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 가랑비가 내린다
묵은 장 많다고
몇 년 않해 넣던 장을
작년 메주 쑨 거 두 장 남았으니 하라고
성화를 대는 동생 땜에 마지못해 정월 달쯤
부랄 만한 단지 두 개에다 막장 고추장 담아 밖에 내 놨더니
근래 안개며 흐린 날 잦고 찬 바닷바람까지 가세해
영 햇볕 그리워
애쓰더니 아침에 들여다보니 장 위로 물기가 보이네
뜨거운 볕에 바싹 바싹 말라 쩍쩍 갈라져야 맛나게 익을 텐데 ...........
비 내리면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주 양
전날 새벽까지 손님보다 저가 더 마시고
저가 더 신명내고
결과는 저가 더 취해 홍시처럼 흐느적거리다
벌건 대낮까정
넝마처럼 구겨진 몰골로 골방에 널브러져 있어야 할애가
비 내리는 날이면 아침부터 서성댄다 담배를 입에 문 채,
그러다 넋빠진 듯
술청 마루에 앉아 비 내리는 마당을 한없이 바라본다
손 끝 에 매달린 담배가 저 혼자 다 타도 모를 정도로 ..
훌렁 걷혀 올라간 속옷 사이로 허연 허벅지 살이
컴컴한 술청 마루와 묘한 구도를 그려내지만
아침준비와 죈 영감탱구 오줌통 들고 바삐 움직이는
난 일부러 바쁜 체를 더 한다
괜히 말 걸었다간 그 놈의 넋두리에
이른 아침부터 술병 대령하고 술 소리 들어야 하고 ...
내 일만 더디니까
그렇다고 지 맘 내 모르남
두고 온 남매 생각에 저 발광하는 거
비만 오면 미치는 그 심정을 ..
양주 어디 부품공장에 다니다 그 회사 과장하고 ( 저가 그렇게 말하니 )
눈맞추다가 집을 나왔는데
사내는 쓴 물 단 물 쪽 빨아먹고 원위치로 돌아가고
끈 떨어진 갓 신세인 저만 대폿집 논다니로 풀려 저 꼴인걸 뭐
자고로 딴 사내 맛본 여자 치고
온전히 집구석으로 수굿이 기어드는 일이란 만고에
드문 일이 거늘
거기다 술맛, 돈맛, 주정하는 맛까지 익혔으니
고걸 못 써먹을까 아쉬워서도
못 들어가는 인간도 더러 있더라 내 잘 안다
어쨌든 비 오는 날 주 양은 반미치광이가 된다
줄담배를 빨아대며 한숨을 들이쉬고 내 쉬고
술청에 누웠다 하면 어느 새
발딱 일어나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무릎사이로 처박고 도를 닦다가 ..
그 짓도 지겨워질 만큼 하면 반 속옷 차림으로 휭~ 하니 우산 쓰고 나간다
한참만에 들어온 그녀 양손에는 어김없이 장거리가 한 보따리다
지난 밤
한푼 두 푼 받아 젖통 사이께 쑤셔 넣었던 팁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이것 저것 마구 장을 봐 오는 것이다
주방 한 구석에 웅크린 넓적한 등짝의 주양이
요리를 한다
양파를 까고 깻잎을 헹구고 정구지를 씻어 건지고
싱싱한 홍합살을 칼로 창! 창! 다지고
새끼 버리고 온 지 심정같이
독하고 독한 땡초도 칼날로 자근자근 짓 이기고
해서 밀가루 치대어 전을 부친다
연탄 화덕 홀 중앙에 내다 놓고 땀 뻘뻘 흘려가며
전을 부쳐댄다
부치다 지치면 날더러 하라고 뒤집기를 주고
저는 벌건 얼굴로 한 쪽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문다
점심 손님이 들어오면 썰어서 먹으라 날라주고 (고것이 고소 맵싸 엄청 맛나다)
낮술 손님 오면 공짜 안주라고 날라주고
멸치할매가 그만 부치라고
기름냄새 난다고 성화를 대도 대거리 한번 않고 처연한 눈길로
구워내고 구워낸다
그 짓거리를 저녁까지 하고 있으니 그 재료 양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중간에 해가 나거나 비가 그치면 그만 둘때도 있다
새끼보고 싶은 억장 같은 심사를 그렇게 지짐질로 풀어내던 주 양
다섯 색시 중 나랑 가장 친해진 아이로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서로 소식을 주고받고 만나기도 하며 지냈다
반대로 날씨가 너무 뜨거우면 또 죽겠다고
뒹굴며 속을 끓이는 여인네가 있으니
