그러나 슬프게도 세월은 봉수의 사업을 기반 잡는 것보다 더디게 가지를 않았다.
( 3 )
그 동안 연주는 결혼한 그 다음 해에 아들을 낳았고 그리고 그 2년 후에 딸을 낳았다. 봉수가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연주는 애들을 키우느라 생활이 좀 어려웠어도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봉수가 사업 실패하고 살던 집을 내 주고 변두리 셋방으로 옮기면서 연주는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연주는 생활이 어려웠어도 봉수를 위해 무슨 일이든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를 못했다. 연주는 언제나 자기 위주였다. 연주는 그 동안 보이지 않던 눈앞의 갑갑한 가난이 현실로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갈등이 일어났다. 연주는 봉수와 결혼한 가장 큰 이유가 젊은 날, 흔히 가지는 풋풋한 봉수의 야망에 매료되어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억척스런 인색으로 억압되었던 물질적 갈증의 해소를 봉수로부터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속으며 사는 인생이라 한다 하지만 기다려도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고 생활은 언제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늘 그 자리에 있었으니 연주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주는 더 이상 봉수한테 기대를 걸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연주는 봉수의 재기의 기대보다 지나간 세월의 초라함에 대한 원망과 또 기다려야 할 기약 없는 세월에 대한 초조가 자신을 더 안타깝게 했다. 거울에 비친 주름살 하나 둘을 볼 때마다 허망한 마음이 들었다. 부푼 기대와 희망은 사라졌고 텅 빈 공허와 까마득한 좌절만 남게 되었다. 이 공허와 좌절은 새삼 연주에게 정신적 방황을 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는 우연히 중학교에 다니는 딸의 학교 학부형 모임의 회장이 되면서 자신의 공허를 잊는 계기를 찾으려했다. 그러나 이 활동도 일년을 했지만 연주의 갑갑한 마음을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부형 중에 에어로빅 학원에 나가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의 권유로 에어로빅학원엘 나가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면서 연주는 그 공허와 좌절이 그래도 조금은 잊혀지는 듯 했다. 더구나 운동 후 여자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더없이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모자란 남정네들이 옮긴 실없는 얘기를 들으며 재미있어도 했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저 깊은 곳에 숨은 허무한 날개를 펼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가 예측했으랴, 3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연주의 이 나들이는 연주를 새로운 세계로 인생을 가늠하게 하는 계기가 될 줄이야.
인간사 번뇌 망상은 남과의 비교에 의해 기인되는 것이었다. 많은 여자들과 어울리면서 연주는 그들의 사는 얘기를 듣고 자신의 그 동안 살아온 인생과 또 지금의 생활에서 내일을 생각해보고는,「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내가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나, 지금의 이 현실은 나한테는 너무 억울하다, 나는 이 현실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큰 돈은 아니라도 제대로도 벌지 못하는 봉수의 무능력이 연주에게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연주는 이런 원망의 마음에 젖으며 처음에는 봉수의 눈치까지 보며 주저했던 밖앗 출입을 어느 날부터 갑자기 당당하게 시위하듯 나가기 시작했다. 연주는 답답한 생활을 잊는다는 명목으로 무심한 여자들과 화투짝도 만지기도 하고 혹은 그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이것저것 주접스런 행동과 술로, 가정을 황량한 들판으로 만들어 갔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지나침이 너무 심하다 싶어 봉수는 화도 내고 타이르기도 해보았지만 한번 착시(錯視)에 빠진 연주는 마약에 취한 환자처럼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다. 연주의 빈번한 외출 그리고 늦은 귀가는 잦은 부부싸움을 하게 했다.
이런 불안한 생활은 2년 넘게 계속되었다. 봉수는 화가 났지만 모른 척하고 고개를 돌리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연주의 저 방황도 문제는 돈 때문이었기에, 미안한 마음에 어떤 때는 모른 척 방관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사건은 더 접입가경으로 흘렀다. 이럴 즈음 연주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유산을 연주는 형제들과 나누어 갖게 되었다. 그 유산으로 받은 돈에 대해서는 연주는 단 한마디도 봉수와 상의를 하지 않았다.
