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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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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치의 겨울 여행


BY 미국이모 2006-12-27

2006년 공식 카렌다에 마침표를 찍던 16.

새벽 네 시 반부터 밤 열 시까지

정말 눈코가 어디 붙었는지 찾아야 할 만큼 바빴다.

크지도 않은 키지만, 몸이 부을 수 있는 365가지 이유를 가진 관계로

단화와 샌들을 주로 신는 내가

5-6cm 족히 되는 하이힐(?)을 신은 것도 모자라 팬티스타킹까지 신고

우왕좌왕, 좌충우돌, 생글생글, 방글방글..

뭐 어째든 마침내 미션을 끝내고 쓰러져 잠든 나는

다음 날 아침 자명종 소리에 시계를 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은 휴가 떠나는 날,

왜 내가 한 해의 공식 일정을 마치고 휴가 떠나는 날 이렇게 괴로운 것일까.

12시간 운전 해 가야 해서? (물론 내가 운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다. 그런 것쯤은 이골이 났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엿새를 운전해서 이곳까지 이사해 온 내가 아닌가

(물론 운전은 김기사가 했지만 ㅋㅋㅋ)

허면 공식행사 덕에 여행준비가 하나도 안된 탓인가?

그도 아니다.

뭐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따라오는 다른 식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

후딱 대충 얼렁뚱땅 해서 출발하면 된다.

그럼 도대체 왜?

 

가끔 너무 찌뿌둥 한 날 스트레칭 좀 하고,

어쩌다 마음 먹으면 삼사일 빠른 걸음으로 산책하다 그만두는 내가

스키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운동

그것도 평지에서 하는 운동이 아니고

미래 지향형 영화에서나 나오는 것 같은 신발을 신고

길쭉한 막대기까지 신발바닥에 붙이고

타고 올라가다 보면 현기증이 나는 리프트에 몸을 맡기고

굳이 산 언덕까지 올라가

그 언덕이 싫은 것도 아니면서

누가 쫓아 오기라도 하는 양 도망쳐 내려와야 하는

해괴한 운동을 하러 가는 것이다.

게다가 본전 찾기에 강한 만능 스포츠맨 남편 눈을 피해

대충 하는 척만 하기는 불가능인지라

타고난 몸치에 드물게 둔한 운동신경을 가진 나로서는

휴가는커녕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기분일 수 밖에.

 

미리 장봐서 넣어 둔 재료들을 꺼내 밑반찬을 만든다.

동시에 브런치로 먹을 식사를 위해 대구지리를 끓이고

가다가 먹을 김밥을 싼다.

식사를 마치고 옷과 스키용품들을 챙기고

어항에 일주일짜리 물고기 밥을 떨궈주고

집안의 모든 문을 점검하고……

키야~ 내가 봐도 준비 실력은 거의 프로 수준이다.

! ! 내가 무슨 몸치야. 이렇게 날래구만.

출발하는 차 안에서 목소리가 커진다.

그래 이 사람아 잘 했네. 귤이나 하나 먹세

? ~ . 거라지 냉장고에 있는데--;;

준비 수준은 프로라며?

원숭이 나무에서 떨어진 걸 가지고 뭘 그리 트집이야 치.

그 원숭이 한번만 더 떨어지면 어디 엉덩이 남아나겠나. 흐흐

자꾸 그러면 가는 내내 자버린다.

그러시게. 자네는 충분히 해 낼 것일세. 그 쪽으로도 프로 아닌가. 하하하

가서도 자식들에게 둔한 운동신경을 전수한 죄 때문에

계속 기죽을 판인데 초반부터 이렇게 깨지다니..

둔한 운동신경의 원조인 친정엄마를 원망하면서 먼 길을 향해 갔다.

프로의 실력으로 가끔 졸아가면서.

 

유타에 도착하니 마침 이틀 전에 30cm가 넘게 눈이 내려 설경이 그만이었다.

낮에는 반팔 입어도 무색하지 않은 우리동네의 심심한 날씨에

억지로 소금 뿌려가며 간 맞춰 살던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눈 오는 날 강아지 모양들이 되었다.

파우더 스노우라서 스키타기에는 최고라지만

도무지 뭉쳐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뭉쳐 던지고

집집 처마의 고드름을 보며 탄성을 지르고

눈에 뒤덮여 은은하지만 오히려 운치 있는 색색의 크리스마스 장식들에 반하고

밤중에 뭐 마려운 강아지들처럼 눈 쌓인 곳을 헤집고 다니는

이 동양인 가족들을 지나가는 차들은 어이없어 했을 것이다.

