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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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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


BY 개망초꽃 2007-03-05

한 시간 이상 길을 떠날 땐 작은 책 한권을 들고 간다.

특히 지하철을 탈 때는 더하다.

지하 속을 달릴 때는 책을 보고

지상 속을 달릴 땐 창밖 풍경에 눈을 돌린다.

비온 뒤라 일산은 안개로 포장을 한 것 같았다.

대곡역의 넓은 논과 밭을  지날 땐 안개낀 강가를 추억했고,

원당역 배나무 밭 가지가 실내를 장식한 나무처럼 보인다.

지축역은 이름도 생소한 신새벽 간이역 같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포장을 뒤집어쓰고 지하철은 이 모든 역을 잠시 머물러 손님을 내려주고

다음 목적지인 손님을 모두 받아준다.


3호선은 구파발쪽에서 독립문까지의 동네  구석구석을 친절하고 정확하게 들려서는

숨 가쁜 사람도 숨을 돌리게 하고, 느리게 타는 사람도 침착하게 기다려준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선인 지축역을 지나면 두더지가 되어

지하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때문에 책을 많이 볼 수 있는 구간이다.

오른쪽에 오십이 넘은 아줌마는 내가 타기 전부터 성경책을 펼쳐 놓고 있었는데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곁눈질을 해서 보니 주무시는지 입을 합죽하니 다물고 두 눈을 지긋하게 감고 있다.

성경책을 한 장 보고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에 앉은 군인은 알사탕 크기만한 알록달록한 과자를 열심히 먹는데

다리를 얼마나 흔들어대는지 남인 내가 괜히 정신이 산란했다.

과자 먹는 속도와 다리 떠는 속도와 지하철이 빠르게 달려가는 속도와

셋이 다른 곳에서 태어났어도 셋이 다 닮아 있다.


동정을 바라는 손길이 한 명 지나갔지만 아무도 동전 한 닢 주는 사람이 없었다.

물건 파는 사람이 한 명 머물렀다.

충전용 후레쉬였는데 사주는 이 없이 다음 칸으로 건너갔다.

노숙자가 두 명이나 지하철 안에서 겨울 막바지 추위와 겨울 끝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노숙자를 힐끔 쳐다보고 사람들은 노숙자와 멀리 떨어져 서 있게 된다.


1호선으로 갈아탔다.

1호선은 청량리만 지나면 밖으로 싸돌아다닌다.

기찻길 가장자리에 풀이 한 뺨씩 자라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풀 몇 포기를 태어나 처음 본 것처럼 보았다.

봄이 오는 길목에만 들어서면 새로 시작하고 싶은  의미가 부여돼

큰 희망이 없어도 설렌다.

이래서 나는 절망했다가도 다시 일어나 길을 떠나나보다.

서울은 아까까지만 해도 안개가 살다가 내가 오기 직전엔 가벼렸는지 안개가 살지 않았다.

엷은 해 그림자가 기차 길가에 내려 앉아 있었다.


빨간색 잠바를 입고 봉재 선에 빨간색 줄이 들어간 청색 추리닝 바지를 입고

청모자를 쓰고,  봄이 오는 길목으로 가는 중이다.


내가 혼자라고 생각하기 이 전부터 산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봄이 오면 들판이나 산으로 뛰어 올라 가고 싶어 견디질 못한다.

기차 길 가장자리로 올라오는 풀꽃을 보면 무작정 기차를 타고 간이역에 내리면

그리움이라 말하던 대상이 나만을 기다릴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게 된다.


비온 뒤 오늘은 안개가 봄 길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공원엔 산수유 꽃이 입술을 뾰쪽하게 내밀었고,

그 기찻길엔 풀이 한 뼘쯤 올라왔고,

그 산 바위틈엔 하얀 블라우스 입은 너도바람꽃이 살고,

연보라 현호색 꽃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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