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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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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의 첫사랑.(5) - 운명의 끈.


BY 일상 속에서 2006-06-21

 

철의 부탁이 아니라도 우야둥둥, 철수보다 철과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소녀의 마음을 하늘이 아셨나보다. 복잡한 가운데 소녀는 불가능한 그 일을 가능케 만들고 싶었다.


달빛 속에서 유난히 동그랗게 빛나는 눈의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소녀가 마음을 다잡고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걸어가는 몇 초 동안 생각이 많은 소녀는 엄마의 반대에 무릅쓸 무언가를 궁리해야 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애가 타들어갔다.

언제 봤다고 뜬금없이 목숨 걸고, 자신과 아무런 연관성 없는 그를 하루 밤 집에서 묵게 해달라고 한단 말인지... 하고, 고민하던 소녀는 자신이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도전해봄직한(?) 일이었기에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비장했다.


“엄마!!!”

“헉! 깜짝이야.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렇게 갑자기 큰소리로 부르면 어떡해?!”


도가 지나치게 비장했던 소녀의 목소리는 엄마가 잉태하지 않은 아기를 떨어지게 할 만큼 격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엄마의 심기를 건드린 소녀는 더욱 바짝 긴장해야 했다.


“엄마, 또 동생 가졌어?”

세상에서 엄마를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하는 소녀였기에 엄마를 웃길 수 있는 방법도 마스터(?)했다. 엄마를 웃기기 한 가지 방법. 소녀의 엉뚱함에 약하다.


“뭐어?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어. 히히히히....계집애 엉뚱하긴... 낄낄낄... 동생이 뭐 어째?... 니들도 벅찬데... 내가 무슨 말을 못해. 그만큼 놀랐단 말이지.”

“그랬구나. 근데...엄마.”

“근데, 뭐?”

“...철수 형도 여기서 자고 싶다네?”

“그래. 그러라고 해.”

“응?”


이렇게 간단할 수가, 소녀는 꾸지람이나 된통 듣게 될 줄 알았건만 쉽사리 허락하는 엄마의 대답이 놀랐고 믿기지 않았다. 소녀는,

‘엄마가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건 아닐까, 아니면 내가 엄마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와 엄마의 대화가 어딘가에서 ‘삐그덕’하고 어긋난 것임에 틀림없는 걸 거야.’ 라고 생각했다.

한바탕 실컷 웃던 엄마는 다시 멈췄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엄마... 그러니까, 철수 형도 여기서 자겠다고.”

“그래, 그렇게 하라구해. 밖에 있을 거 아냐.”

“! 응. 밖에 있어. 정말 같이 자도 돼?”

“그래, 한번만이야. 조용히 하기로 한 것 잊지 말고.”

“그!럼! 안 잊었어.”


자신의 귀를 의심했던 소녀는 ‘이것이 웬떡이냐, 아싸! 가오리’까지 부르짖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밖에서 기다리는 철에게 달려갔다.

철은 소녀의 현관문 쪽 벽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들어와. 자도 된대.”

“정말?... 근데 너 나보고 형이라고 그랬냐?”

“응... 왜?”

“여자가...그렇게 부르니까 좀 이상해서...”

“난... 오빠소리 같은 것 안 해보고 살아서 그런 말 못해.”


소녀는 기쁨에 겨워 미소년 철에게 잔뜩 긴장하던 자신을 잊고 신이 났다.

소녀에게는 ‘오빠’ 알레르기가 있었다. 불러본 적 없는 그 얘기를 한번 해보려 하면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아서, 사촌오빠에게도 ‘형태야’ 하고 부르다가 이모에게 몇 번 혼난 전적이 있을 정도로...심각한 알레르기다.


소녀의 방과 안방 사이에는, 방이었던 곳을 입식 부엌으로 개조한 주방이 있었다. 안방에서 마루로 옆으로 부엌 문. 그 앞을 지나서 거실이 있었다. 소녀의 방은 거실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방이다. 조그맣게 떠드는 것은 용납될 수 있을 만큼 안방과 떨어져 있었다.

소녀의 방엔 가구가 없다. 침대 타령하는 소녀의 고집에 아빠가 손수 앵글로 짜서 나무판넬을 대고 만든 킹사이즈도 넘을 크기의 침대(?)비스무리 한 것이 가구라면 가구의 전부였다. 4명이 자기에도 충분한 그곳에서 진영, 철수, 철, 소녀가 앉아있었다.

