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나보다 한살 하고도 하루가 늦은 연하남이다.
연애할 때나 살아오면서도 연하라는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장난 삼아 우리 부부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누나야!\" \"오빠야!\"
아이들은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느냐고 웃는다.
오빠는 뭐고 누나는 뭐냐고...
연하남을 오빠라 부르는 것은 아직 우리 부부는 여보, 당신을 한번도 못해 봤다.
서로 쑥스러워서 못하는 호칭이다.
주로 누구아빠나 누구엄마를 부르기도 하지만 자주 서로의 이름을 잘 부른다.
누구누구씨, 누구야!
남편은 남이랑 같이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동석해 있으면 절대로 반말을 안한다.
어떻게 해 주세요, 어디를 가요? 어떻게 합시다.등....
완전 극존칭은 아니지만 하게나 해라를 하지 않고 하오체로 이야기한다.
가끔은 우리가 하는 대화를 듣고 많이 부러워하는 부부도 있다.
어쩌면 남편한테 존댓말을 듣고 사느냐고....
연하남이라서가 아니고 남편은 남자가 여자들한테 특히 자기 아내를 타인들이
있는데서 막무가내로 막 대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 한다.
바깥사람 자기 남편이 아내를 함부로 대하면 남도 함부로 대한다고 집에서는
농담삼아 오빠야, 누나야하고 장난삼아 부르더라도 밖에서는 깍듯이 존댓말로
이야기한다.
처음 남편을 만나고 연하남인걸 알았어도 전혀 문제되는게 없었다.
신중한 말에나 함부로 하는 행동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연하남이라는 느낌조차 없었다.
스물 둘,스물하나에 연애를 하면서 우리는 참 사연도 많았다.
남편은 어린나이에도 한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려면 직장이나 주거환경이 갖추어 져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고 나는 사랑이면 모든 것을 덮을거라 여기는 낭만파에
추진형이었고.
거의 3년을 편지와 전화로만 연애감정을 키우다가 남편은 우리집에서 자꾸 선을 보란다는
내 말에 결별을 선언하고 우리는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나는 집에서 주선하는 맞선이라는 것을 서너군데 보게 된다.
중학교 선생님,체대나와서 포항제철에 예비군 담당하는 사람에 사업하는 사람까지.
남편과 결별을 선언하고 몇개월 동안 맞선을 보고 다시 연락이 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재차 만나지를 않으니까 아예 중매장이를 앞세워 우리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어른들 보기에 좋아보이는 체격을 하고 있고 얼굴도 영 아니게 생기지는 않았다.
조금 남자같이 생기긴해도 아주 엉망인 얼굴은 아니고 건강하다 못해 철철 넘치는 건강처녀
였으니 중매장이들이 탐내는 색시감이었던 셈이다.
맞선을 봐서 결혼을 해야지라고 생각 했다가 맞선자리에서 상대편 남자의 얼굴 위에
지금의 남편얼굴이 포개지는 현상이 자꾸 일어나니 도저히 옳은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엄마는 맞선 본 집에서 결혼하자고 연락이 온다고 한번 더 만나자고 하고 나는 말은 못하고
차일피일 약속날짜만 길게 미루고.
큰 포목점을 경영하시면서 사회사업을 하시던 어떤분은 아들이 중학교 교사였는데
남자상를 한 사람이 잘 산다고 꼭 며느리 맞고 싶다고 중매장이를 우리집에 자꾸 보낸다.
그 남자도 사람이 서글서글 좋아 보였다.
그래도 이 연하남의 얼굴이 자꾸 떠 올라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또 맞선자리를 알아 온 엄마가 싫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는 (지금의 남편과 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신혼생활을 하게 된다.
엄마는 집안 좋고 직장도 좋은 총각들이 많이 있는데도 월급도 적고 집도 마련하지 못한 남
편이 못마땅 해서 처음에는 많이 서운해 하셨지만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남편의 살뜰한
장모님사랑이 있으니까 지금은 이서방, 이서방 하신다.
남편은 스물넷, 나는 스물다섯에 우리는 결혼하고 이듬해에 큰 딸을 낳고 4년 뒤에 둘째딸
또 2년 뒤에 아들을 낳고 지금까지 잘 살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사촌 오빠도 우리의 결혼을 반대했다.
어릴적에도 나를 많이 이뻐했던 사촌오빠는 내가 집안도 넉넉한 남자를 선택하길 바랬지만
이 남자의 깊은 눈매에,
이 남자의 부드럽고 배려 많은 음성에,
이 남자의 따뜻하고 큰 두 손에 이끌리어 모든걸 걸어버렸다.ㅡ올 인
우리는 가진게 없어도 좋았다.
