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40대 후반의 다른과 선배사원이 친구와 내가 친한 줄 알고 미쓰 박은 언제 결혼했냐?
아직 안했는데요. 그래, 하고는 말이 없었는데 그 후 열흘도 안되어 요즈음은 결혼이 철이 없지만도 그때만 해도 한 여름에는 결혼을 거의 안했는데 7월30일이 결혼한다고 했다.
나는 무슨 결혼을 이 삼복 더위에 하냐 했더니 그렇게 됐다고 해도 나는 눈치를 못 챘는데
그 선배사원이 청첩을 받고 임신한 사실을 내게 알려줬다.
나는 그럴리가 하고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삼복에 하는 이유를 말해줬다.
그해 11월 말경에 딸을 낳았다. 애를 낳고는 사표를 냈다. 처음엔 어른들과 살다가 살림난
신혼집으로 초대해서 갔더니 보통 전세 거나 형편이 안되면 셋방살던 시절,
그 당시에 도심 한복판에 깨끗한 한옥집에 전화, 냉장고가 갖춰어 살아 결혼적령기에
있는 나로서는 부러운 집이였다.
왠지 그 긴 세월동안 연애하고 갖추어 살면서 친구가 얼굴이 밝지를 안했다.
친정보다도 잘 살고 환경이 좋은데 간 친구는 시댁과는 담사이로 쪽문을 내어 한집과
같이 오가면서 산다고 했다. 결혼전 임신을 못마땅이 여기는 시모님은 처음부터 며느리가
맘에 들지를 않아 일일이 간섭을 하고 식모까지도 새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를 않는다는
푸념을 하고 있었다. 가난한 친정이 시어머니 눈밖을 한 몫했다.
그 얼마 후 남편이 서울로 발령이 나서 서울로 이사를 가서 잘 사는 줄을 알았는데
\"나 집 나왔다. \"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얼마 안있어 온 전화다.
아이들을 어쩔려고 \"나는 지금은 내가 사는게 문제다. 의처증이 있어 직장에 갔다오면
어떤 놈과 낮에 있었느냐? 면서 실오리 하나 걸치지 못하도록 벗겨놓고 두들겨 패길래
하루는 문고리를 벗겨 옆방에 사는 신혼부부 자는 방에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고 뛰어 들어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니 옆방에까지는 남편이 따라 오지를 않아 뒷문으로 새댁이 주는 옷가지를 걸치고 어디가더라도 꼭 부쳐 줄테니 차비를 빌려 달라고해서 슬리프를 끌고 택시를 잡으려니 택시도 서지를 않더라는 이야기와 사촌 오빠네 집으로 도망 갔다고 했다.
엄마라고 부르는 딸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100일도 안된 아들은 엄마를 모를거고 딸이 엄마
를 찾는 걸 생각하니 죽어도 들어가야지만 나는 그 길로 죽는다면서 모질게 돌아서려는 친구의 한많은 다짐이였다.
이혼 후 친구는 刻書를 공부해 우리나라 선구자다. 좀더 깊이있는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 대학원을 했다. 25년 동안 刻書공부를 해서 일본에서는 알아주는 작가다.
친구는 목각기능 보유자로 우리나라 중요 무형문화제 刻字履修者다.
일본 조일방송에서도 한일 작가 대표로 출연했다. 지금은 능력을 인정받아 그 분야에 심사위원이다. 일본 인물연감에도 수록이 되었다. 세계 예술가협회 회원이기도 하고 영국 리스공원소장, 불란서 국제미술관에도 작품이 수록되고 중국고궁박물원소장, 미국애틀란트 올림픽에서 한국대표로 기념전에 출품도 했다. 세계 각국 刻字 에서 친구의 작품은 그 분야에서는 세계적이다. 각국에서 초청 되어 간곳만도 수십차례다. 유창한 일어 영어 이혼의 댓가다.
몇번에 방송을 보면서 과연 친구가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저 토록 성공을 할 수 있으려나는 생각도 해봤다. 죽으려고 맘먹던 아픔을 예술로서 승화시켰다.
아이들한테 죄스러움으로 혼자 살기를 고집하다 황혼결혼을 했다.
하얀드레스를 40여년 만에 다시 입었다. 화려한 명성뒤에 숨어있는 외로움이 너무 힘들었다는 친구는 아내와 사별한 남편을 만나 행복해 하고 있다.
지금 남편의 아이들은 다 시집 장가 갔단다. 미국에서 산다는 친딸의 소문을 풍문으로 들었을 뿐 한번도 보지 못한 아이가 40을 헤아린단다. 이성에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아이를 꿈에라도 보고 싶단다. 그 무엇보다도 혼자라는 외로움에 결혼을 하면서 어미기를 영영 포기한 친구가 그리움을 훌훌털고 늘 영원히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장황하게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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