동생 진영과 친구 철수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지들끼리 끌어안고 난리도 아닌 곳에서 심장이 폭발하기 직전의 소녀와 어색하게 앉아있는 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있었다.

좀 전의 말 잘하던 소녀는 다시 맨 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 침묵, 침묵...


“선자야!!!”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것을 순진한(?)소녀는 몰랐다.

그냥 첫눈에 빠져든 남자와 운(?)좋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벅찬 그녀였지만 어째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에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닌지 후회 막심하던 순간에 안방에서 부르는 엄마의 소리.


“응!!!”

소녀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서 안방으로 갔다.

불을 끄고 막내와 누워서 tv를 보던 엄마가 몸을 일으키며 소녀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

“작은 애야, 우리 집에서 뭐 좀 먹었지만, 큰 애는 밥이나 먹었나 모르겠다. 듣자하니 살기가 많이 힘든 집이라더라. 이 돈으로 과자나 빵 좀 사다가 먹어.”

“저 형네 살기 힘들어? 왜?”


철에 관한 모든 일을 속속들이 알고 싶은 소녀였기에 엄마의 말에 간단히 돈만 받아들고 나갈 수 없었다. 소녀의 물음에 엄마는 그 동안 그 집에 대해서 들었던 소문을 소녀에게 들려줬다. 그리고 친하게 지내라는 말까지 덧 듣고야 밖으로 나온 소녀는 구멍가게로 향했다.


개차반인 아비 밑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철의 가족들은 그 아버지에게 폭행당하기 일쑤였단다. 아버지는 매일 술과 노름에 빠져서 일은 커녕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으로 철의 엄마가 바닷가 나와서 남의 일 도와주며 하루하루 연명하며 지낸다고 했다.


소녀의 아버지도 술을 좋아했고 한 번씩 노름으로 꽤 많은 돈을 잃으며 엄마의 가슴을 태우고, 거기다 엄마를 폭행 할 때가 있지만, 세상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일을 해내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둔 것도 소녀는 싫었다. 그런데 엄마의 입을 빌어 들은 철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와 비교도 안될 만큼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었다.

‘또 라면이잖아...라면이잖아...’

철수에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닳아 올랐던 철.

그에 대한 관심은 금세 연민으로 이어졌다. 소녀는 뒤늦게야 왜 그들이 집을 벗어나 있으려는 지 알 것 같았다. 잠깐의 자유가 아니라, 피신처를 찾았던 게다.


안쓰러운 그들에게 잘해주고 싶은 소녀,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동정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에.

소녀는 덤덤한 척  사 가져간 군것질 거리들을 방 안에 와르르르...쏟아냈다.

빵1개, 우유1개만 빼고 모두 과자였다.

눈치 없는 진영이와 철수가 한 개 뿐인 그것을 먼저들 집으려고 아우성일 때, 소녀가 얼른 낚아챘다. 그리고 철에게 내밀었다.


“이거 형꺼야. 먹어.”

“...나 과자만 먹어도 돼. 니 동생 줘.”

“애들 밥 많이 먹었어. 자, 어서 먹어.”


빵과 우유를 포기한 녀석들이 과자봉지를 골라가며 뜯어냈다. 소녀는 거실에 있는 두꺼운 사진첩을 가지고 왔다. 빵과 우유를 먹던 철이 무거워 보이는 그것을 거들며 들어줬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넘기던 철이 3살짜리의 어린 꼬마 여자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소녀를 바라봤다.


흑백의 사진 속 아이는 앙증맞은 옷과 핸드백을 들고 서 있었다.

“너지?”

“응.”

“닮아서 그럴 줄 알았어. 언제 다친 거니? 이때는 괜찮네.”

“.......”


소녀의 아픈 상처를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수 있는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물은 사람이 그동안 한 번도 없었기에 기분이 순간적으로 다운되었다. 별것 아닐 수 있는 그 질문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더욱 기분 상한 소녀는 눈물까지 찔끔 거릴 판이었다.

소녀는 남 앞에서 어떠한 순간에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기록을 깨는 날이 그날이 되게 할 수 없는 소녀는 눈물을 꾹꾹 삼켰다.

그런 소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엎드린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에게 철수가 자신의 얼굴을 들이 밀었다.