유 양이다
그녀는 아들놈 둘을 둔 채 집을 나왔는데
그 여름 불볕 더위 속에서 얼음 과자를 못 먹는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 빨아보라고 줘도 도리질을 친다
이유는 두고 온 두 아들놈들이
이 더위에 이런 것도 못 얻어먹고
땀흘리며 엄마 찾는 것이 눈앞에 어른거려 보기도 싫다는 것이 이유다
눈물겨운 모정이다
또 겨울을 못 견뎌내는 여인네도 있다
나이 많아 다른데 가봤자 부엌데기 신세 밖에 될 수 없고
부엌데기 보다는
몸에 익은 색시 짓이 대우 좋고 신간 편하다고
그대로 눌러 앉은 미상불 마담이라 불러주는 김 양 언니다
문둥이처럼 눈썹이 전혀 없고 입도 뾰족
눈도 감으나 뜨나 뾰족,턱도 뾰족,
성격도 뾰족 사나워 제 신간이나 남의 심사마저 긁어놓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김 마담 언니
이 뾰족 선수가 겨울이면
삶아 푹 뜸들인 시래기 나물 모양 새들 시들하게
앓는다
집나올 때 두고 온 아직 어린 딸 때문이다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며 핑계 없는 무덤 없다지만
마담언니 그 주절주절 하던 넋두리 중 한가지 말이 내 가슴에 지금껏
슬프게 남아있다
그 해 겨울 최고 추위였나 그 날이 ..
부엌일 마친 내가 아랫목에 손을 녹이고 있노라니
\"이년이 미쳤지! 그 어린 것 모질게 때리고도 모자라
발가벗겨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바깥으로 내 쫓아 놓고 한참 있어도 기척이 없길래
내다 보니
마당 앞이 냇가라 발갛게 얼은 몸뚱이로 냇가 얼음 주어 먹으며
놀더라
그 철없던 것을... 그 것이 지금 얼매나 컷을 꼬
에미가 제게 한 짓을 기억이나 하는지
에구 에구 이 미친년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 꼬
담배가 입술 끝에서 다 타도록 깊이 빨아대며 회한에 몸을 떤다
마담언니는 겨울이 지옥의 한철인 셈이다
떼리에의 집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보고 듣고 몸으로 느끼고
같이 공감하고
니 처지 내 처지 구별 없던 그 시절 이야기들
내 인생 길 잠시 머물다 온 길이지만 죽기 전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말인데
내 주제에 감히
내 서방도 못 차지하고 뺏겼던 내가
최 사장, 그것도 남의 남자를
사랑해서 가슴에 앉히고 울며불며 괴로워하기까지 한 그 추태의?동기를
생각해 봤는데 흠..
산만하고 퇴폐적인 냄새가 일년 내 떠도는 떼리에의 집 공기
밤새 술꾼들이 마구 뱉어내는 적나라한 언어들
때론 깜짝 놀랄 만큼 재치 넘치는
만담가들
풍자 섞인 비웃음이 칼질하던 내 귓가에 들리면 목을 빼고
뉜가? 어디 다른
인종인가 싶어 국수가닥처럼 관심이 늘어지던 호기심 많던 나
별 인물도 별 교양도 (내 보기엔) 가진 것 보다 못 가진 것이 더 많은
나와 하나 다를 게 없는 다섯 여인들 덕택? 에
내가 어줍잖게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 동기 가 아닐까?
.............
최 사장 참으로 가슴이 따뜻한 사내임엔 틀림없다
무더위가 최고로 기승을 부리던 때
밤새 주방으로 술 방으로
나르고 닦고 치우고 흔들어 들고 눕히고 하다가
새벽에 잠깐 눈 붙이면 또 종일 식당 일에
땀으로 목욕을 하던 그 여름 날 한창 손님 점심 수발로 바쁜 데
최 사장이 날 불러 낸 것이다
멸치 할매는 최 사장 말이라면 다 들어 주니 그러기도 했겠지만
일 그만하고 근처 다방으로 나오라는 전화
그때는 이미 마음을 다스리고
짝사랑이 남긴 흉터에 약칠 열심히 하던 차였는데
이게 웬 소식이냐 횡재냐 하며
몸빼 벗어 던지고 새 옷 갈아입고 불덩이 같은 햇살이 정수리에서 노린내를 피워
올릴 만큼 뜨거운 길을 달려 갔었더랬는데 ..
