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곳에도 볼만한 5일장이 얼마든지 있는데, 월요일 이른 새벽에 굳이 먼 길을 떠나는 이유가 뭘까?
여장을 챙겨 집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속절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새벽 6시 30분에 출발하는 고속버스에는 나를 포함하여 승객이 고작 3명에 지나지 않는다.
비가 오리라는 일기예보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바람도 만만치 않게 불고 있다.
달리는 차안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할 요량으로 의자를 한껏 뒤로 제켜 길게 누워보았으나 처음 떠나는 장터기행에 대한 기대와, 앞으로 장터여행기를 어떤 구상으로 써야 되는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교차하여 눈은 감았으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수첩을 꺼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긁적여 보지만 무엇 하나 정리가 되질 않는다.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거창한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닌가 하고 후회도 해 보지만, 이내 여행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이곳에 있을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직 겨울의 흔적을 못다 버린 채, 산과 들은 황량한 모습 그대로이고 가끔 양지바른 곳에 핀 진달래와 하얀 목련화,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노란 산수유 꽃 정도가 봄의 전령으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창밖 경치를 보다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나보다.
진동으로 해 놓은 핸드폰이 울리기에 얼른 받아보니, 어디 쯤 오고 있느냐는 남선생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다.
몇 년 전 명퇴를 하고 낙향을 한 친구인 남선생의 배려가 고맙기만 하다.
창밖으로는 이미 고속도로를 벗어난 버스가 동해바다의 절경을 끼고 달리고 있으니 족히 2시간 이상은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까운 경치 놓치지 않게 그 시간에 메시지를 넣어 준 남선생에게 고맙다는 답신을 보낸 후,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서로의 어깨를 짚으며 하얀 포말을 남기고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한 이랑 한 이랑 너울대는 파도에 억지로나마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애써본다.
4시간여의 긴 여정 끝에 버스는 어느 덧 속초고속터미널을 들어서고 있고, 하차장에는 나를 마중 나온 남선생이 예의 그 환한 미소를 머금고 기다리고 있다.
“오는 동안 좋은 구경 많이 하셨나?” 하며 나의 가방을 들어주는 남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그의 차로 가는 중에 남선생의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근처에 산채 전문식당이 있으니 아예 점심을 먹고 가자”는 제의를 선뜻 받아들인 것은 내일 양양 장을 가는 가장 큰 목적이 산나물을 보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산채 전문식당이라고 하여 나는 산채비빔밥을 연상하였는데 막상 그 식당을 들어서니 전혀 뜻밖의 분위기가 펼쳐졌다.
일반 식당과는 달리 갖은 약초가 진열되어있고 현지에서 직접 팔기도 하는데 이름도 모를 수십 가지 야생초들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불로초를 비롯하여 머우잎과 줄기, 곰취, 야생표고, 자연산 송이 등이 어떤 것은 말린 상태로 또 어떤 것은 금방 산에서 캐온 것 같은 모양으로 식당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식탁에 앉아 송이 산채정식을 시키니, 큰 쟁반에 십여 가지 이상의 이름 모를 나물과 그것을 넣어 쌈을 싸서 먹는 불로초 잎, 그리고 지난 가을에 채취하였을 송이, 야생더덕, 불로초 순, 절인 야생표고 등이 차례대로 나오고, 한 가지를 내어 놓을 때마다 주인인 듯한 사람이 갖가지 산채들의 먹는 요령과 효능을 장황하게 설명하니 ‘배고픈 나그네는 함부로 올 데가 못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주인장이 가르쳐 준 순서대로 하나하나 맛을 음미하며 먹노라니 아직도 진한 송이향이 입안에 흐르고 야생표고 절인 맛 정도만 특이할 뿐 기대했던 산나물의 쌉싸름한 맛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허지만 이름 모를 야생초를 대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결코 싸지 않은 밥값을 지불하고 식당을 나섰다.
“모처럼 온 길이니 현형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봐” 라는 남선생에게 주저하지 않고 백담사로 가자고 한 것은 몇 번에 걸쳐 용대리를 지나쳤으면서 한 번도 백담사를 들리지 못했던 아쉬움을 오늘만큼은 풀고자 해서다.