연주는 우선 그 돈으로 좀 넓은 아파트로 세를 얻어 옮겼다. 원래 연주는 독선적 기질이 강했다. 평소에도 집안 일에 대해 한번도 봉수와 의논한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봉수는 공사 뚜쟁이 노릇도 한계에 차 더 이상 미래가 없어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지도자격증 공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봉수는 연주가 지금 돈을 갖고 있을 때 자격증이라도 따 두어야, 장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봉수가 생활비조차 벌지 않으니 연주와의 다툼은 더 심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는 손에 쥔 돈이 있었기에 봉수와 다투면서 오히려 헤어져 자유롭게 사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몇 년을 지켜봐도 기껏 네 식구 생활비 버는 것도 허겁지겁했는데 어느 세월에 좋은 날 만들어 줄 지 기대의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이런 단조로운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 보살펴 줄 것을 생각하니 되레 귀찮게 여겨졌다. 혼자 살면서 하고 싶은 행동 마음대로 하며, 이제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고 싶었다. 자식들이야 시집 장가가면 자기들끼리 살 것이고, 여자는 나이 들어 혼자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던 말도 귀에 솔깃했다. 더 살아봐야 짐만 될 것 같았다. 그러니 헤어져도 나이 하나 적을 때 헤어져야 똑똑한 자기가 경제적 자립을 해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즐겁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는 일은 쉽게 되어 있었다. 오래 전 사업 실패할 당시 연주 앞으로 명의가 되어 있었던 조그만 사업체가 하나 있었다. 사업 실패할 그 당시 이 사업체라도 연쇄 파산에서 피하게 하고자 이 회사를 연주 이름으로 해 두고 봉수는 서류상 연주와 이혼을 해두었던 적이 있었다. 그 후 그 사업체 역시 아무 것도 건지지를 못하고 파산했지만 이혼 건은 잊고 있었는데, 그때의 이혼이 법적으로는 유효했기에 답답할 때 연주는 이것을 되새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봉수의 하는 일이 밝지가 못하자 헤어질 것을 결심하고부터는 자식들이 학업을 마친 후나 아니면 적절한 기회가 오면 갈라서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봉수는 연주에게 호적 정리라도 해두자고 얘기했지만 이미 당찬 계획을 결심하고 난 뒤였기에 이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배신을 실행하고자 마음을 굳힌 후부터는 부부가 아무리 전생에 원수지간이라 한다 하지만 세상에 또 이런 원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집안은 언제나 냉랭한 찬 바람만 불었다. 일이 있어 일을 하면 그 달은 그런 대로 밥이라도 먹고 애들 공부라도 시킬 수 있었지만 일이 없어 생활비라도 벌지 못할 때는 연주보다 봉수가 더 답답한 데도 이를 이해해주지를 않았다. 일이 없어 실의에 빠져 있어도 봉수에게 용기를 주어서 재기시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이미 연주의 마음속에서는 떠나고 없었다.
연주는 자신과 더불어 주위 환경도 늙어간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언제나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라고만 알았다. 늙어 편안해졌을 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를 않았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가난만 면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연주는 생활비 떨어지면 빚쟁이 돈 독촉하듯이 사사건건 시비하며 지겨울 정도로 봉수에게 불만을 토했다. 연주의 닦달만큼 봉수가 하는 일도 언제나 허덕이며 신통찮았다.
