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 그리움을 그리기에 좋은 듯 합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떠오르는지요?
주말 잘들 보내시구요.
내가 남편을 칭할 때 곧잘 앞에 붙여다는 말은 ‘웬수’다.
‘원수’가 아닌 ‘웬수’.
원수는 한 나라의 통치자 이자 군대의 최고 사령관을 칭한다는데...
한 나라가 아닌 우리 집만의 세상에서 분명 최고 권위자(?) 자리에 있는 남편을 우찌하여 ‘웬수’라고 칭하게 됐을까나.
참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사랑이란 명목 하에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에 돈이 전부냐 열심히 살면서 모으면 되지.
그 생각 하나만으로,
“부모님만큼은 아니더라도 호강 시켜줄게요. 마음고생은 절대로 시키지 않을 거예요.” 하는 남편의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밤기차를 탔었던,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남을 세월의 뒤안길.
그렇게 무식하게 용감했던 나는 곧바로 후회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삶의 여러 난관 속에서 내가 너무도 쉽게 살았던거구나, 를 수없이 느꼈다.
집에 대한 미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많이도 힘들었다.
가능만 하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내가 있던 자리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미 뱃속에 7개월이나 된 아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엄마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들어와라.’라고 간절히 애원했었다.
남 몰래 키운 사랑으로 애틋한 마음을 심어준 남편과 몇 개월을 함께 살아보니 실망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책임감과 계획성을 제일로 중요시 하는 나와 달리 무사태평한 남편의 본성 앞에 질릴 때로 질려 있던 나였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한 행동들이 영원토록 오점으로 남아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 행동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에게 시집와 피나는 노력 끝에 그를 훌륭하게 만든 것처럼, 나 역시 가진 것 없는 남편과 열심히 살아서 보란 듯이 성공해 당당히 집을 찾으리란 마음으로 지독하게 살아야 했다.
그런 마음 또 한편으로 무능력한 남편을 보며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모두 망쳐버렸어.’ 하는 마음이 자리했다.
그런 복잡한 심정으로 남편을 대했으니 무난하게 살 수 있었을까?
사랑 앞에 충성을 맹세하던 남편 역시 어느 순간부터 내가 버거웠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끊임없이 싸워댔겠지.
우린 영화 ‘장미의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서로를 증오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하기는커녕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오늘이 마지막... 오늘이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기적(?)처럼 그렇게 버티면서 결혼 승낙을 받았고 식을 올렸지만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싸워댔다. 전생에 원수끼리 만나서 현세에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을 확인이나 시키는듯.
참으로 이상하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사랑과 열정이 우리에게 존재하기나 했을까? 그런 단어들 조차 아련해질 정도가 돼서야 서로에 대해서 느껴보지 못했던 연민이 생겼으니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하나 둘씩 생겨나는 흰머리와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 축 쳐진 어깨의 무게가 서서히 내 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부는 생각도 공유하는 듯하다.
남편 역시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듯하니.
이제야 주례사가 했던 말처럼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남편과 함께 할 자신이 생겼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한 뱃속에서 나온 내 형제들보다도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남편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굽이굽이 함께 지나 온 세월 속에 뿌리 내린 지 얼마 되지 않는 생각이다.
목숨 같이 소중한 내 친정식구들과 내 자식들에게 실망할 때마다 위로해주는 것은 ‘웬수’같은 내 남편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 어느 순간 만나서 부부의 연으로 산다.
매일 붙어서, 좋을 때보다 힘들 때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변덕이 죽 끓이듯, 아웅다웅 싸우기도 알콩달콩 시시덕거리기도 한다.
언젠가 드라마를 함께 보던 남편이 남녀의 뜨거운 사랑 앞에서 한다는 말이,
“치이~ 지금은 좋아 죽지. 좀 있어봐라, ‘웬수’같은 놈 소리 들으며 살 테니까.” 한다.
뚱하게 앉아있던 나는 남편의 그 한마디에 박장대소를 해댔다.
별말 아닌 것에 그런 반응을 보인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 남편이 그 순간,
내가 좋아하는 핸섬한 남자 배우들보다 멋져 보였다.
이렇듯 부부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조금은 녹이 슬었지만 콩깍지 낀 눈을 과시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애물단지인 부부...
때때로 세상에 둘도 없을 것 같은 못된 인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입을 더럽히는 욕을 대신해서... 나는...한결같이... 내 남편을 ‘웬수’로 칭할 것이다.
인간은 간사하다.
나는 간사하다.
고로, 나는 인간이다...
어느 순간 내 남편의 욕을 된통 쓰게 될 것을 염두하여 틈새를 만들기 위해 쓴 말이다. 이럴 때보면...내 아이들 말대로 내 머리는 비상하다. ㅎ 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