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었다, 걸리지 않는 바람이었다.
숱한 인연 속에 그 사람은 바람이 되었다.
그리움으로 솔솔 불던 바람은 폭풍처럼 내 가슴팍을 아프게 후볐다.
두 번 다시는 맞고 싶지 않는 맞바람.
뜨물처럼 가끔 한 번씩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뿌우연 아픔들,
결코 바람이라 말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라 명명하고픈 첫사랑.
내 몸에서 차츰 빠져 나가던 정신들은 딸아이로 인해 자리를 잡고 있었을 무렵, 시집에선 일산에 아파트를 분양 받아줬다.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시아버님이 남겨 논 재산은 삼년이 아니라 삼십년은 남아 있었나보다. 30평대 아파트는 나를 더욱 더 정신병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둘 째 아이의 임신은 나를 완전하게 일으켜 세워줬다. 예기치 않았던 임신이었지만 둘째를 낳으면 그것도 아들을 낳으면 남편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된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러 다녔다. 결혼해서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기초를 단단하고 판판하게 닦고, 쇠가 박히고 쇠뼈대에 살이 붙더니 일 년이란 시간이 흘러가니 아파트가 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회색빛 살에 하자 부분을 누더기처럼 땜질을 하더니 변장을 한 사십대처럼 뽀얀 얼굴을 하고 서 있는데,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몇 끼 굶어도 배가 부르고, 그동안의 갈등과 미움도 봄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둘째는 아들이었다. 남편이 무척 좋아했다. 상처도 아물고, 평범함 가족처럼 나도 이제는 앞날이 평범할 줄 알았다. 아들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내 집으로 이사를 했다. 눈물로 기뻐해주던 친정엄마, 베란다가 딸린 예쁜 방이 생겼다고 해당화처럼 웃던 딸아이, 가슴에서 뭉클뭉클 기쁨의 덩어리가 올라오던 나는 베란다에 바이올렛을 한 가득 키웠다. 그때가 겨울이라서 색색의 꽃이 피던 화초는 바이올렛이 제일 고왔다. 햇살이 좋아서 바이올렛은 꽃을 잘 피워 물었다.
창 넓은 11층은 부엌 식탁에서 바라보면 하늘이었다. 아이 둘은 큰 탈 없이 잘 커주고 있었다. 삼십 초반에 집을 장만하고 평범한 일상이길 바라던 삼십 중반쯤부터 남편은 한숨을 쉬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또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매일같이 새벽에 들어오고 툭하면 술에 절어 들어오고, 툭하면 빚만 늘어간다고 한숨만 쉬었다. 드디어 몰래 집문서를 가지고 나가서는 은행 빚도 모자라 사채를 썼다. 빚은 남편 목을 조르더니, 내 목으로 옮겨와 아이들 목을 졸랐다. 더 이상 설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남편은 목을 졸려 정신을 놓아 버렸다. 매일 술과 도박으로 살았다. 싸우다 지쳐 각방을 쓰게 되었다. 한 집에 살면서 별거가 시작 되었다.
난 다시 우울증에 한 발을 들여 놓으면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하필이면 그게 바람처럼 떠돌던 옛 추억이었다. 학창시절부터 글 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젊은 날에 만났던 펜팔 친구를 향해 편지지를 사서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편지는 버스에 올라타 기차에 몸을 싣고 멀리 먼 곳으로 덜컹이며 달려가서는 남쪽 바닷가 작은 마을 그 소년에게로 무사히 착륙을 했다.
시인이 되고 싶다던 바닷가 소년은 국어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살구꽃이 지던 봄날에 우린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옛날 소녀처럼 감성에 빠져 그게 바람인줄도 모르고 바람이고 싶지 않고 편지친구이길 바라며 편지를 썼는데…….
남편은 이혼을 할 때까지 모르고 있다. 편지만 쓰다가 몇 번 만난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이혼은 첫사랑 때문이 아니고 남편하고 나의 결혼 운은 그 만큼이었기에 서로의 갈 길로 간 것이다. 첫사랑을 만나서 별거를 한 것이 아니고 남편의 바람 같은 삶으로 인해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남편은 살았다. 바람 부는 곳으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않고 지금도 바람처럼 살고 있다.
나는 그리운 사람도 없다. 보고픈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내겐 잠시 사랑이라 말하는 남자가 있었지만 그것 또한 걸리지 않는 바람이었다. 후회도 핑계도 없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살다가련다. 혼자면 어떠리…….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데……. 태어날 땐 날 낳아준 어머니가 계시지만 떠날 땐 홀로 떠나야 하거늘…….그게 자연의 법칙이고 뜻인 것을…….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