다행히 준비했던 지도자격증은 갖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일거리를 만들기에는 노력이 더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절박한 봉수의 사업 부진은 연주의 배신을 앞당겨주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하는 일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봉수는 끈질기게 버티었지만 어쩌면 그렇게도 하는 일이 잘 되지가 않는지 일이 수월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연주에게는 가졌던 꿈이 이루어지지가 않아 불만이었겠지만 봉수로서는 최선을 다하며 살았는데도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세상을 원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참으로 힘들게 살았다. 가파른 언덕을 봉수는 달구지에 한 짐 가득 가족을 태우고 물 흐르듯 땀을 흘리며 죽어라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애들은 공부한다고 밀어주지 못하고 연주는 달구지 위에서 엉덩이 흔들며 에어로빅 한다고 밀어주지를 못했다. 그러면서 요만한 언덕도 못 오르느냐고 비웃기만 했다. 생각이 부부가 동상이몽이라 제발 마음으로라도 같이 애를 써줄 수 없느냐고 봉수가 어쩌다 한 마디 얘기라도 하면,
『밥하고 빨래해주고 할 일 다 하고 놀러나가는데 무슨 잔말이고 (이 아파트는 유산 받은 돈으로 마련한 집이니) 살기 싫으면 니가 나가라.』라고 당당하게 말을 했다. 연주가 뭐라고 말을 해도 봉수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속으로,「내가 풍족하게는 못했다지만 햇수로 20년 넘게 가족을 부양해왔는데 어쩜 저렇게도 비열하고 뻔뻔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연주를 측은하게 보고 말문을 닫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덕에) 이런 집에 살도록 해주었으면 고맙게 생각할 것이지 겨우 생활비 몇 푼 벌어다준다고 유세떨지 마라.』고 공공연히 봉수를 몰아세웠다.
이럴 땐 봉수도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한테 이런 말까지 듣고 살아야 하나 싶어 헤어질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연주와 함께 살아온 정을 끊을 수 없어서였고, 무엇보다 가정 하나 지키지 못한다는 팔불출로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을 가 봐 이것이 두려워서 봉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면 마음을 추스르고자 한 이틀 집을 비우는 일이 고작이었다. 이런 상태에서라도 봉수가 하는 일이 원만히 잘 풀려나갔으면 또 어찌 되었을는지 모르겠는데 새로 시작한 일마저 몇 달이 지나도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참으로 봉수도 돈키호테 같은 놈이었다. 도대체가 돈 한 푼 없이 무슨 사업을 한다고 쫓아다니는지 쳐다보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주는 이런 봉수의 일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업의 부진만을 빈정대며 이제는 생활비조차 벌지 못한다고 노골적으로 닦달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더운 뙤약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이사람 저사람 사람들을 만나며 일거리 구걸하는 것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지친 몸으로 집이라고 들어오면 매일 한다는 소리가, ‘어느 놈을 사기를 치든지 아니면 도둑질을 해서라도 처자식은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닌가, 사내가 능력이 고작 그것밖에 안되어서 도대체 어디다 써먹느냐’며 빈정거릴 때는 봉수는 연주의 영악한 사고방식에 완전히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봉수와 연주의 말다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 번은 둘이서 크게 다투고 연주는 처제 집에서 한 달여를 있다가 온 적이 있었다. 돌아와서 며칠을 외출도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연주는 큰애가 방학이 끝나 서울로 공부하러 가고 나자 해저녁에 돌아온 봉수에게 연주는 의논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했다. 이때도 봉수는 돈을 벌려고 더운 여름날 점심도 거르며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서글프게도 일거리 하나 건지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왔을 때였다.
『이제 생활비도 바닥이 났고 가진 돈도 없으니 다른 대안이 없으면 (등신 같은 너 믿고 살 수 없으니) 이 아파트 내놓고 내가 장사를 해야겠다. 영임이 하고 은주 집에서 기거할 테니 니는 자취를 하든지 하숙을 하든지 해라.』
연주의 이 통고는 이혼에 대한 호적 정리를 반대했을 때부터 조금은 예상했지만 정작 연주에게 이 말을 듣자 봉수는 어려움을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이 괘심도 했고 또 큰 배신감도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는 일이 어렵다 하지만 생활을 줄여 함께 애쓰는 것이 서로 힘도 적게 들고 또 부부가 함께 고생하며 사는 것이 부부의 도리인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봉수는 정색을 하며 연주의 의견에 반대를 했다. 그리고 잘 사는 것도 바라는 일이겠지만 인생 얼마를 산다고, 가족이 헤어져서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변명의 말도 했다.
