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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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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통


BY 개망초꽃 2007-01-08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고 눈이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나는 이렇게 말을 하고 창건너 풍경만 쳐다보았다.

눈은 바람 따라 사선으로 내리고 있었다.

어제 일기예보를 보니 밤새 눈이 내리고 내일도 눈이 많이 내린다고 했다.

스물한 살에서 서른아홉으로 마흔다섯에서 마흔여섯으로 변했는데

눈이 오면 누군가를 만나 눈 쌓인 오솔길을 걷고 싶고

나뭇가지마다 솜사탕처럼 쌓인 눈을 보며 달콤함에 빠지고 싶다.


수목원으로 향하는 길 따라 펼쳐진 눈은 아름다웠다.

간간히 눈은 그쳤다가 다시 새벽안개처럼 눈은 뿌옇게 내렸다.

연희는 운전을 하면서 저길 봐 산이 환상적이다, 여기 기억나지?

네가 마음에 드는 곳이라 했잖아, 이런 곳에 작은 집짓고 들꽃 키우고 싶다고 했잖아.

그랬었나? 기억이 안개처럼 희뿌옇다.

나는 산이 있고 물이 흐르는 곳이라면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말을 거미줄처럼 붙이고 다녔다.

기억 안 난다고? 연희는 섭섭한지 한 번 더 물어본다.

아…….알겠다, 작은 가게 앞에 사과나무를 보려고 차를 세우고 한참 바라본 적이 있었지?

이제 생각 나냐?

작년에 사과 꽃이 하얗게 핀 걸 보고 사과 꽃이다, 그랬더니 연희가 그 앞에 차를 댔었구나,

맞다. 또 일 년이 흘렀구나.

사과 꽃은 지고 잎이 무럭무럭 자라고 열매가 떨어지고

오늘은 눈을 가지마다 받아  꽃으로 둔갑을 하고 있었다.


수목원 길가 풍경은 한 장 한 장 달력을 넘기는 것 같았다.

청명하게 흐르는 물, 마른 잎에 소복하게 쌓인 눈,

나무 모양 따라 눈은 그림을 그려 놓았다.

온통 하얗지 않은 곳이 없다.

주차장 바닥도 단출한 매점도 화장실 지붕위에도

눈은 자신의 형태를 확연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커피 마시고 싶다.\"

화장실을 들렸다 매점을 쳐다보며 걸었는데

매점 주인아줌마는 샷터 문을 내리고 자물쇠를 잠그고 있었다.

여기 커피 두 잔이요?

네, 프림 설탕 다 넣지요?

아줌마는 급하게 갈색 샷시문을 열고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준다.

내가 그 모습을 보며 안을 기웃거렸더니

과자도 줄까요? 물어본다. 에이스 있어요? 없다고 한다.

나는 에이스가 먹고 싶었다.

스무 살부터 직장을 다닐 때 하루에 두 잔씩 커피를 마시면서 에이스 한 봉지를 먹었었다.

서른아홉 살에도 커피와 에이스를 먹었고,

마흔일곱이 되어 처음으로 눈이 내린 날 커피에 에이스를 찍어 먹고 싶었다.

매점 아줌마는 급하게 자물쇠를 잠그고 샷터문을 화르르 내리고

버스 정거장으로 빠르게 걸어가더니 버스를 타고 이곳을 벗어나 버렸다.

시골이라서 시간 맞춰서 버스를 타려고 급하게 매점 문을 닫았나보다.

어? 설탕을 안 넣었나봐, 연희는 나더러 먹어보라는 표정이다.

프림맛만 진하고 설탕 맛은 전혀 없었다.

아줌마 설탕을 안 넣었어요! 버스 잡어 얼렁, 우리는 커피를 들고 싱겁게 웃었다.

쓴 커피를 몇모금 마시다 눈 위에 동그랗게 부었다.

눈은 커피 빛으로 변하며 빠르게 녹아 내렸다.


연희는 편두통 때문에 힘들어했다.

왼쪽 뇌가 콕콕 쑤신다고 내가 머리를 만져 주려고 했더니 만지면 더 아프다고 그런다.

나도 스무 살부턴가 편두통이 가끔씩 찾아왔었다.

남자 때문에 가슴이 저리면 영락없이 편두통이 동반하곤 했었다.

남자를 만날 때마다 내 인생은 빠르게 변했고, 그럴 때마다 편두통을 알아야했다.

똑같은 부위를 바늘로 몇 초마다 한 번씩 찔러댔다.

그럴 때마다 아! 아아! 머리를 쥐며 앓았고, 하얀 약을 두 알씩 목구멍으로 넘기곤 했다.

슬픈 사랑만큼 찔러댔던 편두통.

연희도 남자 때문에 편두통이 왔다고 했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는 죄, 그것에 동반되는 가슴 저림과 편두통.

나도 남자를 만날 때마다 앞으로 내 인생도 한 바퀴 돌다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겠구나,

하는 달콤하면서도 바늘처럼 따가운 슬픔,

뭐 이런 저런 심란하면서도 유치한 것들을 앓았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 입술이

뜨겁게 키스를 하던 그 입술이

이별을 얘기하는 입술로 바뀌더라고

그 입술이 똑같은 입술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연희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발이 갈 길을 몰라 마구잡이로 흩어지던 하늘,

그 하늘이 보이지 않는 짙은 회색 차의 천장을 보면서 막막하게 말을 했다.


사랑을 시작할 땐 기적같은거야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이지.

이별도 마찬가지더라. 나에겐 일어날 거 같지 않은 이별이 일어나더라고,

사랑은 시작도 끝도 기적 같지.

나는 친구의 손을 잡으며 사랑에 대한 시시콜콜하면서도 통속적이면서도

아주아주 흔하면서도 남들이 다 아는 그렇고 그런 얘기를

눈이 쌓여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쳐다보며 이어갔다.


\"사랑은 감자담은 푸대자루처럼 먹다보면 썪은것만 남는 거야,

쌀자루처럼 맛있게 먹다가도 자루는 미련 없이 버리게 되는 거야.

신발과 똑같다, 알잖아. 신던 신발이 낡아지면 버려버리고

새 신발로 갈아 신고 새 신발이 뒤꿈치를 깨물어도 반창고를 붙여가며 신다보면

그 신발이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또 밑창이 낡아지면 버리고,

사랑이 영원할거라 믿었니?\"

\"이 사랑만은 영원하다고 믿었어…….\"

\"나도 그렇긴 해, 영원한 사랑을 꼭 만날 거라 믿고 있지…….\"


연희는 못다 이룬 사랑을 끌어안고 편두통을 끌어안고 집으로 갔다.


지금도 연희는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문자만 한통 달랑 들어오고

소식이 깜깜하다.


그렇게 마구 흩날리고 아무 곳에나 그득그득 내려앉았던 눈은 거의 다 녹아내렸다.

뜨거운 커피를 동그랗게 뿌렸듯이 커피색으로 변한 눈 찌꺼기들이 길마다 넘실거린다.

소식 없는 연희로 인해 나도 한쪽 머리가 묵직하다.

바늘로 찌르지 않으니까 편두통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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