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봉식씨와 결혼말이 오갈때 작은오빠는 군대를 제대하고 나와서 우선 급하게
일을 찾아 들어간 인천시 동암에 있는 어느 택시회사의 운전기사였다.
그것도 군에서 운전병으로 복무중에 알게 된 한 인심 후한 친구가 전역하고
나와서 먼저 택시기사로 뛰는 덕에 오빠도 덩달아 스피아 기사자리를 하나 얻어
돈벌일 하게 됬던 것이다.
나와 딱 3년 터울인 작은오빤 나와는 달리 어려서부터도 머리가 총명했고 반듯했던
때문인지 가정내에서는 몰론이고 동네서고 학교에서고 유독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랐다.
시험때면 문제집이 새카맣도록 공부도 잘하는데다가 길에서 웃어른을 뵈도 늘
살갑게 웃는 자상한 얼굴로 인살하고 게다가 악기도 잘 다루어서 오빠는 곧 잘
전교생들 앞에서 발표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동생인 내게도 오빤 생각이나 행동거지 등등 모든게 좋게
보였던지 오빠가 말하는건 모두가 합법적이며 모두가 철학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아버지가 숙부의 말을 듣고 서울로 땅을 몽땅 팔아 올렸을때
작은집에서 한의학공부를 하던 큰오빠나 언니들은 이미 다 컷지만, 아래로 모조리
세살 터울이 나는 작은오빠부터 나 그리고 남동생까지 셋은 한참 공부할 나이에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대세를 격게 되었던것이다.
게다가 면에서 유지소리를 듣고 호인으로 정평이 나 있던 아버진 이미 칠순을 바라보는
보잘 것 없는 병들은 늙은이 신세였으니 그 누구도 우리 삼남매를 지켜 봐 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하여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좋은환경에서 성장하다가 한참 사춘기로 접어든 나이에
집안이 망했다는 주변사람들의 시선아닌 시선과 소문들을 다 보고 격어야 했으니..
차분하고 어느상황에도 정결을 그대로 유지하시는 어머니가 계셨슴에도 생각이 깊었던
오빠는 고등학교에서 잠깐 방황을 했던모양이다.
대입 앞두고 성적이 떨어지던 상태에서 무조껀 학비가 저렴한 서울대를 가겠다고
넣었다가 단번에 낙방했다. 그리곤 재수하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마다하고 군입댈 한것이다.
오빠가 복무했던 부대는 경기도 양평에서 한참 들어가는 곳에 있었다.
첫 면회를 간다고 작은언니와 시외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어렵게 어렵게 찾아갔더니
세상에서 제일 잘난줄 알았던 오빠가 발가벗고 훈련받다가 새카만 쫄병의 얼굴로 허둥대고
뛰어나오는데 너무 빈곤하고 초라한 모습에 그만 눈물을 줄줄 흘렸던 생각이 난다.
그후 오빠는 전역하자마자 택시회사에 들어가 스피아 기사로 뛰면서 생계를 꾸려가면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그때부터 공무원이 되었다.
오빤 공무원이 되고나서도 매년 승급시험에 밤샘 공부를 하더니만 지금은 담당관서에서
최고자리인 서장자리에 올라 현재 기사 딸린 관용차를 타고 출퇴근하며
아래 사람들을 진두지휘 하고 있다.
오빠가 저쪽집에서 자꾸만 결혼날자를 재촉한다는 말에 봉식씨를 한번 만나보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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