그러나 연주는 이미 생각을 끝내고 난 뒤였기 때문에 봉수의 이 이야기는 전혀 귀담아 듣지를 않았다. 연주의 태도는 단호했다. 연주의 강한 주장에 봉수는 당당한 설득도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다. 봉수한테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지만 연주에게는 확고한 계획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결론은 뻔했다.
결국 봉수는 입을 다물고 어쩔 수 없이 연주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봉수는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모든 것을 좋은 방향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연주가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어서 모진 마음으로 사업을 크게 일으키도록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봉수는 좋게 생각했다. 거기에다 그 동안 애들 등록금이다 생활비다 날마다 쫓기던 생활에서 연주의 생활 보장이 은근히 봉수한테 자유를 주는 면도 있겠다는 기대의 마음도 있어서였다. 속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소꿉장난 같은 두 사람의 결정에 기가 찼겠지만 봉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봉수는 자기 몫의 짐을 챙겼다. 짐을 챙기면서 왜 봉수는 자기 짐을 분리해서 챙겨야 하는가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계절 따라 자신이 가지고 다녀야 하는 짐으로만 생각했다. 입던 옷가지와 밥벌이 도구로 삼았던 책과 심지어 자기 앨범까지 어깨에 그리고 머리에, 이고 지고 한 사람 잠자리 정도밖에 안되는 좁은 모퉁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했다. 연주는 봉수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한 달 하숙비는 손에 쥐어주었다. 헤어질 때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런 생각도 들었고 연주의 배신이 어렴풋이 머리에 떠올라 괴롭기도 했지만 이미 상황은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봉수는 부정적인 생각은 않기로 마음먹고 모든 것을 체념했다.
봉수는 꿈을 꾸듯 집을 먼저 나왔다. 대학엘 다니는 딸이 웃으며 봉수한테 손짓을 했다. 봉수는 딸을 쳐다보며 무엇 때문에 웃으며 손짓하는지 그 이유가 언뜻 생각나지가 않았다. 그 동안 재미없게 살았는데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니 기쁘다는 뜻인지 혹은 이후에 다시 만나는 기회 있으면 즐거운 시간을 갖자는 웃음인지 정말 그 까닭이 짐작되지가 않았다. 딸은 슬프지가 않았다. 딸은 이 이별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몰랐다.
(4)
갑작스런 환경 변화는 정말 봉수한테는 큰 충격이었다. 사는 것이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봉수는 자신이 지금 왜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살아야 하고 그리고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그 대답이 명쾌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봉수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비참함은 참을 수 있었는데 철석같이 믿었던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남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헤어지고 일주일이 되어서 봉수는 연주가 옮긴 처제 집에를 들렀다. 봉수는 5시간을 기다리다 외출하고 밤 12시가 되어서야 들어오는 연주를 만났다. 연주는 봉수를 보자마자 대뜸 싸늘한 냉소와 함께 내뱉는 말은 봉수의 가슴을 시퍼런 칼날로 도려내는 말이었다.
