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텃밭의 풀을 뽑아주다가, 아주 오래 잊고 있던 내 작품 하나를 발굴해 냈다. 작품이라 부르는 데에는 다분히 과장과 농이 깃들어 있지만, 하여튼 내가 지었으니 내 작품은 작품이다. 하트형의 넓은 잎을 지닌 풀 한 포기를 들어보이며 남편이 말했다.
\"이거 봐라, 잎이 야콘하고 똑같이 생겼네. 이름 알아?\"
지난 달, 남 쪽 섬에 사는 동서가 모종을 보내줘서 처음으로 칠팔십 포기 심어둔 야콘은, 외국에서 들어온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만치 실물을 처음 본 작물인지라 그것과 닮은 풀이름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촌에서 나고 자라 촌에서 사는 나이니 웬만한 잡초 이름은 대강 아는데, 하필 그 풀 이름은 들은 기억이 안났다.
\"글쎄, 기억이 안나네. 우리 어릴 때 골목 앞이나 도랑가에 흔해서 빠꿈살이할때 적 부치는 재료로 많이 썼는데.\"
넓은 잎의 잡초는 적을 부치고, 돌가루는 빻아서 떡을 하고, 어떤 잎은 김치를 담그고 어떤 색 돌가루는 떡고물을, 어떤 색 돌가루는 고춧가루를....
냇가에 돌팍으로 살림을 차려놓고 살던 그때의 소꿉놀이에는 의사놀이니 공주놀이 같은 거 없었다. 밥하고 나물 무치고 김치 담그고 국 끓여서 사금파리 그릇에 담아 넓적한 돌팍에 주루룩 차려놓은 엄마가 \'아부지 진지잡수라고 해라\' 그러면 아이는 사랑방이라는 곳으로 한걸음 다가가서,\'아부지 옴마가 진지 잡수시래요.\' 그러면서 놀았다.
떡하고 전부치는 일은 특별한 날에만 했다. 혼사나 환갑이나 잔치가 있는 날, 사람이 죽었을때, 명절, 제사, 어른의 생일. 그리고 새댁이 친정에 갈때 이바지를 해서 싸 보내는 걸 보았기에, 소꿉놀이에서도 그대로 했다. 어느 누구도 집에서 공부하라거나 무엇이 되라거나 장래 희망에 대하여 질문조차 해주지 않던 촌가시내들한테는, 예쁜 옷 입고 화장하고 떡보따리 이고 친정에 가는 색시의 모습이 그리도 좋아보여 꿈이랍시고 작은 가슴에 품어봤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무렵 큰집 사촌오빠가 장가 가서 사촌올케가 친정갈때면 안반가에 둘러앉은 여자들이 떡살을 들고 앉아 흰떡을 만들어 설짝에 넣어 싸 보내고, 올케와 오빠가 돌아온다는 날엔 또래의 사촌들과 동구밖까지 가서 설레며 기다리다 술병을 들고 앞서 걷는 오빠와 떡보따리를 이고 조금 쳐져 따라 걷는 올케를 맞이하여 졸래졸래 따라오곤 했기에 더욱 그 모습이 멋져 보였을 게다.
그러면 왜 하필 대통령 딸 영애씨였을까.
농사와 관련된 잡지였지 싶은, 어떤 월간지의 표지 뒷면이던가, 어디던가, 젊은 박정희 대통령내외와 흰 원피스의 두 딸과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히 입은 아들이 푸른 잔디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의 간단한 설명에 \'영애, 영식,,,\' 뭐 이런 소리가 있었고, 국민학교 이학년쯤 되었던 수악한 산골가시내 나는 그것이 그네들의 이름인 줄 알았던 것이다. 떡보따리 머리에 인 새색시와, 흰 원피스를 공주처럼 차려 입은 대통령 딸들의 모습은 그때 내 가련한 꿈의 이상적인 조합이었던가 보다. 그 노래 제목은 무엇이었나 모르겠다. \'맑은 하늘 푸른 물은 우리들의 마음인가...\' 암튼 그 노래의 곡조에 맞춰 내 노래는 또래의 소꿉동무들로부터 그의 형제자매한테로 퍼져서 동네 안에서는 한때 유행(?)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날 다릿목에서 불러세운 동네 청년 두엇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꿀밤을 주면서,
\"대통령 딸이 떡보따릴 왜 이고 댕기냐 이눔아, \"
큰소리로 웃을때는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막연히 부끄러웠다. 또 하루는 일곱 살 위의 언니가 그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다 나를 돌아보더니 \'떡보따리 머리에 이고,,,참 눈물겹다.\'하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나야 짓기만 했을뿐 처음부터 내 가사로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이 내 노래를 부를때마다 기분이 좋기보다는 어색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강해지기 시쟉했다. 그러다가 차츰, 아주, 잊혀졌다.
아침에 남편 앞에서 한번 불러보며 그 유치함에, 그 세상물정 몰랐음에, 그 눈물겹도록 되바라지고도 설익은 허영심에, 그 배고픈 티가 줄줄나게 소박했던 꿈에 웃고 웃었다. 여기에 그대로 적어 본다.
대통령딸 영애씨가 시집을 갔다네요.
어머니께 찾아올때는 방글방글 웃으며 와요.
떡보따리 머리에 이고 아들딸의 손목잡고 어여쁘게 방글방글 웃으며 와요.
대통령 아버지도 반가워하네 오오 우리딸이 찾아왔다고
떡보따리 막걸리병 내려놓고서 영애씨는 큰절을 해요.
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