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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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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마음


BY 둘리나라 2007-09-16


 하늘을 파란색 물감으로 찍어 붓으로 색칠한 듯 너무나 새파랗고 눈이 부시다. 오랜만에 마당에 나와 앉아 봄 향기에 취해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시간과 친구가 되었다.

 따스한 봄바람은 친구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오후의 여유를 낮잠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반은 감기고 반은 그대로 뜨고 있으려고 애를 쓰면서 나를 추스르지만, 연신 하품이 나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의 요정까지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견디기 힘든 유혹에 서서히 넘어가 마지막 속눈썹에 요정의 잠 가루가 닿는 순간, 어디선가 한낮의 고요를 깨고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빛 속으로 잠재우기에 실패한 요정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눈앞에 호기심을 잔뜩 담은 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네 살 된 딸아이는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입가에 함박웃음을 가득 담고는, 작은 손에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쥐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손을 펴 보였다. 손바닥 위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꽃잎 하나가 놓여있었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도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동그란 눈으로 궁금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엄마, 이게 뭐예요?”

“응, 그건 꽃잎이야. 봄이면 세상을 예쁘게 장식하는 거야.”

“꽃! 잎!”

 입을 크게 모아 꽃잎을 외치고는 입으로 후후 불어 보다가 손으로 만져 보고, 이리저리 돌려 보기도 하며 친구가 되어보려 애를 쓴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느낌보다는 너무나도 신선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어른들에겐 그저 어디선가 굴러 온 골치 아픈 존재일 뿐인 그것이 아이에게는 소중한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신기한 모양이다. 서로의 마음이 이리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는 또 쓸어야 하는 귀찮은 쓰레기일 뿐인 것을…….

 어린아이의 눈은 때가 묻지 않았다는 말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린 어른들 속에 나도  존재했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평범한 일상에 젖어 그저 물 흐르듯, 바람 가듯 스쳐간 많은 시간들 중에 분명 딸아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하고 편견 없이 받아들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알고 싶고, 소중하고, 꿈같았던 추억이 존재할 텐데  왜 기억이 나질 않는 걸까. 아무 꾸밈없이 하늘을 향해 웃고  삶에 허덕이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그때가 내 가슴속 어딘가에는 자리 잡고 있으리라.

 해맑은 아이의 얼굴 위로 햇살이 포근하게 흐르고 있었다. 밝은 빛 속에서 요정처럼 미소 지으며 나를 쳐다보는  천진한 모습에서 오늘도 한 가지 잊고 지냈던 인생의 교훈을 배운다. 세 살 먹은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했던가. 삶을 사랑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용기를 딸아이의 환한 웃음 속에서 배우고 또 느꼈다. 사람을 대할 때도, 세상을 대할 때도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부정적인 것부터 보고 난 뒤 ‘그래, 다 이런 거야’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생각의 맞음에 자위하던 어리석음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전부 세상 탓으로 돌려버리고 내가 만든 생각 속에 그저 안주해 살아가려던 나약함을 아이에게 들켜버린 것만 같다.

 앙상함을 드러낸 내 감성의 가지에도 물을 줄 때가 왔다는 걸 알려 주려 한 걸까?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아니, 그런 용기를 갖자.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는 세상살이 속에서도 사랑의 꽃은 피어나고, 희망의 열매는 크고 튼실하게 맺어지지 않던가. 아무렇지 않은 꽃잎 하나에도 크게 감동할 수 있는 용기가 새삼스러워 지는 날이다.

 봄이 가기 전에 세상의 향기를 마음껏 마시고 싶어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섰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밝고 활기찬 모습이 괜스레 내 마음까지 두근거리게 했다. 봄이 가진 마력은 첫사랑을 겪는 소녀의 설렘처럼 모두의 가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저 멀리서 ‘부우웅’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가족이 보였다. 척 보기에도 다 낡아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나는 오토바이에 아빠와 엄마, 아이 둘이 사이좋게 타고 있었다. 아빠의 등을 꼭 잡은 아이의 손에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고, 엄마의 등에 업힌 아기의 뺨은 새빨간 사과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바람을 따라 흐르는 가족의 웃음은 긴 여운을 남겨 놓고 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좋은 차에 떵떵거리며 살지 못해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작은 기쁨에 감사하는 것이 참다운 행복인데, 왜 지금까지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스스로 행복을 거부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맑게 웃던 모습이 사진처럼 찍혀 가슴속으로 들어와 사진첩에 들어갔다. 시간 날 때마다 꺼내보리라. 높은 곳만 쳐다보며 비교하고 실망하며 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시간들을 왜 허비하며 살았는지 가벼운 한숨이 공기 속에 흩어졌다.

 딸아이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두 팔을 펴고는 온 하늘을 안을 듯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내 삶은 남의 것이 아냐 내가 만들어 가는 거야. 작은 기쁨에서 큰 행복을 느끼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가지리라.’ 아이의 뒤를 따라 뛰어가니 노랑나비 한 마리가 잘했다고 칭찬이라고 하는 듯 머리 위를 쓰다듬으며 날개 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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