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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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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비밀이야.


BY 선물 2006-09-25

 

오늘 저녁은 남편과 외식약속이 되어있다. 우리의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이다.

근사한 불란서 레스토랑에서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백포도주를 곁들인 멋진 식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 한편을 보고나면 결혼 전 즐겨 다니던 강남의 어느 커피숍에서 차를 함께 마실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이 설레고 행복하다.


깨몽! 깨몽!!!!


나를 깨우는 소리. 꿈에서 깨라고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그건 꿈이야.

그런 나의 현실은?


9월 25일. 아직 얼마간의 시간은 남아있지만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 되리라 짐작된다.

사실 위에 올린 꿈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렇게 하자고 해도 내가 거부할 것이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 부담 없이  그럴게 할 수 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현실로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이벤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89년 결혼을 하고 17번째 맞는 결혼기념일.

한 두 번은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하고 그러긴 했었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이다.


오늘 아무도 결혼의 기역 자도 꺼내지 않는다.

우리 어머님은 내 여동생 생일까지도 기억하시는 기억력에 관한한, 컴퓨터이시다.

언제 일산에 이사 왔는지, 10년 전 일본 다녀오신 날짜가 언제인지도 기억하신다.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와도 되실 분이다.

그러나 오늘 한 말씀도 꺼내지 않으신다.


남편은 오늘 아마 여러 문자를 받았을 것이다.

각종 카드 사에서 결혼기념일이면 문자로 알려준다.

그런데도 여태 결혼의 기역자도 꺼내지 않는다.


나또한 아무런 기색도 비추질 않는다.


어머님은 해마다 이 날이면 짜장면이라도 사 먹어라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 온 가족이 함께 나가서 외식하는 쪽을 택했다.

그것이 맘 편했기 때문이다.

남편도 하다못해 한권의 책이라도 선물해주곤 했었다.

나는 한 권의 책이라도 고맙게 받았고 행복해 할 줄 알았다.


따로 살림을 나서 사는 며느리라면 사실 이런 날이 그리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부모님과 거의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나로서는 이런 때 바람 쏘이고 싶다는 욕심이 조금 생기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남편과의 단 둘만의 외출을 자제해 왔다.

만약 아무도 아는 체 않고 지나갔다면 심술이 났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것이 아니기에 나름대로 감사한 맘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가 않다.

모두들 알고 있을 터이나 너무도 잠잠하다.

그럼 오늘은 내가 섭섭해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난 묘한 기분이다.


어머님은 여러 상황 상 우리가 좋은 시간을 갖지도 못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아무런 말씀도 못 꺼내시는 것이리라.

남편은 어쩜 저녁에 씩 웃으며 또 책이라도 한권 줄지도 모를 일이다.

아,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란 생각이 이번엔 지배적이다.


그보단 무엇보다 우선 내 맘이······. 야릇하다.

어머님이 아는 체 하시지 말았으면, 남편도 끝까지 시치미 떼고 지나가 주었으면 하는 맘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모른 척 지나가고 흘려보냈으면 좋겠다.

까짓 이런 날이 모슨 대수라고 굳이 챙기고 자시고 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은 적어도 그렇게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그럴 틈이 없잖아.


괜히 겁난다.

이젠 남편이 아는 척 하면 울 것 같다.

여보, 그런 거 이제 정말 나 완전히 잊을게.

맘 쓰지 말고 그냥 지나가. 제발 모른 척 지나가.

그래야 내가 덜 초라해.

 

앗,어떡해. 이번엔 우리 결혼기념일도 잊고 그냥 지나갔네.

그 편이 훨씬 좋아.


나중에 나중에 정말 한참 지난 후에 우리 결혼을 서로가 흐뭇하게 되새길 수 있을 그 날에 그 때 우리 맘껏 축하하자구.


그래서 오늘 만큼은 우리 서로에게 쉿! 비밀이야.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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