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내 딸 혜진이
지 각시 못생겼음을 첫아들 낳고
바로 깨달아 버린 남편이란 작자
쥐어 패고 발로 내 지르고 쌍욕을 해대는 그런 학대는
절대 아니 하는 반면
집안에 있어도 얼굴을 쳐다보지 않음을 물론
말도 없고 물어도 답도 없고
소 가 개 보 듯 닭 소 보듯 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집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만에 오고
열흘만에 오고
한 달이 한 번이나
두 달만에 한 번 볼 때도 있고
어느 땐가는 석 달째나 종무소식이기에
쌀도 없고 연탄도 없고 우리 모자는 병이 들었다고
남편의 친구 부인에게 하소연했더니
그 밤 야심한 시간에 쌀 서너 말과 몇 푼의 지전을 던져주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하루는 몇 달 만인지 새벽에 술에 취해서 들어오더니
취한 위인 눈에 내가 여자로 보였던가
구석에 아이와 웅크리고 자는 나를
깨우지도 않고 덮쳐 제 볼일을 채우는데 그 밤 그 일 끝에 생긴 게
우리 가엽고 서러운 딸 혜진이다
또 아이 밴걸 알고 난 남편이란 위인 하는 말
\"애 가졌어? 지워! 애는 자꾸 낳아서 어쩌자는 거야
그때 저는 이미 나와 살지 않으리라 작정하였던 가
지나고 생각하니 ..
딸 혜진이는 시대적으로도 아주 격동기에 태어났다
그 해 대통령이 총탄에 서거하였고
이듬해 봄엔 광주사태로 온 나라가 전쟁 분위기로 날카롭고 웅성웅성 대던
때였으니
아무려나
한갓 보잘 것 없는 여인네인 네겐
가정이 깨지고 아이를 업고 거리로 내 몰린 판에
나라가 어떻고 누가 죽었음 어떻고 살았음 어떻고
어디서 난리가 났던지 말던지 무슨 관심이 있었으랴 만 ...
수중에 돈 이만 칠 천 원
몸빼 바지에
풀 슬리퍼 꿰 신고 업고 걸리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80년 그 해 여름 그 길고 긴 장마
내 눈에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보다 더 줄기차게 쏟아지던
그 여름 장마
논에 심은 벼가 싹을 튀우지 못하고 썩고 물러져 쓰러져도
그칠 줄 모르던 그 해 장마 ..
많은 목숨이 이유 없이 죽어야 했던 그 여름
그 시대의 눈물이 그토록 많은 비로 변해 내렸나보다
새 정권이 들어서고
동시에 나도 두 아이들과 살 곳을 찾아서 들어섰다
노량진에 있는 성로원 영아원
그곳에서 아이 둘을 고아로 올리고
난 백 명 가까운 원생과 보모들의 밥을 짓는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계시는 김종철 원장님 전옥자 보모장 님
제가 아이 둘 키웠던 3년여의 그곳 생활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늘 고마운 마음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고
숱한 눈물이 있었던 성로원 생활
아이들과 내 처지보다 더 절절한 고아들의 숱한 사연들
친권을 포기하고 눈물로 나가는 부모
영화배우처럼 차리고 와 아무렇지 않게 아이 입양을 청하는 부모
방마다 숨죽여 우는 어린 영혼들의 흐느낌이
종일 밥하고 반찬 하느라 파김치가 되어 누운 내 골방에까지 스며들어
선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며
먹먹한 가슴으로 다시 잠들고 하길 또 얼마나
세상에 못할 짓이 자식 버리는 일일레라 독한 인간들 같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