“그럼 미시령을 넘어야 하는데 지금 미시령터널 공사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긴한데 5월부터 개통이지만 그 터널로 가 보자고” 라는 말에 “아니 아직 통행이 금지된 곳일 터인데 뭔 재주로 간단 말인가?”
“이 양반아, 서울서 여기로 내려 온지가 벌써 7년이여, 이젠 그만한 빽은 있으니 가보자고, 시간이 아마 25분 정도 단축 될거야” 하며 차를 모는 것이다.
울산바위를 옆에 두고 조금 올라가니 아직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터널이 우리를 맞이한다.통행금지 팻말은 있지만 누구하나 제재하는 이 없어, 우리는 남선생의 빽도 필요 없이 터널을 달렸고, 차는 순식간에 용대리에 도착하는 것이 아닌가.
백담사 주차장에 차를 대며 1시간 반 코스인데 걸어서 갈려느냐고 묻는 말에 기겁을 하며 차로 가는 방법은 없냐고 물으니 20분마다 버스가 다닌다고 한다.
걷기 싫어하는 내 성미를 잘 알면서 짓궂게 물어보는 남선생의 장난기에 속으로 ‘허~참 저 양반한테도 저런 장난기가 있었던가’ 웃음을 머금어 본다.
백담계곡의 깎아지른 절벽을 낀 그 좁은 길을 마치 곡예 하듯 운전하는 솜씨에 혀를 내두르며, 밑을 내려다보니 강원도 전체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린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언제나 맑고 시원한 계류를 자랑하던 백담계곡이 일부를 제외하곤 거의 바닥을 드러낸 채 메말라있다.
이 절을 창건한 의상대사가 어떻게 이런 비경을 찾았을까 곰곰 생각을 해 본다.
그 옛날 길도 없었을 시절에, 그 깊은 산골을 찾으려면 저 계곡의 흐르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을 것이 분명한데 불교전파에 심혈을 기울인 대사의 고행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전임 대통령의 유배지로 더욱 잘 알려진 이곳 백담사도 수많은 참배객과 관광객이 지니고 온 속세의 때에 찌들어서인가 그 상업화 된 모습에 조금은 실망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대개의 고찰들이 요사채를 포함하여 스님들의 수행 장소에는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은 경내 어느 곳이든 무상으로 출입을 하게 한 것도 낯선 풍경이다.
심심산골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절간을 기대하며 찾았던 백담사에 작은 실망감을 안은 채 산문을 돌아 나왔다.
내일 이른 시간에 양양 장을 가려면 아침 일찍 기상을 해야 하므로 남선생 펜션에서 가까운 최북단 대진 항만 잠간 들러보기로 하고, 화진포 방향으로 가기 위해 진부령을 넘기로 했다.
우리나라 항구로는 가장 북단에 위치한 대진 항은 때 늦은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부둣가에 고요함이 넘치고, 무심한 갈매기들만이 한가로운 비행을 하고 있다.
몇몇 어부들이 비록 지금은 흉어에 시달린다지만 언젠가 올지도 모를 풍어기에 대비한 그물 손질하는 모습만이 간간이 눈에 뜨인다.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 남선생 댁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남선생 펜션 다락방에서 자겠다”고 했더니 “안 그래도 현형이 오면 그 방에 잘 줄 알고 이미 청소도 다 해 놓았으니 오늘 밤은 별빛을 벗 삼아 편안히 주무시게나” 나의 사소한 것까지 기억해 내며 배려해 주는 남선생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원래는 미천골 휴양지로 유명한 서면에서 현지주민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장터를 가기로 한 다짐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감기 기운을 안고, 어제 이곳저곳 강행군을 한 때문인지 밤새 잠을 설친 끝에 거의 9시가 다 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친 남선생과 나는 쫓기듯이 양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양양은 주변에 오염되지 않은 높은 산들이 자리 잡고 있어 전국 어느 지역보다 향기롭고 맛 좋은 산나물의 주산지이다.
한국, 일본, 중국 동아시아 3국 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특히 산채를 식별해 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한다.
그리고 그 산채를 가장 다채롭게 요리해 먹는 민족이 우리 민족인 것이다.
몇 년 전 영국에서 고사리 채취 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원래 영국 사람들은 고사리를 식품으로는 금기시 하여 번식력이 강한 고사리를 나무나 다른 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비를 들여가며 제거를 해 왔었다.
