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는 의자의 주인은 나뭇잎입니다.
나뭇잎은 세월에 못 이겨 땅으로 내려앉았습니다.
한 낮 공원길로 지나가는 길손은 나이든 아주머니나 할머니뿐입니다.
그 길을 가르며 가을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늘이 시월의 마지막인가? 하루 더 남았구나, 날짜를 떠올립니다.
행단보도에 서서 맞은편 신호등을 스쳐 가로수를 봅니다.
어떤 나무는 잎이 말라 앙상한데,
어떤 나무는 내 바지처럼 초록바지를 벗지 못하고 있군요.
내가 탈 버스색은 밝은 초록색입니다.
저기, 저 사거리에 멀리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촌스럽게 밝은 초록색인데다가
써 갖고 다니는 번호판은 빨간색입니다.
촌스러울 때로 촌스럽게 생겼으면 어떻습니까
제 시간에 와서 나를 냉큼 실고 목적지까지 바래다주니 귀엽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도시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마을버스는 값도 싸고 언제나 비어 있는 의자가 많습니다.
나는 의자의 주인이 되어 나뭇잎처럼 철푸덕 편하게 앉습니다.
창가까이 앉아 뒷골목의 가을을 봅니다.
그리고 그 으쓱한 가을에 빠져 핸드폰을 꺼내 친구에게 문자를 넣습니다.
‘벌써 늦가을......가을이 익었어. 우리도 익어가고 있구나.’
종점으로 갈수록 버스의자는 비울대로 비워버립니다.
비운만큼 채워진다는 걸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살다보니 알게 된 거겠지요.
내가 내릴 곳은 종점을 한정거장 남겨둔 정거장입니다.
이 정거장엔 여느 정거장과 같은 풍경입니다.
떡볶이 포장마차위에 나뭇잎이 무늬를 놓고, 과일트럭이 가을을 한 바구니씩 담아 놓았네요.
금을 그어 간이 주차장을 만들어 놓고,
주차비 받는 아저씨가 자전거로 가을을 밟고 어슬렁거립니다.
인도와 아파트 사이엔 적당한 크기와 적당히 생긴 돌덩이로 경계선을 표시해 놓았는데
그 틈 사이로 풀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습니다.
노란 풀꽃, 무슨 꽃인가 알고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들빼기인 것 같습니다.
몇 걸음 더 걸어가니 돌덩이 위에 감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꼭지가 달린 작고 동글동글한 감,
누군가 가을을 손에 쥐고 싶어 감을 따서 가지고 놀다가 두고 갔나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보라고 두고 갔나봅니다.
어쩌면 미안해서, 어쩌면 혼자 보기 아까우니까 같이 보고 느끼고 싶었나봅니다.
가을엔 편지가 쓰고 싶다고 노래 불러봅니다.
가을엔 그립다고 전화를 걸어 봅니다.
‘가을엔……. 있잖아, 가을엔…….슬퍼 진다해도 이루지 못한다 해도…….보고 싶어…….’
컴퓨터 선생님은 열의가 대단합니다.
선생님만 보면 여고시절 부기 선생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공부를 소홀히 하거나 놀기만 좋아하고 철없이 굴기만 하면
담임을 맡지 않은 우리교실까지 오셔서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공부할 때 공부해야한다. 나중에 후회한다.
지금 하기 싫다고 포기하지 말아라.
앞으로 얼마든지 즐기며 놀 시간은 많다. 공부도 때가 있단다. “
‘자기네 반 얘들한테나 잔소리 하지, 우리가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람. 흥~~’
사회생활을 하면서 후회를 했습니다.
공부할 때 공부를 열심히 할 걸 많이많이 후회했습니다.
몇 년 뒤 학교에서 동창회를 했습니다.
나뿐만 아니고 같이 졸업했던 학생들 모두 부기 선생님을 제일 보고 싶어 했습니다.
선생님을 보고 반가워 팔짱을 끼고, 선생님 주변에 모여 웃고 얘기하고…….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또 몇 년이 흘러가도 여고친구들을 만나면 서로 부기 선생님 안부를 묻곤 했었고,
이십년이 흐른 뒤 선생님 안부를 물으니
간암으로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마른 체형에 유난히 까맣던 얼굴, 교실 밖으로 새어 나가도록 짜랑짜랑 했던 목소리,
쉬는 시간까지 공부를 가르치셨고 한 시간도 소홀하지 않았던 열정.
우리의 앞날까지 걱정해주시며 안타까워 하셨던 스승의 마음.
컴퓨터 선생님이 여고시절 부기 선생님의 열정과 닮아 있습니다.
교실 밖에까지 들리는 목소리, 쉬는 시간도 끝내고 싶지 않은 열의,
자격증을 따게 해 주려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신경을 써 주시는 모습.
느티나무 잎이 감처럼 익을 대로 익었습니다.
은행잎이 모과처럼 익을 대로 익었습니다.
벚나무 잎이 애기사과처럼 빨갛게 익었습니다.
예쁘고 예쁜 시월도 익을만큼 익어 떨어지려합니다.
나뭇잎이 의자의 주인으로 앉아 있습니다.
나를 얼른 내려놓고 빈 버스는 종점을 향해 좌회전을 합니다.
시월은 종점에 방금 도착했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