내가 얼마간의 저축이 있었기에 대궐같은 집이 부럽지 않았다.
그의 사랑이 깃든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풍요로웠고 감격이었다.
가난한 신혼이게 해서 항상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맞선 본 얘기를 다 했기에 그는 편안한 생활을 마다하고 자기를 선택한 내게
늘 뭔가를 해 주기를 좋아했다.
단칸 월셋방에서도 작은 다락방에 서재를 만들고 공부했고, 조금 더 넓은 집에서도
따로 서재를 만들어 공부한 남편은 크고 작은 평가대회에서 수석을 차지하며
그 환한 웃음과 함께 상장을 내 품에 안기며 기뻐했다.
여러말로 장황하게 자화자찬을 하는게 아니고 그냥 가만히 내밀고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부끄럽게시리..\"
이러는 남편이었다.
남편이 처음부터 나와의 결혼을 반대했던 것은 사랑은 하지만 학벌이 문제였다.
무슨 의리의 돌쇠라고 아버지도 살아계시고 다른형제 다 가는 고등학교를 안가고
아버지 일을 돕겠다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한다며 고시원에
올라가서 며칠하다가 그만두고 집으로 들어온다.
그 길로 아버지의 공장일을 도우며 집안을 책임지는 청소년이 되었다.
그러다가 군에 자원한 나이가 스무살.
그리고 나와 연애를 할 때는 학벌이 자신이 없어서 얘기를 안하다가 내가 선을 보고
결혼하란다는 집안의 얘기를 하니까 학벌을 얘기하며 자기를 포기하란다.
처음에는 다소 충격이었지만 워낙에 진중한 사람이라 중학교 졸업이란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친정식구들은 남편의 초기 학벌을 모른다.
결혼을 하고 고등학교를 방송통신으로 마치고 대학은 야간대학을 진학하게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있어서 본인이 학비를 축내면 아이들과 힘든 생활이 된다며
망설이고 그만두려고도 했다.
내가 끝까지 밀고 나가라니까 기쁘면서도 미안해 하며 등록을 하고 누구보다도
열심으로 공부한 결과 졸업 때 까지 올 에이 플러스 학점에 에이 학점은 딱 하나 받는
놀라운 성적으로 학사모를 쓴다.
남편이 졸업한 대학의 전설이 되어 보관되어 있는 남편의 레포트.
레포트를 제출하기 위해서 방 가득 책을 펴 놓고 밤을 꼴딱 세우던 남편의노력은 교수님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수십년의 교수생활에서 이렇게도 성의있고 자세한 레포트는
처음이라고 교수님이 보관하겠다고 하셨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기질이 나오지만 특히나 공문서 제출이나 어디에 보내야 하는 보고문 작
성은 더더욱 철저하다.
지금도 남편의 성적표는 컴퓨터 방에 액자틀 속에서 빛나고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충격 요법으로 걸어 두고 있다.ㅎㅎㅎㅎ
남편을 선택한 나의 판단은 헛되지 않았고 겉모습으로 순간적인 착오를 했다면 아마
지금쯤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도 한데 겉과 속이 다 좋은 혼처가 어디 그리 쉽겠는가.?
남편의 대학공부 내내 우리는 가난했지만 벅찼고 보람 또한 많았다.
아이들도 늘 책상에서 공부하는 아빠가 있어서 좋았고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물어보면
꼼꼼하게 대답해 주는 아빠가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남편은 어릴 때 부터 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냥 어린애 다운 생각으로 학교나 다니고 했으면 나이들어 어렵게 공부하지 않았을 걸
효성이 지극했던건지 어리석었던건지...
지금의 남편은 사회복지사로 나는 조리사로써 힘들었던 지난 날을 이야기하며 살지만
그때 공부하며 육아문제가 같이 맞물렸을 때는 금전적인 어려움이 컸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철철이 바꿔가며 유행하는 옷으로 자신들을 치장할 때 우리가족은 사촌언니나 친구들의
철 지난 옷을 물려받아 입으면서 학비나 학용품은 좋은 것으로 대신하는 그런 생활을 했다.
가끔 아이들이 어려웠던 시절에도 학교에 내는 돈은 일착으로 주던 엄마를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다.
올ㅡ인!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건 여자는 오늘도 그 남자의 사랑으로 아름다운 노년을 꿈꾸며 산다.
지금도 연애할 때의 찌릿찌릿한 감정을 안고 식지않은 시선을 주고받는 내 남편은 연하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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