“헉... 내가 물은 말이 기분 나빴어? 기분 나쁘라고 한 말 아닌데...”

20c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철의 얼굴이 있었다.

화들짝 놀란 소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지만 굳게 다문 입은 그대로였다.

“너 진짜 이쁘게 생겼다. 그래서...”

“그래서, 뭐? 아깝다고 하려구?”


철의 말을 자르고 소녀가 톡 쏟아 붙였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남자였고 자신만큼이나 삶이 불쌍한 그에게 연민을 느꼈고 엄마에게조차 친하게 지내라는 권유까지 들었던 터였다. 하지만 그 순간 마음이 의도대로 따르지 않았다.

묻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는 그 말을 굳이 뱉어낸 그의 의도에 기분이 상할 때로 상한 소녀였고 그런 소녀 때문에 다시 어색해 하는 철이었다.

어느새 그곳은 둘 밖에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두 동생이 지들끼리 떠들고 속닥대고 있었건만 소녀에게 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 그냥... 처음부터 몸이 그런게 아니라 다친 거라니까... 다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하고... 그 뿐이야. 아부가 아니라 너, 지금도 정말 이뻐.”

“얼레 꼴레리 얼레 꼴레리~ 둘이서 좋아한데요~ 좋아한데요.~”


철수가 주책스럽게 또 끼어들었다.

소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기에 지금도 이쁘다는 그 말에 살짝 기분이 좋아지려던 판이었건만... 둘만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 찬물을 끼얹는 철수를 누구의 동생만 아니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소녀였다.

‘어째 달라도 저리 달러.’ 라고 소녀가 생각했다.

퍽! 

소녀의 마음이 환히 보이기라도 한 듯, 소녀를 대신해서 철이 분위기 파악 못하는 제 동생의 뒤통수를 한 대 힘차게 때렸다.

“좋아하긴 뭘 좋아해, 임마. 넌 자식이 뭐가 그리 좋아서 까불고 난리냐고.”


평소 소녀가 주권(?)을 잡고 통제하던 방이었다.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 어쨌거나 철의 잽싼 판단력(?)으로 방의 분위기가 차분해 질 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들어오신 것이다.

발짝 소리가 심상치 않다. 많이 취한 듯 중심이 없는 발소리에 소녀는 살짝 긴장했다. 세상에서 제일 잘 보이고픈 철이 곁에 있는데 아버지의 술주정이 터져버리면 어쩌나하고 불안했다.


“선자... 딸꾹... 아직 안자니?... 딸꾹...”

신발 벗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 불이 다른 때와 달리 켜져 있었으니 묻는 듯 했다.

소녀가 얼른 방 밖으로 나갔다.

소녀는 늘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기본적인 이야기가 아니고는 특별하게 다가가는 법이 없는 매정한 딸이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아버지는 그나마 소녀에게만큼은 끔직했다.

술 취하지 않고는 별 말씀 없는 분이셨지만, 유독 술만 취하면 싫다는 딸에게 까칠한 턱수염을 비벼대며 뽀뽀하기에 열성인 분이었다.

소녀가 바닥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힘겹게 앉아있는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술 취한 아버지는 눈이 반쯤 감 긴 눈으로 딸을 올려다보았다.

“딸... 아빠, 낮에 준...딸꾹...쮸쮸바 맛있더라...딸꾹...”

“아빠, 많이 취했어. 자. 난 아빠가 술 먹었을 때가 제일 싫다고 했는데 왜 자꾸만 마셔?”

“딸꾹...아빠, 기다렸구나...딸꾹... 지금까지...”

“지금 진영이 친구랑 같이 놀고 있었어. 그러니까 빨랑 자.”

“...그래...그랬구나...아빠 딸...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 딸꾹... 딸이야... 딸!...공부 잘해도, 그림 잘 그려도...딸꾹... 유학 보내 줄 거야...외국으로... 아빠, 엄마가 누구 때문에 돈 벌어?...딸꾹... 딸 때문이지...”


이 말은 술 취하면 늘 하는 아버지의 18번 대사다. 사랑하는 딸 타령, 유학 타령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해대는 그 말을 소녀는 싫어했다. 집안에서 독불장군 아버지께 유일하게 발언권을 행사하는 소녀이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아버지의 주정을 조금은 더 들어줄 용의가 있었지만 그 순간 방안에서 귀를 쫑긋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 때문에 얼굴이 화끈 거릴 정도로 창피한 소녀는 빨리 아버지가 안방으로 가기만을 바랬다.