몰몬교의 본거지인 유타주는 정말 백인 천하였다.

몰에서 한국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 곳에서 사는 우리 식구들은

어찌나 어색하던지 외계인이 된 기분이었다.

(은지님이 이런 기분으로 사시겠구나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첫째 날 스키스쿨을 졸업하더니

다음 날 바로 엄마의 피땀 어린 고지- 중급자 코스에 올랐다.

물론 재방이는 스키스쿨에서 특별한 코멘트를 달고 올라왔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마지막 날 저녁에는 스키를 마치고 바로 시내로 나갔다.

그 유명한 몰몬 테버내클을 보기 위해서..

가장 보고 싶던 곳은 파이프가 만개에 달하는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강당이었으나 

불행히도 공사 중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갔으니,

그저 주변이나 둘러보고

한국에 나와있는 단정한 청년선교사들의 실체나 보리라 하는 마음으로 갔다.

그리고 백 년 전에 공식 폐지 된 일부다처제가

아직도 몇몇 소수에게 묵인되고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동하던 차라

혹시나 부인 두 셋 대동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까 하는 기대감에.

 

막상 도착해서 안내하는 건물로 갔더니

각종 무료 콘서트가 그 백 년도 더 된 고풍스런 건물에서

30-40분 간격으로 돌아가며 진행된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만 아니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피곤한 줄도 모르고

건물 구경도 할 겸 돌아다니며 모든 콘서트를 볼 우리 부부이지만

배고프다는 말을 스테이지 바뀔 때 마다 귀에 속삭여 대는 아이들 덕에

삼십 분만에 빠져 나오고 말았다.

식구들은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장식과

고풍스런 건물이 어우러진 자리에서 찍는 몇 장의 사진에 만족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도무지 그냥 올 수가 없어서

배고픈 아이들의 원성을 들으며 세계 최고 규모의 강당으로 들어갔다.

이만 천 석 플러스 삼백 석의 합창단 석과

백석 이상 족히 될 듯한 강단.

보수 정통 백인 인상의 안내인은 친절하면서도 격식이 있었다.

내일 저녁 몰몬 테버내클 합창단의 정기 연습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자

남편과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정을 하루 늘려서라도 보고 가야 할 것인가 말 것 인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만 너무너무 아쉬운 포기였다.

공연도 아닌 연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든다고 하였다.

아쉬운 발걸음이지만 겨울 정취를 만끽하며 걷는 것으로 대신할 수 밖에.

부인을 두 셋 데리고 다니는 신사는 보지 못했지만

대부분 아이들 넷 정도 데리고 다니는 것은 기본인 듯 했다.

보기 좋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앉아 있는데

한 가족이 들어왔다.

백인 부부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정장차림의 백인 아들과 동양인 아이.

학교에서 콘서트 같은 것을 마치고 오는 듯 했다.

베트남이나 중국계통으로 보이는 그 아이는

우리가족을 한참이나 뒤돌아 보며 자기들 테이블로 갔다.

궂은 일까지도 모두 백인이 하는 그 주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동양인 가족을 만난 반가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유타 같은 곳에서 그런 가족 구성원은 쉽게 분석이 끝난다.

입양 아니면 유학.

 

다음날 남편이 인터넷에서 공부한 몰몬교 창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몇 시간 심심하지 않게 올 수 있었다.

고민이다.

내년에는 테버내클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공연에 맞추어 가자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말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12시간 운전해서 가서는 또 그 해괴한 운동을 하고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근육통에

몇 일을 시달릴 생각을 하니 고민이 될 수 밖에.

하지만 일단 고민은 일년 뒤로 미루고

아름다운 설경의 기억으로 이 심심한 날씨에 소금 쳐가며

이 한 주 동안 한 해를 잘 마무리 해 볼까 한다.

 

ps   어째 오늘은 도통 집중이 안 되는 날입니다.

     덕분에 글이 아주 산만하고 부산스러워 진 것 같습니다.

     글을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왕에 쓴 잡기이니

에세이 방에 얼굴도 들이밀 겸 그냥 올리기로 합니다.

     에세이방 님들은 모두 집중력 있게 한 해를 마무리 하시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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