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집에서 못쓰는 책이며...신문이며...알아서
3키로그램을 가지고 오도록...종례 끝!\"
\'가방도 무거운데 거기다가 폐휴지를 3키로나.... \'
언덕위의 하얀집이던 우리학교는 언덕배기에 있던터라
교실까지 올라가려면 숨이 턱까지 턱턱 막혀올 정도인데 폐휴지를 가지고
가는 날이면 등줄기까지 땀이 송글송글 맺힐정도이다.
\'이쯤이면 3키로는 거뜬할꺼야....\'
반장은 열심히 출석부에 가지고온 것을 눈으로 힐끔힐끔 보면서
체크를 해나갔고 복도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과 함께 아이들은 우르르 화장실로 몰려든다.
\'어머....저건...이를 어쩌지...\'
순간 달려가던 발검음이 주춤주춤 멈칫하면서 난 누군가를 발견하는순간
당황하여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복도에서는 젊은 한쌍의 부부가 열심히 폐휴지를 노끈으로 묶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이마에는 어느덧 송글 송글 땀이 맺혀있었고 그 손놀림이
어디선가 많이 봐왔던 손놀림이었던 것이다.
곁에 있는 부인은 조용히 남편일을 보조해 주고 있었다.
화장실앞에서 혹시라고 눈이 마주칠까봐서 살금살금 빠져나온나는
폐휴지를 묶고 있는 손으로 슬쩍 시선이 집중 되었다.
\'아.....저 오른쪽 손....어디서 많이 본 손인데..\'
난 반가운 마음에 아는체를 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몸은 이미 교실쪽으로 숨긴 뒤였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몇해전 우리집에서 2년간 농사일을 돌봐주던 오빠였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신지라 농사일을 하지 못하셨다.
딱히 공무원이라서 못하셨기도 하지만 워낙 몸이 약하신지라 삽질만하셔도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실 정도로 약골이셨다
엄마와 할머니 두분이 많은 농사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겨운일인지라
아버지를 대신해서 농사일을 맡아줄 사람을 집에 상주시키면서 도움을 받아야 했던것이다.
농사일이 끝나는 농한기에 일년치 연봉을 주고 다음해에 일할 사람을
농사철이 되기 전에 들였다.
봄방학이 시작될 무렵....
그날도 수원에 사시는 고모가 일년간 일할 사람을 데리고 오셨다.
저녁상이 차려지고 우리식구와 함께 식사를 하며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험한 시골의 농사일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사람인데 어떻게 데리고 오셨을까
나이도 어려보이고......20살정도 될까 말까 한 나이인데
무슨 사연이 있길래.....마음이 울적해 졌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우린 아저씨보다는 오빠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로 했다.
더욱 마음을 찡하게 했던건 밥을 먹을때 보였던 오빠의 오른쪽 손이였다
손가락이 몇개 없었던 것이었다.
어렵사리 숫가락질과 젓가락질을 하던 불완전한 손...
그래도 고모가 일은 잘하니 일년간 일을 시켜보라고 하시면서 가셨다
오빠는 일도 열심히 했을 뿐더러 엄마 아버지 할머니한테도 깍듯했다.
농사일도 척척 잘 해냈고 가을이 되면 산자락에서 주머니가득 밤을 주워와서는
군불을 땠던 아궁이에다 구어서 우리 형제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썰매도 어렵사리 만들어줘서 추운겨울 추운지도 모르고 얼음을 지치게 해주었고
여름철이면 개울가에서 양동이 가득 송사리도 잡아다가
찌게도 끓여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 00이 참 일 잘하네....\"
항상 할머니는 오빠를 칭찬하셨고 엄마는 한식구같이 대해주니 오빠도 성실히 일에 가속을 붙혀나갔다
세월이 흘러 오빠는 우리집을 떠났고....
그 오빠가 지금 복도에서 폐휴지를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을 했구나....참 잘 되었네...행복해 보이는걸...엄마가 항상 걱정했는데
우리집 나가서도 잘 살아야 되는데 ..하시면서...\'
근데 난....차마 그 오빠한테 달려가서 아는채를 못하고 몸을 숨겨버린것이었다.
당시 한참 사춘기였던 난 친구들 앞에서 그 오빠를 아는척 한다는 사실이 왠지 창피하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던 것이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난 수업시간 내내 그 오빠 생각으로 선생님 말씀이
집중이 되질 않았다.
\'오빠 그때 우리집에서 아버지 대신 일을 해주어서 너무 고마웠고,
밤도 따서 구워줘서 고마웠고, 가방 무겁다고 지게에 걸어주어서 고마웠고,
달구지도 태워줘서 고마웠었는데 그런 고맙다는 말도 못했는데 어느날 떠나버린 오빠를 보고 무척이나 섭섭했어\'
남들보다 손가락 몇개가 없는 조금은 불편한 상황에서도 주어진 일을 깔끔하고
성실하게 했던 오빠
어느덧 세월은 흘러 오십을 바라볼 나이가 되었을텐데
오늘도 어딘가의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살고있을거라 생각이 드는 오빠에게
그당시 비겁하게도 그냥 모른척해 버린것이 못내 맘에 걸려 지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에 이 글을 써봅니다.
친정집엔 아직도 그 오빠가 쓰던 방이 주인을 잃은채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 오빠는 젊은 시절 나름대로 그 방에서
젊음의 고뇌와 삶의 고뇌와 싸우면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었겠지...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