“아빠가 술주정하면 나 창피해.”

“...아빠가 창피해?...그럼 안 되지...”


부녀가 주고받는 얘기 중에 안방 문이 열리고 엄마가 나왔다. 엄마는 처음부터 잠들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밖으로 나온 엄마는 아버지에게 함부로 말한 딸을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맞고 사는 엄마 앞에서 아버지를 욕하고 이혼 권유까지 꺼내는 딸에게,

‘그럼 못쓰지. 그래도 네 에비인데.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자식이라면 끔찍한 네 아빠야.’ 하고 꾸짖던 엄마니 당연한 반응이다.


엄마가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부축해 안방으로 들어가시며 “이제 그만 불 끄고 자.” 라고 하셨다.

그 말에 누가 껐는지 소녀 방 불이 꺼졌다.

안방의 문이 닫히고 소녀는 마루의 불을 끄고 잠깐 어둠 속에서 혼자 있었다.

자신에게 만큼은 조심하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자꾸만 미워지는 것인지 소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10여분을 그렇게 있던 소녀가 자신의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다. 너무도 어두운 그곳으로 들어가니 벌써 다들 잠이 들었는지 고요했다.

소녀는 빈자리를 찾아서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스위치와 가까운 벽 쪽이 비어 있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 못한 것만 빼놓고는 늘 평범해서 심심하던 집이 어느 때보다 긴장감 도는 야릇한 기분, 마냥 좋았다. 그래서 소녀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의 바스락 거리는 움직임에 곁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이 깰까봐 소녀는 조심스럽게 빈자리에 놓여있는 베게를 베고 누웠다.


“너는 참 행복하게 사는구나...”

갑작스런 목소리에 소녀는 깜짝 놀랐다. 불은 끈 것은 철이 인듯 했다.

그동안 자고 있지 않았다면 철은 분명 자신과 아버지가 주고받은 모든 얘기를 들었겠구나 생각하니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에 둘만 깨어있다는 것이 묘한 감정까지 북돋았다.

두근두근....

“내가 행복해 보여?”

소녀는 자신의 떨림을 들키기라도 할까봐 얼른 철의 말에 대꾸했다. 얼굴을 보고 얘기하지 않으니 그런대로 조금은 안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심장의 발광만 멈추면 좋으련만...소녀는 생각했다.


“그래... 잠깐만 봤어도 네가 너의 부모님에게 참 많은 사랑을 받고 사는구나, 생각하니 부럽다. 난...”


철이 말끝을 흐렸다.

소녀는 자신의 엄마에게 들었던 철의 가족사에 대한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선뜻 아는 체하며 같잖은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정적이 맴돌았다.

바로 옆에서 철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그가 잠이 들었나보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소녀였다.

그런 자신을 부러워하는 철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조잘조잘 떠드는 계집애들이 순정만화라는 유치한 것을 들고 와서 내민 적이 있었다. 사랑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예쁘장한 남녀의 그림이 나왔던 그것을 소녀는 무시했다. 그동안 소녀가 좋아하던 만화는 명랑만화나 무협지였으니...

하지만 귓등으로 들은 남녀 간에 얘기는 조금 있던 소녀. 그 순간 그 얘기가 왜 떠오르는지...

“있잖아. 남자와 여자의 세끼 발가락에는 보이지 않는 붉은색, 운명의 끈이 이어져 있대. 그래서 어느 순간 운명이 끈이 이어진 사람은 꼭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는 거지. 아~ 나의 운명의 왕자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친구의 그 말에 소녀는 할머니의 말을 응용했다.

“야이, 지지배야. 개 풀 뜯어먹는 소리 집어 치워. 사랑? 왕자님? 그런게 어딨냐?”


그렇게 큰소리를 치던 자신이 한눈에 뽕간 남자를 만났다고 한다면 친구들의 반응은 어떨까? 조금만 움직이면 몸이 닿을 곳에 그가 있었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했던 그 말을 취소하고픈 소녀...곁에 누워서 자고 있는 남자는 분명 자신의 운명의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럼...나와 형의 발가락에 그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 색 실이 이어져 있단 말이지?...발을 한번 보고 싶다.’ 하고 소녀는 또다시 독특함을 자랑하는 자신만의 정신세계에 빠져들었다.


“자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