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이 나뭇가지마다 빈틈없이 피어나면 연연분홍색 꽃을 올려다보며 슬픔을 한잎 두잎 날려 보냈다. 꽃 지던 어느 해는 살구꽃이 편지지에 살며시 내려앉기도 했다. 소낙비가 내리면 덜 익은 살구가 뜰 가득 가랑잎처럼 가볍게 떨어지던, 내가 살던 마을은 살구꽃 피는 마을이었다.
일산신도시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가 넓었고 아파트 마다 뜰이 넉넉했고 동그랗게 모여 있던 아파트 중간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넓은 잔디와 여러 종류의 나무들과 꽃이 있는 자연친화적인 도시는 축복이었고, 자연에 묻혀 살고 싶어 했던 꿈의 도시이기도 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일학년이었고, 아들아이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살구꽃 마을에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겨울에 이사를 들어오고 다음해 봄은 꽃그늘 아래로 아이들과 산책을 했다. 아들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는 쥐똥나무 잎을 갉아 먹고 사는 나비애벌레를 만나러 다녔다. 어른 손가락만한 애벌레는 나뭇잎 생식을 해서 나뭇잎 닮은 초록색이었다. 나뭇가지로 애벌레를 건드리면 입에서 암녹색 침을 꾸역꾸역 내뱉으며 꾸움틀 꾸우움틀 거렸다.잔디 사이 해사한 민들레, 밤마다 노란 전등 켜는 달맞이꽃, 좁쌀처럼 차르륵 떨어지던 개여뀌, 솜털 하얀 토끼풀을 꺾어와 유리컵에 꽂아 식탁에 놓으면 혼자 커피를 마셔도 외롭지 않았다.
국방색 쓰레기통 옆으로 기다란 뜰이 있었다. 그 뜰엔 불두화가 봄에서 여름사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피어나곤 했다. 딸아이는 불두화 꽃이 제일 예쁘다고 불두화가 피는 날에는 그 곁에 서서 오래도록 꽃잎을 건들려 보곤 했다. 불두화가 호빵처럼 먹음직스럽게 피면 쓰레기통은 호빵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와 자작나무 가지마다 까치가 집을 지을 때면 딸아이는 까치가 집을 짓는 모습을 보고는 내게 조잘조잘 까치처럼 떠들었고, 아들아이는 들꽃 꽃다발을 만들어 엄마? 이거? 하고 뻥뚫린 내 가슴에 안겨 주기도 했다. 지금도 눈앞에 하얗게 흔들리던 꽃이 또 하나 있는데, 봄맞이꽃 밭이 그것이다. 앞동 뜨락엔 봄맞이꽃이 잔디 틈을 비집고 쌀티밥처럼 피어났었다. 같은 뜨락에 키 껑충한 냉이 꽃과 샛노란 꽃다지 무리들도 잊을 수 없다.
아파트 담장사이로 넝쿨장미꽃도 생각난다. 꽃송이가 보통 넝쿨장미보다 삼분의 일 크기였다. 짙은 빨간색이었는데, 그렇게 예쁜 장미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아파트 후문으로 나가 이차선 도로를 건너면 쇼핑센터가 있다. 쇼핑센터는 물건의 질은 좋으면서 저렴했다. 지하 식품점 옆에 큰 서점이 있어서 아이들과 책을 골랐다. 수예점도 서점 옆에 있어서 십자수를 놓아 쿠션도 만들고 액자도 만들고 가방도 만들었다. 걸어서 오 분 거리에 백화점과 지하철도 있었다. 도로마다 가로수가 그늘을 만들고 십분만 걸어가면 호수공원이 호수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여름이오면 부엌 창에서 내려다본 공원은 초록물결이었다. 식탁에 앉아 베란다를 마주하면 창 가득 하늘빛의 가을이 오고, 겨울엔 흰 눈이 포실포실하게 내렸다. 내 집이 있어서 행복했다. 아이들이 나무처럼 자라주어서 감사했다. 남편과의 날들은 뒤죽박죽, 갈팡질팡 이었지만 좋았던 날도 꽤 있었다.
일요일이면 자전거를 타고 호수공원으로 달려갔고 일주일에 한번 외식을 했다. 두 달에 한두 번 여행을 갔다. 밤새 술독에 빠져 있어도 얼굴에 화투짝이 찍혀 있어도 약속한 여행은 떠나주던 남편이었다. 심하게 싸워도 십분 이면 마음을 풀어주던 남편, 찬밥을 먼저 갔다 먹던 남편, 반찬을 내 앞에 내밀던 남편, 언제나 먼저 웃던 남편, 아이들을 무척 아끼던 남편, 반찬타박이나 살림타박을 안하던 남편, 거친 말이나 행동을 안 하던 남편, 언제나 착하던 남편.
집을 잘 팔고 이혼 서류를 내려 법원으로 가던날은 차창 가에 때 이른 코스모스가 피던 8월의 끝이었다. 소도시의 이층에 자리 잡은 임시법원은 흑백사진처럼 낡았고 촌스러웠다. 비닐 소파는 군데군데 뜯겨져 있었고, 서류를 적는 책상은 70년대부터 동사무소에서 쓰던 것 같았다.
삭을 대로 삭아 폭삭 주저앉겠군.
더워라, 창문을 열어야겠군.
유리창은 손잡이를 밀어서 여는 문이었다. 먼지가 채에 쳐댄 밀가루처럼 고르게 쌓여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창문을 밀었다. 한 번에 밀리지 않았다. 손목에 힘을 모아서 밀어보았다. 삐지직,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쌀 때 나는 소리랑 닮았네.
창 밑은 책상처럼 낡은 보도블록이 깔려 있고, 보도블록과 비슷한 수준의 담벼락엔 이름 모를 침엽수가 자라고, 화단 가장자리로 코스모스가 바람 따라 허리를 흔들고 있다.
커피 마실 거야?
아니.
커피 자판기가 어디 있지…….
아직까지는 내 남편인 사람은 커피 자판기를 찾아 계단을 내려간다.
서류를 내고 일주일 뒤 70년대를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임시법원으로 올라갔다.
쌍쌍이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쌍쌍이는 나란히 앉아 웃는다. 결혼할 때도 웃으며 했으니 헤어질 때도 웃으며 하자는 말인가 보다. 어떤 쌍쌍이는 뚝 떨어져 앉아 있다. 숨소리도 듣기 싫은 만큼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말인가 보다. 우린 나란히 앉았다. 무소유, 무의미, 무관심이었다. 이미 떨어진 이파리 책갈피에 꽂으면 무얼 할 것이며, 이미 깨어진 사기밥그릇 붙인들 쓸모가 있겠냐는 거겠지.
이제 살구나무 꽃동네와 착한 남편은 떠나갈 시간이 되었다. 집 판돈으로 은행 빚과 사채 빚을 갚아도 남편은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식구가 살 좁은 전셋집도 마련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가야 했고, 남편은 보증금 없는 변두리로 이사를 갔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일주 일만에 이혼을 하고 이십 일 만에 우리 가족은 두 길로 갈라졌다.
돈 벌면 다시 합칠거야, 남편이 이 말을 할 때, 엄마네 아파트 뜨락엔 자주색 소국이 오글오글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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