그러나 한국이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언제부터인가 고사리의 자취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부터는 오히려 고사리 채취를 법으로 금하는 자치단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다.
일부는 돈 들여 일부러 제거 하던 것인데 오히려 잘 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과, 고사리를 멸종 시켜서는 안 된다는, 환경 단체들 간의 의견이 대립하여 영국 사회에서 작은 사회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자연산 먹거리로서 산나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곳 양양 장은 나에게 아버님과 함께 찾았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곳이다.
88올림픽 이듬해니까 1989년도에 나의 가족과 아버님, 어머님을 모시고 인근 척산온천을 찾아 일박을 한 뒤 귀가 길에 양양을 지나자니, 때마침 장날이라 길가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온 식구들이 장터구경을 하면서 갖가지 산나물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와 며칠간 봄기운을 만끽하게 해준 기억이 늘 새로운 곳이다.
이미 장터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인근 지역에서 물건도 사고 장터 구경도 할 요량으로 온 많은 인파가 북적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의 눈은 인도 한쪽에 종이박스를 펼쳐 놓거나 그나마 없으면 신문지 위에 갖고 나온 갖가지 야채나 산나물을 팔고 있을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대부분이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 노점상들이야 말로 전통 5일장의 명맥을 유지시켜주는 대표적 풍경일 것이다.
아직 때 이른 철이라 그런지 많은 할머니들이 앉아 계시지만 팔고자 하는 산나물의 종류나 양은 얼마 되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봄을 제일 먼저 알린다는 쑥, 쑥부쟁이, 원추리, 머우 잎, 중당가리, 언 고생이 그리고 두릅도 보이긴 하는데 크기로 미루어 보아 필시 자연산은 아니고 재배한 것으로 보였다.
\"어디서 오셨냐\"고 하는 내 물음에 투박하지만 미소를 지으시며 “물건이나 사시지 그건 알아 뭐 하시려고” 하시며 마치 길 가던 처녀가 남정네에게 농 짓거리를 받은 양 수줍어하신다.
저런 미소를 보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좌판에 널려진 산나물들의 이름을 물어보니 표준어인지 사투리인지 구분이 안가는 희한한 이름이 많기도 하다.
여린 쑥 한 무더기와 머우 잎을 사면서 다시 재차 물으니 이번엔 이 남정네와 마음이 통하셨는지 선선히 답을 해 주신다.
“송천에서 왔수다”“송천이 어디 쯤 이지요?” 하고 되묻자 “서면에 있는 거지요, 미천골은 아세요?” 하시기에 “아~ 창천 넘어가는 방향이요” 하고 대답하자, 나그네가 당신이 사는 지역을 알고 있음이 반가우셨는지 환하게 웃으시며 “맞수다, 오색 가는 길하고 창천 가는 삼거리가 송천이지요, 우리 집이 크지는 않지만 민박도 하고 있으니 미천골 오시는 길이 있으면 들리시래요, 집 뒤로 용소계곡 물도 흐르고 경치가 기가 막히대요” 전화번호도 잊지 말라고 하시며 챙겨주신다.
“파시는 산나물들은 직접 산에서 캐신거예요?” 하고 물으니 내게 파시고 남은 빈자리에 새로이 쑥과 머우를 채우시던 손길을 멈추시고, 휘휘 내 저으시며 “아이구, 아직 높은 산에는 산나물이 안 나지요, 5월 중순이 넘어야 캐러 다니고 이것들은 우리 집 근처에서 캔 것들 이래요”
허긴 이곳에 오면서도 너무 이르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이 서운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다음 달에 다시 이곳을 찾을 핑계거리를 찾았기 때문이리라.
아주머니가 싸주신 비닐봉지가 집안 구석에 오래도록 꼬깃꼬깃 모아 놓으셨던 것을 갖고 나온 것인지 쭈글쭈글하고 볼품없는 모양에 남선생과 마주보며 싱긋 웃고는 한보따리씩 들고 발길을 옮겼다.
이웃하여 나란히 앉아계신 할머니는 야생인 듯싶은 달래와 이름 모를 몇 가지 산나물을 올려놓고 계셨다.
처음 보는 나물이라 그 이름을 물어보니 중당가리란다.
