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0월중순
생애 최초로 시작한 배낭여행이
1주일을 넘어서고 있었다.
1주일이 지나자
초보여행자로서의
어리버리함을 벗어버리고
여행의 요령을 터득해나갔다.
그간 나는 북극권이 시작되는
핀란드 최북단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북극권 최대의 아름다움
오로라를 보고싶었으나
날씨가 좋지않아
2박3일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로라를 보지 못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중부유럽으로 오기위해
덴마크에서 기차를 탔다.
저녁늦게 기차를 타고
중부유럽의 북문 함부르그로 오기 위해서였다.
저녁답에 기차를 타고 한참을 자다 깼는데
이 무슨 변고인가,
기차안이 어둑신한데
움직여야할 기차가 멈춰있었다.
혹 기차가 굴속에 들어갔나 하여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기차는 동상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
눈꼽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내 앞에서 쓱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알고보니 내 앞에 앉은 남자가
말똥말똥하니 깨어
연필로 뭘 열심히 그려댄다.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물어보았다.
“기차가 배안으로 들어왔거든.
우린 지금 배안에 있는거야.”
그렇다.
덴마크에서 중부유럽으로 가기 위해선
북해를 지나야 한다.
기차가 바다를 건널 순 없으니
기차를 실은 배가 바다를 건너는 거다.
나는 잠이 싹 달아나고
앗싸한 마음이 되었다.
야호, 기차가 배속으로 들어갔다!
“야, 우리 밖에 나가서 바다구경하자.”
그랬더니
그 그림그리던 녀석이
스케치북과 연필을 놓고
나를 쭐레쭐레 따라온다.
우리는 갑판으로 나갔다.
통성명을 하고
어느나라에서 왔는지 몇 살인지,
뭐하는 사람인지,
여행지에서 으레하는 대화를 늘어놓았다.
녀석은 터키계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미술전공이다.
이 기차를 타고 직행으로 파리로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단다.
녀석은 수줍음이 많아
내가 묻는말에만 대답한다.
밤하늘을 보니
이렇게 많은 별이 주르르 얽어지지도 않고
하늘에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내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반짝 반짝 작은별’이 나왔다.
그러니 녀석도 영어로
‘twinkle twinkle little star\'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 노래쯤은 나도 영어로 알기에
함께 영어로 반짝 반짝 작은별을 불렀다.
나는 아름다운 밤하늘에 취하여 유치를 좀 부렸다.
나는 내가 이 외에도
영어노래 몇 개 더 안다며
ABC송을 불렀고
중학교 1학년때 배운 요일송인
\'Sunday Monday Tuesday\'를 불렀다.
그 넓은 북해에는 우리말곤 깨어있는 것이 없었다.
밤하늘은 맑았고
소주가 있었다면
병나발을 불고싶은
그런 밤이었다.
들어와서 한숨 더 잤는데
일어나보니 벌써 함부르그에 도착했다.
그때가 새벽 3시도 안된 시각이었다.
그 그림그리는 녀석과 작별을 하고
나는 함부르그에 내렸다.
역에는 문을 연 식당도, 술집도 없었다.
하차한 승객들은
삼삼오오 짝을지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그 큰 역사에 홀로남게 되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문닫은 쇼윈도를 구경하다
나는 호젓한 계단을 발견했다.
기차역에서 3시간넘게 기다려야하니 나는
그 호젓한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3시간을 자기로 했다.
드레스덴행 기차가 오는 새벽 6시까지.
그때는 몰랐다.
내가 이 도시에 시집와
평생을 살게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로부터 5년 후에
나는 함부르그로 시집왔다.
어느날 남편과 함부르그 중앙역에 갔다가
내가 11년전에 쭈그리고 앉아 3시간을 잤던
그 호젓한 계단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 좁은 계단에 이렇게 앉아서 잤노라고
남편에게 보여주기까지 했었다.
그때 내가 내 운명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그로부터 5년후
함부르그 시민과
결혼하게될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그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잠을 청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남편이 자고있는 집으로
문을 빵 차고 호기있게 들어가
말했을 수도 있다.
‘어이, 당신 말이야.
5년 후에 나랑 결혼하게 되거든?
그러니 긴 여행에 지친 내게
그 침대를 좀 내줘.
평생을 편하게 살고싶다면 말이야.’
나는 남편이 살았던 함부르그에
배낭여행중이었던 1995년 10월말에 잠시 들렀다.
그때 우린 만나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딱 1년후,
우린 만나게 된다.
나의 나라 대한민국도 아닌,
남편의 나라 독일도 아닌
중국에서.
뜬금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