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읽기를 즐겨하면 삶도
소설같이 살아진다던가
아이들과 성로원 영아원에서 지낼 때다
때는 81년 여름이었던가
딸 혜진이 등에 업고
저녁 반찬으로 감자를 깎고 있는데
(매 끼마다 감자 한말씩 깎고 김치는 일주일에 한 접씩 담궜다 )
보모 장 인 전옥자씨가 웃으며 오더니
\"아줌마 3층 강당에 영화촬영 하러 오는데 구경 하러가지? 한다
내가 시골서 왔으니 그런 구경을 어디서 했겠는가
그 시절에는 더욱이나 ..
..
전옥자씨가 큰맘먹고 날 일에서 잠시 놓여나 멋진 구경 좀 하라고 해주니
얼마나 좋던지 ..
땀에 절어 등에서 고개를 늘어뜨리고 자는
아이를 업은 채
내 꼬라지도 거지 중에 상거지 꼴을 해 가지고도
젊고 어린 맘에 그저 구경이라니 좋아서
헐레벌떡 3층으로 올라 가보니
보모 몇과 배우들,
엑스트라 와 감독
이런 사람들이
벌써 촬영에 들어가고 있는 중이였다
영화 제목은 어둠의 자식들.
주연 나영희 감독 이장호
엑스트라는 우리 보모들,
극 내용은 박원숙이 사창가에서 낳은 사생아를 우리 고아원에
맡겨서 보모가 돌보는데
나영희가 죽은 박원숙이 대신해서
찾아와 원장 역인 중년 배우와
대화 몇 토막 나누는 장면이 그 날 촬영 전부다
너무나 젊었던 이장호 감독
요즘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 분을 TV에서 보노라면
그 날 그 여름 오후
후텁지근한 3층 강당의 열기가 다시금
내 몸을 근질 오싹 하게 만든다
젊고 패기 만만하고 눈빛이 빛나던.그 분
작은 체구지만 탄력 있고 근육질인 몸 하며
참말로
젊은 이십대 생과부 심장을 벌떡 벌떡 뛰게 맹글고
오줌이라도 지리는 느낌으로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던
그 터프한 동작 동작들 ..
거침없이 중년 배우 사내에게
독설을 뱉고도
무표정으로 외치던 레디 고! 소리
난 촬영 내용이나 여배우 나영희씨 얼굴이나
뭐 대사나 그 딴 거 다 아랑곳없이
오직 이장호 감독에게 혼을 빼앗긴 채
온전히 나를 잊었던 순간이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고
나와 다른 대단한 사람이라도
그도 사람인지라 누가 자기를 오랜 시간 동안
구멍이 나도록 쳐다본다는 걸 알았는지
어쩌다 한번 힐끗 쳐다보는데 아! 그 눈빛! 이라니 ..
불같이 이글거리는 젊은 감독의 눈길을
정면으로 받은 난 인어공주처럼 파도로 변하던가
한줌 연기처럼 사르르 전신이 해체 되어 버린 느낌 바로 그것이었지 싶다
대사 몇 마디가 다인
촬영이 두시간여의 시간을 끌다 드디어 끝나고
딸 데뷔작에 자랑스레 따라온
나영희씨 어머니가
나와 보모들한테 인사 일일이
하고 돌아가고 난 뒤에야
난 영아원 입구에 세워둔 큰 전신 거울에서 내 모습을
봤다
땀에 절어 헝클어진 파마 기 없는 생 머리를
뒤로 아무렇게나 꿍처 틀어 올려 검은 철사 핀꼿고
야윈 어깨엔 영아원에서 얻어 걸친 늘어진 티 쪼가리
퉁퉁 불어 축 처진 젖퉁이에다
등에 업힌 아이의 야윈 팔 다리
때에 절고 보풀이 휴지처럼 허옇게 붙은 여름 포대기
내 비닐 슬리퍼 하하 ~
그 꼴을 해 가지고도 남자에게 혼을 빼앗기다니
장장 두 시간 동안이나 말이다
그 날부터
난 밤마다 소설을 썼다 상상 속 그 분과의 사랑을
백 여명의 영아원 식구들 밥을 해대고
늦은 시간
내 자는 골방으로 돌아오면
전신은 육탈이 될 정도로 초죽음이 되건만
이장호 감독 그 분 생각만 떠올리면
희한하게도 곤하지 않고 비참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으니 어찌 소설을 아니 쓰고 배기랴
내 인생에 있어 어둠이었든 그 시절에
무엇이든 희망의 끈 마음의 끈이 절실히 필요했었기도 하던
시기여서 일까
어느 날
영화 관람권이 서너 장 원장님 앞으로 왔다면서
전옥자씨가 나와 보모 몇이서
을지로 명보극장으로 가서 구경하고 오랬다
저녁 일을 마치고 아이를 들쳐업고
보모들과 구경갔었다
영화 어둠의 자식들 ..
아무튼 그 해 여름은 택도 없는 짝사랑 핑계로
그 지겨운 한 계절을
버텨냈던 것 같다
자나깨나 그 분 생각만 하고
감자를 깎으면서도 소설을 쓰고
김치를 치댈 때도 그 사람 생각으로 억지 힘을 돋우고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
그리고 몇 년 뒤 그 곳을 나와서
다시 힘겹게 살아가는 중에도 꼭 누굴 마음 속에 사랑을 해야
살아갈 자신이 생기는 병 아닌 병 버릇이 붙었다
하다 못해 감기가 걸려 병원에 가면
다정하게 대해주는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도
그만 뿅 가설랑
나 혼자 사랑에 잠겨버리는
이상한 체질 독특한 취향으로까지 변해버렸으니 ..
오래 산 지금도 그 병이 자주? 도진다 여태도 .. 쩝
요즘
나영희씨 드라마에 나오던데 데뷔 적 모습이나
별반 변한게 없더라
성로원 영아원에서 지낼 때
어떡하면 이 세월을 견딜까 뭔 낙으로 살까 고심하다
짬 틈틈이
수필 하나 써서
당시 주부생활 산문 부에 냈더니 뽑혔더라
뽑아주고 평해준 분이
젊은 느티나무 쓴 작가 강신재 님이셨다
당시 내 참담했던 심정과
고난의 일상 속에 그 일이야말로 참으로 크나큰 기쁨과
자신감 회복에도 일조한 일이기도 하였고 ..
요새 와서 ..쬐끔 그리워 진다
아주 쬐끔만 ..........
오늘 괜히 사랑이 그리운 날
눈물과 한숨의 세월을 더듬고 캐내어 짝사랑하나 찾아보았네
이제
서랍 닫고 점심이나 한 술 떠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