아무래도 표준어는 아닌 듯한데 사투리라 해도 그 이름이 재미있어 맛은 어떠하며, 요리 법은 어떠한지 상세히 물어보곤 야생 달래의 매콤한 된장찌개 맛도 보고, 할머니 말씀대로 중당가리의 고소한 맛도 볼 겸 각각 한 무더기씩 사서 들었다.
“현형! 여기 진짜 도토리 묵 맛 한번 보러갑시다” 하는 남선생을 따라 재래시장건물 안에 있다는 도토리 묵 집을 향했다.
자그마한 가게 앞에는 직접 갈아놓은 도토리 가루가 수북하고 그 옆에는 아직 갈지 않은 도토리 열매도 보였다.
“정말 도토리 가루만 써서 만드는 모양이네” “그럼 일체 다른 건 안 넣고 순수 도토리만 넣어가지고 만드는 거니 제 맛을 한번 봐, 보통 사가지고 가지만 양념을 해 달래서 여기서 먹고 가도 되니까 앉아서 한모 먹고 가자고” 가게에 들어서니 좁은 공간에 몇몇 손님들과 주인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남선생이 “아주머니 여기 양념해서 하나 주시고, 한모는 가지고 갈 테니 포장해주세요” 바쁘게 일을 하시던 아주머니가 일손도 놓지 않으시고 얼굴만 돌리며 밝게 인사를 하신다. “네, 잠시만 기다려요, 이거 다 자르고 해드릴 테니 앉아 계세요” 뭘 자르시나 하고 들여다보니 커다란 함지박에 쑥떡 비슷한 것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 떡집도 차리셨소, 이게 웬 떡이요” 남선생이 묻자 옆에 계시던 손님인 듯한 아주머니가 “저 형님 딸이 다섯인데 딸, 사위 준다고 취떡을 해 가지고 지금 한창 포장하는 중이래요, 이것 맛 좀 보시오” 하며 드시고 계시던 떡 접시를 우리 쪽으로 밀어 놓으신다.
“이떡 이름이 취떡이라고 합니까? 색깔이나 모양은 쑥떡하고 똑 같네요” 하며 한 조각을 입에다 넣어 먹어보니 그 쫄깃함이 인절미 저리 가란다.
“찹쌀로 빚은 거라 쫄깃쫄깃 할 거래요, 그게 쑥이 아니고 떡취를 넣고 만든건데, 우리 형님이 아이들 준다고 떡취도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모른대요” 하시기에 속으로 ‘정말 귀한 것 맛 본다‘ 하며 내어 오신 도토리묵과 함께 먹으니 그 토속적인 맛과 인정에 사람 살아가는 정을 느낀다.
떡취란 취나물의 일종으로 쑥과 함께 옛날부터 떡의 재료로 많이 이용되어 그 이름도 떡취라 정했나 보다.
한모에 2천원 밖에 안하는 도토리묵은 아마 그 정도 양이라면 오이나 양파를 조금 썰어 넣고 만원씩 받는 도시 근교의 도토리묵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맛을 보여주었다.
도토리묵 집을 나와 다시 장터로 돌아오는 길에 송천떡 이라는 현수막을 펼쳐놓고 좌판에 떡을 진열해파는 곳이 있었다.
이곳 양양군 서면 송천은 전국에서도 맛있기로 유명한 송천떡의 산지라 아주머니에게 “이게 정말 송천에서 만든 떡입니까?” 하고 물으니 “우리 송천 부녀회에서 장날마다 매번 나와 팔고 있으니 일단 맛이나 보세요” 하며 먹음직스런 콩떡을 한 조각 잘라 주신다.
방금 먹은 취떡과 그 맛을 비교하자니 콩의 고소함이 입안에 전달되며, 그 명성이 헛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인절미와 쑥떡 그리고 콩떡을 각각 한 덩어리씩 사가지고 남선생에게 “집에 가져가서 식구들과 맛있게 드시게” 하며 전해 주었다.
봄에 나는 산나물이 지닌 그 특유의 향긋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은 겨우내 잃었던 우리네 입맛을 되살리는데 큰 몫을 차지한다.
게다가 봄의 새 기운을 받고 자란 산나물은 영양소도 풍부하여 각종 미네랄과 칼슘, 인과 더불어 다량의 섬유질을 함유하고 있어 성인병 예방은 물론이고 치료도 가능한 식품이다.
