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병을 않기 시작했지만 아프다고 누워 있을수도 없었고 죽을 정도로 아픈몸이 아니니
조금씩 아픈 허리로 견딘다는 것은 본인만이 느끼는 고통이었다.
그러다 계절이 바뀌고 농사철이 되었다,
처음에 조금씩 아픈것이 별것 아니라 생각했다,그때는 젊음이 보약이었고 오늘의 고단함도
날이 밝어면 거뜬했어니 내가 그렇게 고생할줄 상상도 못했었다.
다시또 들녘이 내 일터가 된것이고 아침에 출근해서 해가 질무렵 퇴근하는 월급도 없고 칭찬도 없는 어떠한 보상도 없는 오로지 눈물만이 내 보상이었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이 있다면 주말에 남편과 함께 들에 있다는것이었다.그리고 위안이 되었고 일이 빨리 끝난다는것 남자의 손길이 여자 손길보담 빠르니.틈틈히 눈치껏 조금 쉬라고 배려해주는 마음이 있었고 어른들 하고만 일을 할때보담은 편했다.
그래도 역시 남편이 지원군이었고 튼튼한 후원자였다.
가끔 주말에 남편과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갈때면 그래보았자 가는곳은 언제나 들판이었지만.자전거 뒤에 앉아 남편의 허리를 꼬옥 안고 가는 길이 잠시 즐겁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려니 꼭 그분을 냉정하고 모진 분으로만 표현하는것 같애서 죄송하고 송구스런 마음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웃음기 없는 차가운 얼굴도 정을 주지않던 그 냉정한 마음도 세월이 흐르니 변하여 지금은 그분께 꼭 필요한 자식이란걸 인정해 주시고 서로를 챙기게 되는 그런 고부 사이이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아파오는 허리병 기껏 할수 있는것이 약국에 가서 진통제 정도 사먹는것뿐이었다그때는 그 분이 무서웠고 감히 그분 앞에서 거역하는 말은 할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 살았는냐고 묻는다면 첯째는 남편의 정이었고 남편의 이해와 정이 없었다면 더욱 견디기 힘들었을것이다.
남편의 친구 .즉 나의 친척이기도 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 두사람다 늣은 결혼이었기에 후딱 결혼을 했는데.남편은 마음이 따뜻하고 날 오히려 가엾다 하였다 .
자기를 만나 고생한다고,그랬기에 내가 참고 견딜수 있는 버팀목이 아니었나 싶다.
둘째는 친정때문이었다.물론 모든 여자들은 내 친정은 그렇지 않은데 하고 자랄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하고 결혼전의 나와 결혼후의 나를 비교 하면서 또한 친정과 시댁을 비교 하기도 하지만, 어중간한 농사꾼 어정쩡한 글쟁이 아버지에 비해 신 여성이셨던 어머니 그래도 동네에서 유지분들이셨고오빠나 형부들 역시 공직에 계시던 분들이라 그 분들의 인격에 손상이 가게 할수 없었고.특히 아버지의 말씀.내가 힘들게 시집살이 하더란 소문을 듣고 나보고 그려셨다.자고로 여자는 출가 외인이다.친정에 와서 시집 흉보지말아라.힘들고 고생스러워도 죽어서도 그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랬다 우리들 부모님들은 딸자식이 한번 시집가면 어떠한 고생도 참지 못하고 친정에 오는것을 하지 못하게 하셨다. 지금이야 그때의 부모님들 하고 생각이 많이 달라지셨고 세상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받이 들일수 있지만.
그래서 고통의 날들이었지만 참고 살았다.고생끝은 있더라고 그렇게 참고 살았기에 지금에는 친척들이나 동네분들에게 인정받고 살고 있다 괜찮은 며느리라고.^&^
점점 더 아픔의 고통이 심해졌다.차츰 식구들에게도 내가 허리때문에 고생을 한다는것을 알게되었고 하지만 그냥 단순한 허리병이라 생각했기에 병원에 가서 검사받을 생각도 하지못했다.그럴만한 경제적 여유가 내게 없었다 내가 13년동안 그분께 남편 월급 고스란히 갔다 드렸다는것 아시는 분은 아실테지만.그래서 내가 검사받을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
허리가 아프다는것은 표면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아니면 그 고통을 모른다.
차츰 세월이 흐르니 나도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는것이다 무작정 월급을 다 갔다 드리니 남편도 용돈을 타서 썼던때다 그래서 돈의 단위를 조금 줄이기로 했다.
가령 백.십 단위는 그냥 드리고 만단위에서 조금씩 떼어쓰기로 그렇게 몟달 지나니 용돈이 조금씩 모이는것이다 결국은 내 약값으로 다 쓰여졌지만.그렇게 라도 하였기에 그분께 말하지않고 약이라도 사먹을수 있었다.
치료약이 아니었고 잠간 아픔의 고통을 멎게 해주는약만 먹어니 허리가 아픈게 아니라 점점 다리쪽으로 내려와 발목 그리고 엄지 발가락 까지 결국은 걸을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때사 심각성을 알게된 가족들 하기사 나도 참 미련스러웠지 아무리 그분에게 말하기가 힘들어도 말을 할걸 하지만 그분얼굴만 보면 찬 바람이 솔솔 흐르니 아프다 말을 할수가 없었다.그때사 남편이 돈을 마련하여 병원가서 검사를 하니 디스크라는데 너무 심각하다고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다고 왜이렇게 되도록 있었는냐고 하는것이다.
오래전 미끄러지면서 그때부터 뼈를 싸고 있는 막이 조금씩 찟어져서지금은 완전히 찢어져 수술을 해야한다는데 수술을 할수가 었었다.지금이야 레이져 나 주사약으로 치료가 되지만.그때는 수술을 하는방법이 낫다고 하던 때다 그리고 입원기간도 길어서 도저히 수술을 할 상항이 아니라서 그때부터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좋다 하는방법 좋다 하는 민간요법 글로써 쓸수 없는 방법까지 해야 했다.여자는 역시 친정이 좋더라 친정이 울타리가 되고 방패막이 되더라 좋다는 약도 해 주고 약해 먹어라고 돈도 보내오고 물론 그분께서도 마음을 써 주셨다.약도 한재 지어 주셨고 하지만 민간 요법으로 해서 먹는 약은 모든걸 내 손으로 해서 먹어야 했고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먹었다.때로는 딸이었다면 무엇이 좋다더라 그 말씀만 하시고 좀 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 악물고 좋다 하는방법 병원 침술 할수 있는것은 해보았다.그때 그렇게 발버둥을 쳐 보았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걸을수 있는것이다.지금도 글을 쓰려니 그때 생각이 나서 가슴이 탁 막히는것 같지만 그러면서 도 왜 이런 글을 쓰려하는지 생각했다.내가 이렇게 당당하고 건강하게 걸을수 있고 발복을 잡고 고통을 못참고 울지 않아도 되었고 좋아 하는 산행을 할수 있었기에 그때 아픔을 못참고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으면 내 이런 건강한 모습으로 있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산행을 할때마다 맑은 하늘을 볼때마다 내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다.그리고 내가 다 나아진 후에 빚갚음 하느라고 고생좀 했씀다.^&^
좋은 글도 아닌걸 보아주셔서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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