『왜 왔는데?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는데. 너하고 나하고는(이미 옛날에 이혼이 된 상태고 이제 별거까지 했으니) 남남이 아니가? 나는 너 꼴도 보기 싫다. 절대로 너하고는 같이 안 산다.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 더 이상 이 집에는 오지 마라.』
이런 걸 보면 봉수는 참으로 한심스런 사람이었다. 그 언젠가 연주의 밖앗 출입과 생활 태도에 대해 봉수는 자기 여동생에게 의논을 한 적이 있었다. 여동생은 봉수의 얘기를 듣자마자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마디로 정신 차리고 단념하라고 했다. 그래도 봉수는 그 당시 자기 여동생이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자기 처지의 입장에서만 사건을 풀이해서 판단한다고 생각하고는, 오히려 봉수는 연주를 변명해주자 기가 찬 듯 단호하게 한 말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아이고, 오빠 ! 와그리 맹하요. 고마 단념하고 헤어지세요.』
봉수는 자신이 참으로 맹하다고 생각하며 우선 뭔가 얘기를 해야겠는데 갑자기 말문이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술은 탔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별거를 한다했지만 봉수는 연주와 완전히 헤어진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또 사람에게는 출가를 하지 않은 다음에야 가정이라는 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는다 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온갖 고생을 다하며 지켜온 이 가정을 산산 조각 낼 수 없다고 생각이 들자 봉수는 얼떨결에 부처님께 합장하듯 두 손을 모으고 애원을 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잘 몰라도 내한테는 니가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기라. 그라고 우리 가정을 깨는 일만은 결코 하지 말자.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다오. 돈 때문이라면 곧 나도 돈을 벌 거 앙이가. 우리 인생도 중요하지만 구만리 같은 자식들 인생도 생각해야 안하나. 이렇게 되면 누가 이런 집안의 딸을 데려가며 어느 누가 이런 집에 딸을 시집보내겠나.』
연주에게는 봉수의 이 말을 단순한 변명으로만 들었다. 가난의 모든 책임을 봉수에게 돌리고 고생했던 지난날에 대한 보복의 심리만이 마음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는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연주는 이미 잦은 밖앗 출입에서 마음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 애원은 오히려 경멸을 가져왔다. 연주는 강 건너편에서 싸늘한 냉소를 지으며 봉수의 고지식한 생각을 어이없는 듯 비웃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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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는 학교 다닐 때부터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언제 어느 곳에 가도 빼어난 미색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결혼하고 몇 해 동안은 애들 뒷바라지와 그리고 그나마 때 묻지 않은 어수룩한 면이 있어 자신의 미색을 감추었지만 가슴 가득 불만을 안고 밖앗 출입을 하고부터는 자신이 한 가정의 어머니요 아내라는 생각보다 허영에 들뜬 한 여자만 있었다. 처음 밖앗 출입을 할 때는 얼굴의 화장이라든지 옷이라든지 가꾸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나가는 빈도가 잦아지자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부관계도 누구는 가까이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이라 한다 했지만 연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의도적으로 피해왔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 부부관계도 여자가 피한다고 얘기하기도 했지만 애들 방으로까지 피해 다니며 아주 노골적으로 기피할 때는 봉수는 연주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수는 사람들에게 부부 간의 기피 현상에 대해 남의 일처럼 물어봐도 이미 마음을 옮긴 후인 것 같다고 얘기하며 뭔가 있을 거라는 충고까지 할 때는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언제나 봉수는 반신반의 했다. 설마 연주가? 그럴 리가 없다. 무엇이 답답해서? 아니야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은 오락가락 정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부부문제는 당사자끼리 해결해야지 남한테 물어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던데 봉수는 자신이 너무 경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무 이득도 없는 일이라면 일단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는 몇 번 말다툼을 끝으로 더 이상 따지지를 않았다.