인삼에 많이 함유된 사포닌도 들어 있어 인체의 저항력도 키워준다고 한다.
초봄에 자란 산나물은 조리를 할 때 양념을 적게 하여 나물 맛을 간직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참기름도 적게 쓰는 것이 좋고, 요즘은 들기름을 쓰는 가정도 많아졌다.
다음 달에는 이곳 양양 장터에 온갖 산나물이 지천을 이룰 것이다.
참취, 곤드레, 개미취, 호박나물, 곰취, 누리대, 우산나물, 참나물, 얼레지 등과 두릅, 참죽순,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나물들이 자연 그대로의 오염되지 않은 먹거리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한꺼번에 그 많은 것들을 먹어 보기 힘들다면 집에 가져와 통풍이 잘 되는 그늘진 곳에 말려 보관을 하거나 삶아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먹으면 내년 봄 산나물이 날 때까지 두고두고 먹을 수도 있다.
참 죽순 같은 것은 그 향이 독특하여 장아찌를 만들어 먹으면 훌륭한 밑반찬이 될 수도 있다.
옛날에는 조선에서 나는 참 죽순을 중국인들이 수입하여 향채라 이름 붙여 봄에 먹는 음식으로는 최고로 쳤다고도 한다.
잎이 나지 않은 두릅나무의 새순을 따서 살짝 데쳐가지고 초장을 찍어먹거나 밀가루를 살짝 묻힌 후 달걀옷을 입혀 지져내어 먹으면 봄을 맛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양양장의 명물로는 손수레에서 파는 오뎅 집도 유명하다.
순수 부산 오뎅만 사용하는데 그 국물 맛이 기가 막히다.
멸치, 다시마는 기본이요 북어머리나 몇 가지 특이한 재료를 써서 만들었다는데 나와 남선생도 오뎅 하나씩을 먹으면서, 뱃속의 훈기라도 집어넣을 셈으로 거푸 두 컵씩이나 국물을 마셔댔다.
그렇게 장터를 몇 바퀴 돌면서 아직도 내게 동심이 남아있다는 착각도 든다.
그만큼 나나 남선생에게 장터구경은 즐거움을 주었고 한 가지 낯선 것을 내게 보여주는 남선생이 오히려 나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개구쟁이들의 나들이 같은 하루를 마감하며 다음 달 산나물이 온 장터를 풍요롭게 만드는 날 다시 찾기로 하고 돌아서려니 마음이 무겁다.
이런 정겨운 모습의 5일장이 점점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아쉬움에 대한 걱정이리라.
이번 장터기행에서 산 품목들은 전부 남선생에게 선물 아닌 선물로 드리면서 “다음 달에 다시 올 때는 아예 박스에다 담아 택배로 부쳐야겠다” 고 하니 남선생이 그러지 말고 아예 큰 배낭을 메고 오라고 하는 바람에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젠 화전민이란 용어가 어울리지 않는 양양군 심심산골 주민들이 부럽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면 전국 어느 곳이든 이미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고, 그 덕에 거의 고립되어 살아오던 화전민들도 이젠 도회지 사람들의 부러움을 안고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정겨운 사람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이번 양양 장터 기행을 마무리 짓고 돌아온 다음 날 오전에 남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현형 오늘 아침에 집사람이 어제 산 중당가리 나물을 무쳐주어 먹었는데 그 맛이 괜찮아, 제법 쌉싸름한 맛도 나고 향도 좋던데, 현형도 아마 좋아할 것 같아, 내가 따로 사다가 잘 말려 놓을 테니 다음 달에 와서 가져가시게” 혼자만 맛보아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남선생의 순수함이 엿 보인다.
살아오며 각 지방마다 특색있는 장터를 여러 곳 다녀는 보았지만 그것을 글로 써 보겠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해보지를 않았었다.
이번 양양장터 기행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다음 장터에서는 소재가 발굴되면 그때그때 간단한 메모라도 해 놓아야 된다는 것이며, 현지 주민들의 사소한 한마디라도 귀담아 들어 두는 것이 큰 보탬이 된다는 점이다.
첫 번째 장터기행이라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차츰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다짐을 하며 이번 여행기를 접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