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첩장을 받고
박 정 애
마음은 오십년 전 고향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는 섶다리 아래로 맑은 물이 흘렀고 코 흘리게 아이들은 책보자기를 허리에 둘러메고 매서운 바람을 가르면서 섶다리 를 건너 학교에 간다. 후문으로 들어가는 언덕엔 꿀밤나무가 유난히도 많았다. 교정 뒤뜰에는 하굣길 아이들이 보물을 찾 듯 꿀밤을 줍는다. 지금처럼 서리가 내려 들판이 잠들 때면 교정에 은행나무, 오동잎들이 너울거리면서 내려 앉아 이불을 깔아준다.
새 나라에 새 일꾼이 되겠다던 졸업가를 부른지도 5십 년, 우리들은 그때 친구들을 찾아 시골 아닌 서울로 간다. 부산에서 출발한 차는 고향을 둘러 대구에 친구를 싣고 고속도로를 달린다. 기사 역시 그때 친구가 했다. 아이들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 라고 불러주는 나이다. 차안에는 소년소녀들로 채워져 있다. 남여 가릴 것 없이 이름을 불러댄다. 서울친구가 며느리를 본다는 청첩이 와 얼굴 도장을 찍으려고 차를 탄 친구들이다. 원본을 지니지 않아 오래된 친구는 실물을 확인 하는데 한참동안 기억 저편을 헤매었다.
바빴던 세월이 한숨을 돌릴 나이다. 3-40년을 제각기 흩어져 바쁜 삶을 살다가 동창회라는 조직이 우리를 불러내 초등학교 운동장에 내려놓는다. 운동장이 터져 나갈 정도로 시끌벅적 하던 함성 소리가 허연 머리카락 아래에 패인 주름만큼이나 선명하게 들려온다.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이웃동네에 자란 동창생들이 전국에 흩어져 산다.
90회를 눈앞에 두고 폐교를 한다고 했다. 집집마다 5-6명의 자녀들이 다녔던 학교는 시골학교 치곤 큰 학교였다. 1,000명의 건아가 하나가되어 라는 교가가 10 여명으로 줄어 폐교를 한다는 고향친구의 말을 듣고는 대를 잊지 못하는 종가집 종부처럼 가슴이 아려온다. 삼천만이 오천만으로 늘어난 인구가 왜 도시에만 모여 사는가. 나도 그렇고 내 아이도 그렇다.
고향친구들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모였다. 최고의 부자들이 산다는 강남의 중심부는 휘황찬란하다. 결혼 축하객도 역시 품위를 갖춘 듯 우아해 보였다.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고 스테이크를 자르는 솜씨가 익숙하다. 열심히 살아온 덕으로 친구들을 문화의 중심지인 최고의 식장으로 초대했다. 혼주도 주인공도 코엑스 건물처럼 세련됨을 스크린이 비춰준다. 신부 친구는 축가를 원어로 불렀다. 행복하게 살으라는 뜻이 담겨있는 노래인 듯 싶지만 처음 듣는 곡이라 가슴에 닿질 않는다.
간간한 친구들은 오랜 객지생활 탓에 말투도 고향사투리가 아닌 전국적이다. 문명의 발달을 향유하면서 각자의 걸어온 길이 어떻던 50년 전 그때의 친구로서 만난 사이기에 그저 반갑다. 보이지 않는 친구도 많지만 만사를 재껴 놓고 잔치라는 명목아래 무작정 보고 싶어서
왔다는 처음 보는 친구도 있었다. 염색을 하지 않았는 친구들은 반백이 넘은 은발이다.
옛날이 그리워 그 때의 얼굴을 더듬는다. 각각마다 특색 있었던 어린시절을 그려본다. 울보, 땅콩, 노고지리, 이름보다 훨씬 기억하기 좋은 별명이 더 정감이 간다. 화약총을 엉덩이에 쏘아 며칠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사실들이 오래도록 지워지질 않는다. 새싹에서 여물어져 씨앗이 됐다. 아름답게 꽃피울 꽃망울이 군락을 지어 양지바른 둑에 모였던 옛 둔덕이 그리워지는 나이다. 해가 갈수록 자리가 빈다. 환갑을 지난 나이는 덤으로 사는 인생 이라고 했던가? 꾸부정한 허리를 하여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는 친구에게 또 하나의 나를 본다. 벌써 저토록 늙었나? “이제 부러워 할게 뭐 있나 건강 하그래이” 역시 생명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순위다.
손바닥처럼 훤한 고향 동네들이다. 여학생이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시절, 초등학교 졸업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떼를 지어 친구들 집을 순회했다. 매일 보던 얼굴을 자주 못 본다는 아쉬움에 돌아가면서 한 끼의 밥을 나눠자는 이야기가 누군가가 먼저 해 5-6 일 동안 돌아다녔다. 친구들에게 한 끼의 밥을 해줄 능력이 안 된 친구가 고개를 떨구고 돌아가던 일이 평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가난에 절인 친구는 가족이 몽땅 이사를 가 그 후 한 번도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왜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을까? 물론 오늘도 나타나지 않는 내 짝꿍은 가난의 상처를 친구들에게 받고 그 아픔을 견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모두가 축하해 주는 결혼식 자리에서 그 친구 생각이 이리도 간절할까? 모두가 어려운 시절 추억담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친구야 어디서든 행복하여라. 그리고 언젠가는 나타나서 ‘나도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산다고‘ 우리의 기를 한 번쯤 눌러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