그런데 연주의 이번 행동은 그 동안 떠돌았던 설(說)들이 사실이었겠다고 믿게 해 계획된 배신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고 싸움에서 패배자가 된 것 같아 봉수는 분노가 가슴 가득히 끓어올랐다. 돈 한 푼 벌려고 더운 뙤약볕엘 헐떡거리며 돌아다녔을 때 연주는 립스틱 짙게 바르고 어디로 그렇게 돌아다녔을까? 피가 역류하는 듯 봉수는 앞이 갑자기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증오는 이기적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 사랑이 식은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아마 이럴 때,「아, 그래! 그것 잘 되었구나 그래 좋은 놈 있거들랑 그 놈 하고 잘 해봐라」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사랑을 곧 소유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너를 좋아 하면 너도 나를 좋아 해야 한다는 억지 같은 이기적 사랑이 있었다. 여자는 지겨울 정도로 그 동안 살며 너무 한심해 싫어졌겠지만 내가 아직 너를 좋아 하는데 무슨 소릴 하고 있어? 날 버리고 가다니 너는 배신자야! 배신자는 용서할 수 없어. 이런 상태에서 봉수는 왜 연주가 저렇게 결심했을 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이해하려는 생각도 일어나지가 않았다. 봉수는 연주가 자신을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오로지 자기를 버리고 간다는 생각만을 했다. 극단적인 생각도 났다. 아냐 이렇게 되면 내 인생도 끝나지 않는가. 참아야 한다. 참아서 저 여자의 마음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그것만이 최선의 길이다. 그 동안 내 눈 속여 못된 짓 했다면 내가 현장을 목격한 것도 아닌데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나한테 다시 돌아만 와준다면 모든 걸 용서해주자.
몇 날을 봉수는 연주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그런데 연주는 마음을 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마음을 돌릴 조건이 봉수한테는 아무 것도 없어서였다. 봉수는 가진 것도 없었고 그리고 연주 말마따나 가질 능력도 그 당시는 전혀 없었다. 연주의 저 행동은 어쩌면 현명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이기심을 채울 수도 없었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연주에게 봉수는 할 말이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생사고락을 같이 하자 했던 부부의 도리가 어떻고 사람 사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책속의 얘기는 입 안을 맴돌 뿐 변명으로만 생각되었다. 갑자기 봉수는 허망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자신의 이기심이겠지만 연주에게 매달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 못해주는 연주의 저 이기심이 봉수는 저주스럽기만 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인간사를 봉수는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당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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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의미가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수는 절에를 갔다. 크게 신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뭔가 위안을 받고자 봉수는 절에를 갔다. 엎드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봉수는 절을 하며 흐트러진 이 실타래를 좀 풀어달라고 기도를 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꿈입니까?
그래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자. 살아온 인연을 끊기는 어렵겠지만 모든 것을 깨끗이 잊기로 하자.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한동안 봉수는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젖은 정을 술로서 쉽게 잊혀지지가 않았다. 배신에 대한 분노는 봉수에게 가슴을 쥐어뜯듯이 심한 고통을 주었다. 책을 읽으며 혹은 산을 오르며 방황과 갈등의 날들은 오래 계속되었다.
정녕 마음 다스림은 세월이 약이었다. 가슴 아파하던 것도 보채다가 지쳐서 잊어버리는 아이들처럼 봉수는 조금씩 냉정을 찾기 시작했다. 자식들은 연주와 생활했기에 봉수에 대한 걱정은 막연하게 생각할 뿐 무관심했다. 있는 정 없는 정 다 쏟아가며 애지중지 길렀지만 돈 없는 아버지였기에 그 아버지가 어떻게 살던 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우선 당장 공부하고 사는데 불편하지 않았기에 봉수가 연주를 찾아갔을 때도 자식들은 오히려 이상하게 보았다. 무슨 일을 하던 생활비 정도는 벌며 아버지 혼자서 살 수 있는데 봉수가 연주한테 빌붙어 살려는 것처럼 보였던지 딸은 봉수에게 혼자서 살아 라고 했다. 봉수가 어떻게 살며 또 살아야 하는지를 자식들은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는데 구태여 봉수 때문에 불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참으로 서글픈 세상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살았나를 생각도 해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서 지금의 이 처지를 만들었을까? 인격이 부족해서 인가? 아니면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 인가? 아니면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인가?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가족 모두가 오직 돈 때문에 봉수를 버렸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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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인생살이 계곡, 계곡을 굽이치고 부서지며 봉수는 삶의 큰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봉수는 모든 것을 잊고 오직 한 생각만은 가슴 깊이 간직한 채 묵묵히 생활에 젖고 있었다.