시원한 다방에 여러 손님과 둘러앉아 있던 최 사장
무심한 눈길 한번 힐긋 주더니
태연하고 느릿한 조금은 귀찮은 기가 섞인 듯한
나지막한 소리로
\"응, 왔나, 거 앉아서 바람 좀 씌고 시원한 거 한잔 마시고 가라
그러더니 레지더러
\" 김 양아 자 시원한 거 한잔 갖다 줘라 먹고 가게
세상에 나 원 참!
그래도 내 딴에 날 불러 마주앉아서 한동안 쌀쌀맞게 대했던 일하며 그로 인해 마음 고생 자심 했을 날 위로해주려나 보다 하는 맘과
못난이 쑥맥인 내가
그 지랄 같은 성격의 최 사장 좋아한다고
비웃고 어이없어 하던
떼리에의 집 다섯 여자들과
고 기막힌 와중에도
최 사장은 너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을 남자라고 자발자발
충고하던 여우할매같은 주 양
주 양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자랑거리 생각에
슬리퍼가 벗겨질 정도로
뜨거운 길을 달려왔건만
세상에나 ! 나 혼자 아무데 앉아서 차 한잔 마시고 가라
하다니
머릿속에 태양하나가 더 들어앉은 것 모양 홧홧 열불이 나고
벌건 대낮인데도
눈앞에 별이 보이더라
참으로 무참했던 그 날 그 오후 다방 풍경
건너편 자리에서 손님과 얘기에 빠져
나에게 눈길 한번 안 주던 그 남자 최 사장
날 소박 놓던 남편보다 열 배는 더 미웠던 남자
살의까지 품었던 (착한 내가) 남자
며칠 뒤 손님 몰고 와 술 방에서 색시들과 질탕하니 노는
중에 바깥으로 슬그머니 빠져 나오더니
주방 문턱에 앉아 잡지책
뒤적거리는 내 등을 툭 치며
\"내 니를 그날 와 불러냈는지 아나?
보나마나 그 더운데 할마시가 니만 부려먹을 것 같아 맘이 아프더라
내가 불러 시원한 다방에서 잠시잠깐 쉬게 해줄라꼬 안 그랬나 잘했제?
취기로 건장한 그 육체가 건들거들 흔들린다
짝사랑 거품이 가라앉아 가던 내 가슴 호수에서
다시 물결 소리 출렁하며 뒤집어진다
아! 내 어찌 저 사내를 사랑 않고 배기리
비록 나 혼자 하는 허한 사랑일지라도 말이다
밤낮으로 내 육체를 혹사했던 곳 떼리에의 집
육체의 고통을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감정과 사랑해서 오는 슬픔의 눈물이
다 상쇄시켰기에 그리 해를 넘기고도 반년을 더 있게 하였었나
다섯 여인네들의 눈물 ,추잡함, 시기심...주정과 욕설
얼룩덜룩한 과거 사연들
내 남 없이 선택되지 못한 인생들이 모여 열등감 없이
한철 오글오글 뒤 섞여 지냈던 곳
일명 떼리에의 집
그 곳서 배운? 인간 관계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득이 되기도 했고
드물게는 흠도 되었다
아무려나 인생이 재미있다는 건
이런 삶도 저런 삶도 훔쳐보고 만져보고
기대보고 겪어 봐야 된다는 내 지론이다
늙어 노인정에 가보라
평생을 곱게 비바람 아니 맞고 살아온 늙은이 들은
늘 남 뒷전에 홀로 앉아 있다 했다
뭐 특별이 할 이야기 거리가 없다 보니 자연히 말 수가
적어지고 말이 없어지니 홀로 뒷전 차지라는 거지
이리저리 험상궂게 온갖 풍상 다 겪으며 살아 온 사람이 늙으면
말 주변도 좋고
말도 재미있게 꾸며대고 놀줄도 아는 법이라는데 ..
늙어 그런 사람 주변엔 항상 사람이 모여 든다 더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