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아가씨를 안다는 것은 그저 노래를 부를 줄은 모르고 귀로 몇 번 들었다는 애기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할아버지일텐데...
생전 와보지도 않은 동네에서 처음 본 라디오를 틀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랫말에
홀렸다. 그저 따라만 하면 되겄지 햇는데.
헤이 일 수으 없이 수으 많은 밤을
내 가아슴 도오려내는 아으픔에 겨워 ~~~
이미자는 나와 목소리가 전혀 틀리다. 나는 한 음 높은 목소리니 어울리지도 않고
더군다나 가사도 모른 채 나오는 노랫말을 챙겨 들으며 우물우물 부르니 할아버지가 답답했던 가 보다. 으이그..젊은 사람이 어찌 힘이 모자른 겨?..
그래서 배에 힘을 줬는데
어얼마나 우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그리움에 지이 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드으러었소 ...
근디 아무리 들어도 이건 하도 오래 틀어서 테이프가 늘어 난 건가. 아니면 이미자가 늙은 건가 당최 구분이 안간다.할아버지 아무래도 노래가 이상혀유~~ 했더니 뭐가 이상하냐구 카세트를 끈다. 갑자기 조용해졌는데..
동백꽃 니잎에 새겨진 사아연
마알 못 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가아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우물가에 세워 놓고 나머지 노래를 이어가는데.
이건 필시 무슨 사연이 있는거다. 그렇지 않고 저렇게 눈 감고 반듯이 서서 가사 하나하나 짚어가는 힘이 느껴졌다.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나그네 앞에서 그토록 가아신 님 그리워 부르는 그 광경에 나는 또 얼이 벙벙 해지고.
내가 부르다가 만 그 동백아가씨 덕분에 여기가 어디예요 동네 이름이 뭐예요, 얼마나 오래 된 동네예요등등 준비 해둔 질문들은 송두리째 잊어 버리고, 오로지 저 할아버지 그 옛날부터 기다리는 님이 누구길래 저토록 구구절절 할까 싶고.
근디 어디서 왓어? 노래를 다 부르신 할아버지는 그제야 나의 주소지를 물었다.
얼떨떨한 나는 엉겁결에 제가유 길을 잘 못 들어서 여기가 어디인 줄 모르는 디유...
긍께 시방 어디서 차타고 온 거여?
아 예..저어기 여그보다 쪼메 더 멀리서 왔어유...
나두 참 얼빠진 대답을 했지만. 할바버지 대답이 더 걸작이다.
나도 여그 아직 살지만 조만간에 언제 갈지 몰러...
그러더니 자전거에 올라타시면서 뒤에 잇는 카세트를 또 꾸욱 누른다.
헤이일 수 없어시...분명하다. 저건 테이프가 하도 오래되고 낡아서 늘어난 이미자 목소리다.
나는 또 그 생각에 도대체 여그가 어디냐구... 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차를 다시 몰고 돌아 나오면서 혹시 무슨 큰 이정표나 큼직큼직한 건물이 잇으면 간판도 잇을 것이고 뱅뱅 돌았지만 천지가 푸른 논이요, 거기다가 해가 뉘엇뉘엇 산능선에 걸치는 가싶더니 하늘은 벌개지고 논 바닥은 그 바람에 더욱 시퍼랗고 그러다가 남색 도라지꽃이 몇 천평피는 밭이 나오는데.
오매 이거 환장 하겄네..길은 모르고 떠나는 게 아니다라고 그 누가 예언 같지 않은 예언을 했는지.. 붉은 해에 푸른 논에 목 길게 가는 허리를 뽑내는 흰두루미 떼들이 적송위에 힌 종잇장 보다 더 가볍게 오르고 내리고 날다가 비잉 원을 그리며 도는 모양이 학춤을 보는 듯하다.
달은 일찍도 뜨지.. 거기다가 달맞이꽃이 드디어 입을 벌려 노랗게 일렬횡대로 줄 서 있다.
차도 안 다니는 그 도로엔 중앙선도 없이 나 혼자 시속 삼십으로 달리는데
맞은편에 경운기가 달달달 온다.
이 번엔 여기가 꼭 어디냐고 물어서 알아둬야지 하고 일부러 차를 세워 내리고 한쪽에서 기다리는데. 너무 천천히 온다.
근디... 할아버지가 경운기를 몰고 오는데.
할아버지 여그가 어디예요? 했더니 손사래친다. 분명히 모른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몰라 또 소리쳤다. 경운기 모터소리는 내 목소리보다 더 높아서 그랫는데.
또 이젠 아예 두손으로 손사래를 친다. 자세히 살펴보니 귀가 안들리시나 손으로 귀를 대고 안들린다는 눈빛이다. 손바닥이 온통 굳은 살이다. 굵은 마디가 나무 등걸과 닮았다.
아 ! 나는 왜 여길 왔는지... 누구에게 물어 봐야 되것는디...
덧) 참 희한한 여행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때 그 마을이 분위기는 영 잊혀지지 않아요.
여름휴가를 또 여기로 가고 싶은데... 그 길이 가물가물하니 이렇게 여행기록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