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거실에 앉아있다.
작년에 수퍼마켓에서 4천원주고 산
10장의 유럽지도를 펼쳐놓고.
간밤에 혼자 앉아 이것들을 이리 저리 맞춰보며
올 여름에는 또 어디로 떠나야 할까 궁리중이다.
올 여름휴가는 우리에게 특별한 휴가가 될 것이다.
작년에 우리 부부 둘다 늦깍이 운전면허를 땄고
소형차나마 자동차를 샀기 때문이다.
그 차를 몰고 올 여름 우리는
그간 숙원이었던 낯선 나라를 돌며 캠핑을 할 것이다.
텐트와 슬리핑백도 샀다.
비키니도 샀다.
네비게이터도 빌리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어디로 떠날 것인가.
남편은 작년 여름에 갔던
파리 근처 노르망디 해협으로 가서
홍합을 따고싶어했다.
7월은 홍합의 계절이 아니므로,
나는 그의 의견을 묵살했다.
낭만적인 이태리는 어떨까?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리플리 배경이 되었던 나라 이태리.
그 영화에서 부자인 디키 그린리브와
그의 부를 사랑하는 톰 리플리가 여행했던 코스인
몬지, 산레모, 로마를 따라가는 것은 얼마나 멋질까.
그중에서도 디키가 살았던 조그만 시골마을인
‘몬지’는 옛날부터 꼭 가고싶었던 곳이었다.
내가 여행코스와 영화를 결부시키자
남편은 그러면 자기는 동유럽인 슬로바키아엘 가겠단다.
타란티노가 제작한 신작 ‘호스텔’의 배경이 됐던 곳이었으므로.
이 영화는 암스텔담을 여행하는 미국인 남자 3명이
거기서 만난 묘령의 남자로부터
슬로바키아의 한 멋진 도시를 소개받으면서
일어나는 잔혹한 일을 그렸다.
그 도시는 남자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섹시한 여자들이 수두룩하며
술과 섹스가 넘치는 곳이라는 말에 혹해
무작정 슬로바키아로 떠난 세 남자.
그들은 인간도살자들에게 잡혀 둘은 도살되고
하나는 가까스로 빠져나온다는 스토리다.
피는 기본적으로 많이 튀긴다.
눈알이 뽑히고,
머리가 잘리고,
사지가 절단되어
불구덩이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영화를 많이 봤다해도
이렇게 잔혹한 영화는 처음이었다.
그는 그 피튀기는 영화의 배경이 된 곳,
슬로바키아로 가서 그 호스텔을 보고싶어했다.
말이야 호스텔을 보고싶다지만
거기에 진짜로 섹시한 여자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닐지.
우리는 프랑스냐 이태리냐 슬로바키아냐를 두고
얘기를 거듭하던 끝에
일단 이 모든 것을 무효화했다.
이 여름에 프랑스나 이태리나 슬로바키아를 가기에
우리 자동차는 역부족이기때문.
자동차로 최소 30에서 40시간이 걸릴텐데
우리 차는 일단 소형차인데다
에어콘이 없다.
그걸 타고 30시간동안 30도가 넘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간
길에서 늘어진 엿가락이 되기 십상이다.
계속해서 후보지를 고르던 중
한 곳에 눈길이 딱!
고정되었다.
폴란드 북부 발틱해에 접한 그단스크.
단찌히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함부르그에서 딱 12시간밖에 안걸리고
바다도 있으며
날씨도 서늘하다.
이정도라면 현실성이 있다.
하지만.
현실성이 있다는 것은
늘 아쉬움을 준다.
이렇게 조정된 계획이
너무 밋밋하고 아쉬워
나는 계속 혼자서 거실에 앉아
지도를 뒤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폴란드로 꼭 가야만 한다면
우선 나는 폴란드와 관련된 영화를 한 편 봐야겠다.
이것은 내게 있어 캠핑장비를 사는 것이나
비키니를 사는 일만큼 중요하다.
1995년, 혼자서 유럽여행을 할 당시,
그다지 아름답지 않는 뮌헨에서
내가 1주일이나 머물렀던 것도
전혜린이 청춘을 보낸 곳이어서였고,
함부르그 환락가를 혼자 기웃거린 이유도
비틀즈가 무명시절 연주했던 클럽을 보기위해서였다.
나는 어디를 가든
거기에 꼭 가지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게 여행의 재미아닌가.
폴란드라고 하면
우선 떠오른 것이 별로 없다.
쇼팽과 바웬사 정도.
‘프라하의 봄’과 비슷한
‘바르샤바의 여름’같은 영화는 없을까?
나는 일단 내일 시립도서관엘 가야겠다.
거기서 폴란드 관계책자를 몇 권 빌려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