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 서른두 살 늦은 나이에 나는 첫아이를 낳았다. 내가 입원한 방은 침대가 세 개였다. 정밀검사 받으러 들어온 새댁이 제일 안쪽 침대를 썼고, 내 옆 침대는 자연분만에 성공해서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여자가 차지했다. 그 여자는 지치지도 않고 자신의 성공담을 떠들어댔다. 아무 문제없던 나는 촉진제를 맞은 것이 잘못되어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됐고, 그 여자는 수술이 아니면 힘들다는 진단까지 받고도 자연분만을 고집해서 성공한 터라 내 심사는 편하지 않았다.
거기다 어찌나 방문객이 많은지 좁은 병실은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두 여자의 친정엄마들은 딸 곁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웃고 떠들었다. 난 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조용히 누워만 있었다.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을걷이 때문에 시어머니는 내가 퇴원하고 나서야 올라올 예정이었다. 형제도 친구도 다 멀리 있었다. 엄마는 일 때문에 올 수 없었다. 딸이 애를 낳았다고 해서 엄마가 일을 쉬면서까지 올라올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다만 우리 사연을 궁금해 하는 주변 사람들 시선이 좀 버거웠다.
남편이 밤낮으로 나를 돌봤다. 얼굴을 닦아주고 밥을 먹여주고 퉁퉁 불은 젖을 마사지하고 유축기로 짜줬다. 남편 손이 있어야 하루 두 번 아이도 볼 수 있고 화장실도 갈 수 있었다. 많이 먹어야 좋다며 남편은 집에 가서 따로 미역국을 끓여오기도 했다. 자상한 남편이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자연 분만한 여자는 곧 퇴원했고 검사가 끝난 새댁도 예정보다 하루 먼저 퇴원했다. 그런데 점심때 그 새댁의 친정엄마가 왔다. 딸이 퇴원한 줄 모르고 점심을 준비해 온 거였다. 그분은 그냥 가져가기도 그러니 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하얀 밥에 호박부침 김 무생채가 다였지만 참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웠다. 몇 번 사양하다가 우리는 빈 침대에 마주앉았다. 병원 밥과는 댈 수도 없었다. 특히 아삭아삭 씹히는 무생채가 꿀맛이었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밥을 먹고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나는 습관처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린 가을하늘 외에 별다른 풍경은 없었다. 문득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었다. 엄마는 음식솜씨가 좋았다. 아까 그 무생채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손맛이 좋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제야 나는 일주일 내내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기다림은 아무 기대 안 하는 마음 뒤에 꼭꼭 숨어 있었던 거다. 끝까지 숨을 수도 있었는데 그놈의 무생채 때문에 들켜버린 것이다.
서러운 마음을 삼키며 나는 생각했다. 만약 동생 일이었다면 엄마는 분명 왔을 거라고. 내 생일은 그냥 지나가도 동생 생일이면 몰래 데리고 나가 자장면을 사준다는 걸 알고부터 나는 동생과 똑같이 대접받기를 단념했다. 엄마한테 나와 동생은 의미가 다른 존재라는 사실만 인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거의 못 싸간 도시락을 동생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을 때도, 내가 혼자 살 때는 내버려뒀다가 동생이 내 자취방에 합류했을 때는 수시로 김치며 마른반찬을 올려 보내줬을 때도 나는 항상 태연해지려고 애썼다.
내가 엄마를 처음 만난 건 열 살 때다. 하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엄마는 나를 보고 웃었다. 한 손에는 수박을 들고 있었다. 당시 삼십대 중반이었을 엄마 얼굴은 곱고 생기가 넘쳤다. 나는 뚱하니 엄마를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못했다. 새엄마가 처음은 아니었다. 여덟 살 때 친엄마가 돌아가시자 어떤 여자가 와서 잠깐 엄마 노릇을 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밥도 제때 안 해주고 놀러만 다니더니 결국 아버지한테 쫓겨났다. 그 다음에 온 사람이 지금의 엄마였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엄마를 패기 시작했다. 밤마다 엄마는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저러다 엄마가 죽지나 않나 싶어 나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오빠들은 무슨 심술에선지 모른 척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몰래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가 엄마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패대기치고 있었다. 그날의 섬뜩한 기억은 30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뒤로도 아버지는 수없이 엄마를 때렸지만 처음 본 그 장면이 화석처럼 내 머릿속에 박혀버린 것이다.
부잣집 맏이로 태어난 아버지는 마흔이 될 때까지 화려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친엄마마저 세상을 뜨자 아버지의 정신적 기반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물려받은 논밭을 처분해서 사업과 실패를 반복하더니 새엄마가 들어올 즈음에는 결국 빈털터리가 됐다. 이제 아버지의 유일한 낙은 술에 취해 지난 얘기를 녹음기처럼 읊어대는 것뿐이었다. 동네에서 머슴을 부릴 만큼 부자였고 젊어서부터 이장을 지냈고 고등교육을 받은 것이 아버지로선 큰 자랑이었다. 하지만 맨 정신으로 돌아오면 현실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걸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물처럼 술을 마셨고 동네북처럼 엄마를 때렸다.
생기 넘치던 엄마의 얼굴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엄마의 새 출발은 화약을 지고 불길에 뛰어든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엄마가 끝내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자주 보따리를 싸기는 했지만 일주일이나 열흘 후면 엄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어린 동생이 목에 걸렸을 것이고 술만 깨면 멀쩡해져서 뉘우치는 아버지가 불쌍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내 눈에는 매번 불길 속으로 되돌아오는 엄마가 어리석게만 보였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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