가족과 헤어진 후 여름을 두 번 보내고 어느 비 오는 가을날이었다. 봉수 아들이 군 입대 첫 휴가를 받아 봉수가 살고 있는 집엘 찾아왔다. 봉수는 연주와 헤어지고 바로 일거리를 얻어 번 돈으로 조그만 사글셋방에 살고 있었다. 사람에게는 한 평생 살며 어떻게 살아라는 운명적 삶이 있는 모양이었다. 봉수는 그래도 구걸하며 살아라는 팔자는 아니었다.
집이라 하지만, 원래 자식은 집에 들어오면 그 어머니를 먼저 찾고 남편은 그 아내를 먼저 찾는데, 아무도 없는 썰렁한 집이 정이 들지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봉수 아들은 며칠을 아무 소리 않고 지냈다.
그 날은 봉수가 일찍 집에 들어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초저녁인데 봉수 아들이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대뜸 한다는 말이,
『아버지, 아버지는 왜 혼자서 사십니까.』라며 물어왔다.
『왜 혼자 사느냐고?』
봉수는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저 놈이 지 에미를 만나고 와서 저러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봉수 아들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다.
봉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창가로 가서 길게 한 모금 빨아 가슴 속 타고 타서 응어리진 시커먼 고뇌를 쏟뜨리듯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 연기가 창유리를 녹이며 밖앗을 희미한 꿈처럼 보이게 했다. 저 놈이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던가? 콧수염 달린 벨기에 외국인을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 본 외국인이 겁이 났던지 쏜살같이 부엌으로 도망가서 울고 있는 것이 어찌나 못나 보였던지, 머리를 쥐어박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딸년이 어릴 때 재롱 피우는 것이 귀여워 좋아하자 저놈이 시샘이 나서 훼방하던 일도 생각났다. 가족이 바닷가에서 생전 처음 고기 잡았다고 사진 찍어주던 일이며 어린이 대공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 하던 일들이 필름 돌아가듯 주르르 흐르며 생각이 났다. 봉수는 애들을 정말 사랑했다. 자식이 저러는 것도 그 동안 아버지란 존재를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 존재가 느껴져 자식 눈에 자신이 초라하게 보인 모양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연주에게 또 다른 사연이 있어서 저러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새삼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고 또 연주에게 다른 사연이 생겼다 해도 봉수는 뭐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였다. 봉수가 연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아무 것도 없었다. 봉수는 자기 아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봉수는 연거푸 애꿎은 담배만 피웠다. 봉수 아들은 그 이튿날 부대로 돌아간다며 짐을 챙기고 가버렸다. 언제 또 온다는 말도 없었고 봉수 역시 묻지도 않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이 집엘 또 오라고 봉수는 말할 명분도 없었다. 봉수는 연주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연주는 아직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가족 모두에게 이런 쓸쓸한 생활을 안기고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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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는 연주와 헤어지고 3년째 되던 어느 날 딸의 결혼 문제로 전화가 와 연주를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다. 연주는 예나 다름없는 짙은 화장을 하고 나왔지만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고 있는 입성으로 보아서는 사는 것은 괜찮은 것처럼 보였으나 세월의 주름이 깔린 초췌한 모습은 오히려 측은하게 보였다. 무능했던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묻지는 않았다. 연주 역시 딸의 결혼 문제만 얘기했다. 결혼식 참석 여부 타진이었다. 봉수는 망설여졌다. 두 번 다시 비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 하고 헤어졌다. 봉수는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고 싶지가 않았다. 딸년이 헤어질 때 너무 섭섭하게 했다는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갈 수가 없었다. 아니 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결국 봉수는 딸의 결혼식엘 가지를 않았다.
