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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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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 다녀오렴(2)


BY 개망초꽃 2007-03-31

 

딸아이가 태어나고 자란 과정은 결혼의 역사와 마찬가지다.

딸아이는 나의 결혼생활을 누구보다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지만

내성적이라서 속으로만 삭히며 살았다.


어린 시절 딸아이는 감성이 풍부했고 자연의 경이로움에 빨려 들어가기도 했다.

수국 꽃이 필 무렵엔 수국 꽃을 들여다보며 수국 꽃을 제일 좋아할 거라고 말했고,

하교 길에 까치가 집을 짓고 있는 걸 관찰하고 와서는 숨을 할딱이며 얘기해 주기도 했고,

다 죽어가는 길고양이를 안고 와서 불쌍하다고 눈물짓곤 하던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그림과 글을 잘 써서 많은 상장을 받아 왔고,

특히 글을 잘 써서 상금으로 돈을 받아와 가게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미술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해서 미술학원을 다니다가 가정형편상 그만두기로 하고 대신 국문과 쪽으로 방향을 틀어가던 중 가정 형편은 밑바닥에 닿아 있었고

결국 울타리는 무너져 그것마저도 포기한 채 방황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저녁노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다던 눈이 큰 아이,

길가에 계절마다 피는 꽃 이야기를 조잘조잘 하던 들꽃 같은 아이,

야단을 맞기 전에 눈물이 후다닥 먼저 떨어지던 여린 가슴을 안고 살던 아이,

키가 작아 고민을 하던 키 작은 아이,

예쁜 편지지를 만들어 매일 뭔가를 끄적이던 나의 소녀 시절과 닮은 아이,

한 남자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한 남자만 만난다는 일편단심을 고집하던 고지식한 아이,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는 표시가 얼굴에 확실히 나서 손해를 본다는 사회성에 문제가 생길 조짐이 보이지만 진실하고 성실한 아이,

낯가림이 심하고, 말투가 쌀쌀맞고, 겁이 많고,

밤잠이 없고 아침잠이 많아서 이래저래 나랑 닮은 딸아이는

일본으로 가던 며칠 전에도 전날 밤에도 공항에서도 웃고 떠들고 생글 거리고 있었다.


비자 신청도 준비물도 준비할 모든 상황과 마음도 혼자서 치러냈다.

나는 일에 매여 있어서 도와주지도 못했고,

언제나 알아서 잘 챙겨 왔기에 신경도 별로 쓰지 않았다.

같이 유학 가는 친구들은 준비하는 과정에서 헤매다가 딸아이에게 전화로 물어보고

그래도 안되면 불러내서 필요한 서류와 일본대사관을 안내해 주기도 해서

교수님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역시!! 짱이다, 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제 이년동안 타국으로 보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교수님이 걱정되시죠? 걱정하지 마세요. 하시고

아이들은 하나 둘 자기 가방을 챙겨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는데

한 학생이 울기 시작하니까 그 옆에 있던 학생이 눈자위가 빨갛게 되었다.

딸아이는 친구 둘이 우는 걸 보더니

뭘 우냐? 왜 울고 그래……. 하더니 뒤로 안돌아 보고 대기실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섭섭해서 딸아이 뒷모습만 쳐다보면서 뒤돌아보겠지 했더니 막 뛰어간다.

분명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뛰어 갔을 것이다.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공항 전체가 흐려져 어른거렸다.

빨간 간판 불이 켜진 식당도 돔 형의 지붕도 반짝이던 대리석 바닥도

흔들려 찍힌 디카 사진 같았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를 세운 곳이 어딘지 몰라서 한참 헤매다가

온통 유리와 쇠파이프로 곡선과 직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으로 생긴 공항 주차장을 한 바퀴를 돌게 되었지만

왜 그것도 확실히 몰라서 힘들게 하냐고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멋 좀 부린다고 뾰족 구두를 신고 와서 발바닥이 화끈거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기 싫었다.

왜 좀 더 편하고 행복하게 우리 딸아이를 여기까지 오게 하지 않았냐고 원망도 들지 않았다.

모든 게 짜여진 스토리일지도 모른다.

딸아이가 힘들게 태어나고, 꽃을 좋아하며 자라고, 혹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어 쉽게 갈 수 없는 유학을 떠나고…….

모든 것이 나와 딸아이의 일류도 삼류도 아닌

이류쯤 되는 인생 스토리일 것이다.


애들 아빠는 만날 때마다 하는 말, 미안하다 면목이 없다며 부천으로 가고,

나는 원망도 안하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일터로 들어오고,

딸아이는 제일 안쓰럽다던 남동생을 두고,

제일보고 싶을 거라는 꽃순이를 내려놓고 일본으로 떠난 모든 것이,

계속 이어지는 어떤 소설의 일부분인 것만 같다.

그리 재미있지도 그리 재미없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모순 투성이의 사람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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