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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BY 바람꼭지 2006-05-08


 세탁기의 전원스위치 다음에 코스 선택을 누른다. 퍼지, 불림, 기억, 급속이란 글자 위에서 손가락을 멈춘다. 급속 코스로 하면 45분쯤 걸리는 데 난 이 코스를 즐겨하는 편이다. 빨리 세탁을 다 마치고 나서 청소며 설거지며 다른 집안 일을 하려는 것이다. 

 왠 일일까? 세탁기의 표정이 평상시와 다르다. 화가 나서 뾰루퉁한 것 같기도 하고 시무룩해 보이기도 한다. 동작 버튼을 누르자마자 위융위융하며 119 구급대가 달려갈 때의 소리를 낸다.

 어제 비바람이 칠 때 뜨락 위의 앉아 있던 그의 몸이 비를 맞아서일까? 먼지와 축축한 습기가 머금은 그의 몸을 마른 걸레로 정성껏 닦아낸다. 다시 동작버튼을 누른다. 으우으우 하면서 여전히 이상한 소리를 낸다. 반항을 한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않는다.

 여러 개의 기능이 적혀진 회로가 버튼 위의 비닐 포장이 다 망가지고 전자 기억 장치가 소실되어서인지? 자기가 세탁기 인 줄도 모른다. 뚜껑을 열고 물을 강제로 수도호스로 연결시키면 뚜껑 열림이란 빨간 불이 들어 온다 그러면 나는 열려 있다는 것을 못 보게 큰 타월로 그의 눈을 가린다. 그러면 다시 원활하게 움직인다.

   구입후 며칠 안 되었을 무렵 전자동기능이 잘 될 때도 나는 자동기능을 다 활용하지 않았다. 물을 급수 시킬 때 마음이 급하면 세탁기와 연결된 급수기만으로 급수 되기를 못 기다리고 수도의 다른 호스까지도 연결시켜 한꺼번에 빠르게 급수 시키곤 했었다. 물이 설정된 높이까지 채워져야  세탁이 되므로 물부터 얼른 다 받고 수동으로 세탁을 누르곤 했다.

 헹구는 시간도 단축시키려고 세탁이 다 되면 수동으로 탈수를 누르고 헹굼을 수동으로 누르고 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헹굼 세 번 할 것을 탈수 두 번 헹굼 두 번하는데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일반적으로 코스대로 하면 한 시간 이상 걸릴 것이 사십오분 정도에 끝을 낼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내가 일부러 수동을 하던 것이 정말로 수동세탁기가 되고 말았다. 몇 년동안 거의 수동으로 명령에 복종하던 생활을 하다보니 전자동이라는 걸 잊어 버렸나보다. 수동으로 물 한결된 호스로 하고 누르고 세탁 다 되면 다시 헹굼 누르고 하는 식으로 해왔다.

 그런데 며칠 전에도 나의 명령에 말없이 복종만 하던 그가 오늘 따라 꼼짝하지 않는다. 다들 연휴다 석탄일이다하며 움직이는 걸 보고 그도 쉬고 싶어진 걸까?

 나도 오늘만은 쉬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나 보다.몇 번이고 순서를 뒤바꾸고 탈수도 시켜보려하고 불림도 시켜보려해도아무 것도 하질 않는다. 전원 스위치가 켜지고 한 두 곳의 기능 스위치를 누르면 우윙우윙 하면서 다른 말은 필요 없다는 듯 나의 명령을 거부한다.

 하는 수 없이 답답한 마음에 그의 이야기를 이 곳에   풀어 놓고 있는 중이다.쓰다 보니  내 조급함도 가라앉고 다시 한 번 그에게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이젠 그의 마음이 바뀌었을지 모른다.

 엄마야,깜짝이야! 정말이지 이건 놀라운 일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그에게도  나처럼 마음이란게 있을런지 모른다고 잠시 나의 횡포와 무조건의 명령자세를 거두고 잠시 기다려주었을 뿐인데..

 금방 달려가서 예감이 이상해서 세탁기의 전원 스위치를 누르고 급수기의 물조절량 위치 버튼 누르고 동작 버튼을 누르니 .... 이럴 수가? 그가 유연하고 쾌적한 음성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스 불에 올려 놓은 빨랫감에서는 그 동안 김이 펄펄 나고 비누 거품이 끓어 넘친다. 내 계획은 겉옷의 빨랫감 모아 둔것부터 한 번 세탁 한 다음 속옷이나 삶은 빨래를 한 번 더 시키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똑똑한 세탁기가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두 번 일 할 것을 한 번 만에 하려고 생각했나보다. 힘차게 움직이는 그의 곁에서 나는 물끄러미 쳐다 보고 서 있을 뿐이다. 그의 마음이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니까 두렵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안할래.\"하면서 파업선언 하면서 두 손과 두 발을 다 놓고 정지가 될런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다행이도 동작 스위치를 눌러 놓고 와서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 온다.

\"아가씨, 나 아직 일 잘하고 있어요. 나를 버리지 마세요.\'하는 듯이 힘차게 움직인다. 그런데 물어 보고 싶다. 아까는 그렇게 전원 누르고 급수기 버튼 한 번 누르고 동작도 해보고 다른 코스 선택도 해보는 동안 왜 그렇게 무반응이었는지? 진정으로 그 땐 꼼짝도 하기 싫을만큼 지쳐있었는지?

 이젠 나의  기다려주는 마음을 그가 진정 알았는지? 너무 꼭 알맞은 시간에 삶은 빨래와 묵은 빨래를 단 번에 세탁을 하면서 세탁기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에 놀라서 이 글을 쓴다.

 늘 구석진 자리에서 먼지와 찌든 때를 씻느라 바빴던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기조차 하다. 평상복이나 외출복은 그래도 오염이 덜하고 나쁜 냄샌느 적다. 하지만 그에 비해   농장의 닭출하 작업후 작업복에 묻은 닭똥찌꺼기 같은 것은 차마 견디기 힘든 악취가 풍긴느데 그 것조차 그는 얼마나 깨끗이 씻어 주었던가?아무런 불평없이 다른 상대방들을 위하여 힘들고 궂은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이 대견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란 그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보여지는 것이고 통해지는 것이다. 만일 그에게 마음이 없다고 내가 짜증을 내고 당장에 그의 몸을 해체하거나 버리려했다면 그는 나를 위해 다시금  노력하는 삶을 살려고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오늘 감사패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이름을 하나 붙여 주려한다. \"씩씩이.\" 라고. \'씩씩아. 고마워! 니가 일년 내내  연휴도 없이 일하느라 몸이 아프고 고단할 텐데 나를 위해 다시 일해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