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이들이 어버이날이라고 선물이다,전화통화다 바쁜 하루를 보내지만
내겐 이날이 후회와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날이 된 것은 지금부터 8년전의 오늘이다.
난 그때 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에 임신 8개월된 임산부라서
다리엔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혈관이 불거져 올랐고, 발은 퉁퉁 부어서
바깥외출이 힘든 시기라 어버이날이라고 부모님을 찾아 뵐 생각은 하지도 않고,
남편과 큰애가 출근과 학교로 간 뒤에 친정에 전활 넣었다.
\"여보세요!\"
\"엄마! 나야. 어버이날인데도 집에 갈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이렇게 전화만 해서 죄송해요.\"
\" 괜찮다. 몸 힘든데 않오면 어떠니?\"
\" 언니나 오빠가 온다고 합디까?\"
\"글쎄!! 바쁜데 뭐러 오겠니?\"
\"그럼 어 엄~ 마 ! 시내라도 가셔서 맛있는거라도 사 잡숫지 그러세요.
동네 친구분들이랑.\"
\"그렇찮아도 동네에서 천렵을 간다고 하더라. 우린 아버지만 가신다고 한사람 회비만
냈단다.\" \"엄마도 함께 다녀오세요. 오지도 않는 자식 기다리지 말고 친구분들이랑
흥겹게 보내시는게 좋잖아요.\"
\"이따봐서 그러던가~~~~\"
\"거기 꼭 같이 가시구요. 이만 끊을게요. 언제나 집에 갈 수 있을려는지~~~\"
\"알았으니 몸 조심하구 들어 가렴.\"
그렇게 불러본 <엄마>가 세상에서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엄마의 목소리를 다신
들을 수 없게 될 줄이야.
하루를 찜찜해 하면서 보내고 해가 으스름 해 질때쯤 전화가 울린다.
\"00아! 큰일났다. 엄마가 다치셨으니 빨리 오너라!.\"
사촌언니의 다급한 목소리. 놀라서 후들거리긴 했지만 그냥 좀 다치신 줄만
알고 ,회식 때문에 술이 곤드레가 된 남편을 수배해서 ,겨우겨우 2시간여를
운전하여 병원에 가니, 이미 다른 병원으로 옮겼단다.
거기까지 찾아갔으나 난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른 가족은 모두 면회를
하고 있었지만, 나만 들어가지 못하게 형제들이 붙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않되었고, 단지 많이 다치셔서 보기 흉해 임산부인 나를 못보게 하는 줄로만 알았으니.
중환자실에서 하루가 가고,이틀이 가고, 삼일째 아침에 담당의사가 가족을 모두 불러 놓고
가족의 의견이 일치 되면 해달라는대로 해주겠단다. 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따졌고,
오빠가 이만 엄마를 보내드려야 한다고~~~
난 악을악을 쓰며 이게 뭔 소리냐고 바닥에 주저 앉았고
남편이 날 밖으로 끌어내 집에 가서 진정하고 오라며 차에 태우고, 절대 내말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않한단 약속을 하고 시댁에 가니
울 시엄니 왈 \" 에미야 ! 너때문에 다른 형제들 힘들게 하지 말아라.\"
난 그때서야 울 엄마가 가망이 없단걸 알았고 ,사고현장에서 엄마를 병원으로 모신
119에 전화를 걸어 그날의 대원을 찾으니 비번이라고 다른 대원이 말하길래,
현장에서 기록된 내용을 알고 싶다고 했더니 찾아서 읽어준다.
\"현재 동공이 열려 있음.\" 이라고 적혀 있다고.
참 많이도 울었다. 지금도 눈물이 난다. 나만 울엄마가 가망이 없단 사실을 몰랐구나를.
난 그래도 며칠만 기다리면 엄마를 볼 줄 알았는데~~~
그렇게 다음날 엄마의 인공호읍기를 빼서 사고난지 4일만에 저세상으로 가셨다.
장례식날 집 대문옆에 수국이 있는대로 벌어져서 꽃상여가 저절로 되었고
해마다 수국이 하얗게 벌어지면 그날이 떠올려지고 내가슴엔 소금이 뿌려진다.
다시< 엄마>를 불러도 대답 해줄 사람이 없다는것이 얼마나 큰 상실인지
격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것이다.
지금도 자책한다. 그날 내가 집에 갔으면 엄마는 천렵에 가시지도 않았을테고
사고도 나지 않았을텐데. 엄만 행여 나라도 올까봐 회비도 안내고 계셨던걸
힘들다고 엄살에 가지 않은 이몹쓸 딸년은 해마다 통한의 눈물만 흘리는 것을
울엄마 저세상에서 어떤 눈으로 바라 보실까?
오늘도 그 날처럼 날씨가 아주 화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