( 10 )
세월은 가지 말라고 해도 잘도 흘러갔다. 봉수는 오직 먹고 사는 데에 급급하며 앞뒤를 잴 틈도 없이 살았다. 딸의 결혼 문제로 연주를 만나고 그 해 겨울이었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이라고 했다.
『아버지, 엄마가 만나고 싶어 하는데 예.』
전혀 남남이 되었는데도 연주는 언제나 봉수의 마음속에 있었다. 병원이라는 말에 봉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래, 무슨 병원이고?』
가르쳐준 병원을 찾아가며 온갖 생각들이 오고 갔다.
입원실을 들어섰을 때 연주는 잠들어 있는 듯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입에는 재갈을 물리듯 산소마스크를 덮어쓰고 있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숨소리조차 죽었는지 꼼짝을 하지 않고 있었다. 딸은 연주 옆에서 울고 있다가 들어오는 봉수를 쳐다보았다. 두 눈은 얼마를 울었는지 퉁퉁 부어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홀로 울고 있는 딸의 모습은 연주를 더더욱 외롭게 했다. 연주는 봉수를 버리고 떠날 때 저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어찌해서 저런 외로운 모습을 자기에게 보여주고 있는지 한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봉수는 연주가 자기를 떠나며 보여주었던 차가운 겨울하늘처럼 그 싸늘했던 모습이 언뜻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찌된 일이고?』
딸은 훌쩍거리며 그 동안의 얘기를 했다.
연주는 봉수와 매몰차게 헤어지고 막상 살아갈 방책을 찾아보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궁리 끝에 결국 자기가 갖고 있는 음식 솜씨에 그 동안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보아왔던 음식 중에 하나를 골라 새로 조성한 아파트단지의 상가를 빌려 식당을 했다. 사람도 고용하고 주문 배달도 하며 시작할 때는 뭔가 돈도 펑펑 벌 것 같아 고된 것도 잊고 장사를 재미있게 했다. 여태까지 봉수한테 매달려 살아온 자신이 바보스럽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개업했던 달로부터 매달 달을 넘기면서 매상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꾸 줄어만 갔다. 반년이 못 되자 세 식구 먹고 사는 것도 힘들 정도로 장사가 안 되었다. 매 달 적자는 불어갔고 애들 학비 마련은 요원했다.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급해지자 체면 불구하고 술을 팔기 시작했다. 술을 갖다 두고 주막집 주모가 되고부터는 가게가 좀 되는 듯했다. 연주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봉수와 헤어질 때 생각했던 계획들은 헛되이 사라져버렸고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생활을 하며 오로지 그 누구에게도 구속 받지 않고 산다는 자유만을 만족해하며 살 뿐이었다.
누군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할 때는 몰래 하는 재미라도 있었지만 구속 받지 않는 자유라도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할 때는 그 자유도 시간이 갈수록 싫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 때문에 손님들이 건네주는 술잔 속에서 날이면 날마다 술에 취해 살 수밖에 없었다.
연주는 아침 일찍 얼굴을 화장하고, 시장 봐서 가게에 나와 음식을 장만하면, 점심 손님에서부터 저녁 술손님까지 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이 끝이 났기 때문에 그래서 언제나 집에 들어오면 곧장 세수하고 잠자기도 바빴다. 이런 생활은 자신도 모르게 피로로 몸은 시들어갔고 몸을 추슬러야 할 중년의 나이에 오히려 혹사시켰으니 몸이 배겨낼 수가 없었다. 이런 생활이 해를 넘기자 과로가 겹쳐지며 대수롭지 않던 병이 중병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었다. 아프다는 것을 알고 쉬고 싶었지만 자신이 넘어지면 붙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아파도 아픈 몸을 끌고 일하러 나갈 수밖에 없었다. 봉수는 딸의 얘기를 들으며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니 못난 자신을 돌아보게 해 오히려 봉수는 마음이 아팠다.
그때 입원실 문이 열리며 연주네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영임아, 어찌된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