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한 친구가 결혼을 했다.
가까운 친구는 아니지만 늦은 결혼이라 직접 가서 축하해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결혼식 풍경은 새로운 게 많았다. 특히 말로만 듣던 신랑신부 동시입장 이 참 보기 좋았다. 또 사회자의 권한이 어찌나 센지 신랑은 사회자가 시키는 대로 팔굽혀펴기도 하고, 장인장모한테 큰절도 하고, 다들 보는 앞에서 키스도 해야 했다. 어설프게 했다가는 계속 시킬 거라는 사회자의 엄포에 신랑은 순순히 신부의 볼을 감싸 안았다. 키스하는 그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내심 걱정했던 서른아홉 신부의 자태는, 열아홉 신부도 스물아홉 신부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젊음에선 다소 밀릴지 몰라도 나이 든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윽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단연 빛이 났다.
이런저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것은 주례사였다. 주례의 말을 안 듣고 제각각 떠드는 하객의 태도 또한 변함없었다. 내 결혼식 날 주례사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나는, 이번 기회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들어보기로 작정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라.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 등등. 역시나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주례사였는데 한 가지 변한 게 있다면 그걸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은 비로소 꽃이 된다고 했던가. 내가 진심으로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들으니 지루하기만 했던 그 가르침들이 정말로 천금의 진리가 되어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다.
나는 그 주례사에다 하나를 더 보태고 싶었다. 바로 서로에 대한 연민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남편한테 연민을 느끼면서부터 그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온 남편의 허름하고 지친 모습. 단단한 바위인 줄만 알았던 남편이 너무나 외롭고 불쌍해 보여 나는 당황했다. 아, 남편도 그저 나약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남편의 성실함에 감동받았다. 그러자 강한 믿음이 생겼다. 그건 그 전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롭고 특별한 감정이었다. 남편을 적이 아니라 동지라고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쓸데없는 소모전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게 다 솔직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하는 연민의 힘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식이 끝나고 식당에서 밥을 먹다 보니 이런저런 뒷얘기들이 들려왔다. 양쪽집안이 다 든든해서 신혼여행은 필리핀으로 갈 예정이고, 신혼집으로 32평 아파트를 사 두었으며, 각자 쓰던 차를 처분해서 큰 차도 새로 뽑았단다. 신랑신부 둘 다 착실한데다 번듯한 직장까지 있으니 적어도 돈 때문에 싸울 일은 없어 보였다. 나는 와! 하고 감탄사만 연발했다. 그때 옆에 있던 아직 미혼인 친구가 넌 애들이 있잖아, 하고 어깨를 툭 쳤다. 하긴 애들 문제는 그 친구가 아무리 나는 재주가 있어도 날 앞지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 하니 조금 안심이 되는 듯도 했다.
하지만 곧 의문이 생겼다. 애들을 끌어와 위로를 삼아야 할 만큼 내가 친구의 조건을 부러워한단 말인가? 나는 내가 쏟아냈던 그 감탄사들이 형식적인 건지 정말로 부러워서 그런 건지 잠시 헷갈렸다. 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셋집을 전전하는 것보다는 32평 내 집에서 신혼을 시작하면 더 좋겠지. 그 집에 온갖 살림살이를 들여놓는 재미도 쏠쏠하겠지. 그렇게 사는 건 도대체 어떤 맛일까? 남편과 나의 자취살림을 합쳐 신혼을 차렸던 나로선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그렇게 살아보지 못 한 걸 후회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사실 내 몫이 아닌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친구가 탄탄한 출발을 하게 돼서 잘됐다는 뜻으로 그랬을 뿐 부러워한 건 아니었다. 혹 부러워한 게 맞다 해도 그것이 현재의 내 삶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닌데 옆에 있던 친구가 지나친 배려를 한 셈이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 역시 지하 셋방에서 사는 맛을 모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풍족하든 쪼들리든 나름대로 살아가는 맛이란 건 오직 그 당사자만의 소중한 보물이다. 지금도 어렵지만 남편이 만화를 그렸던 신혼 때는 정말 생활이 빠듯했다. 오죽하면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고료 나오는 날이 유일하게 우리 집 고기 먹는 날이었다. 남편이 돈 받았다고 전화를 해 오면 나는 한달음에 아이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에 나가서 남편을 기다렸다. 그때의 벅찬 행복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남편과 열심히 도배를 했는데 한 달 만에 온 방 안이 곰팡이로 뒤덮여 버렸던 기억조차도 지금은 그저 눈물겹고 소중하기만 하다. 한데 나만의 그 추억이 32평 아파트 앞에서 빛이 바래진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먼저 애 낳아 키운다고 우쭐해할 필요도 없다. 친구도 나도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므로.
폐백까지 다 끝낸 신부가 마침내 동갑내기 신랑과 함께 식당에 들어섰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신혼부부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맘껏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그 흐뭇한 광경을 뒤로 한 채 나는 살짝 식당을 빠져 나왔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 막 마음이 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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