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없었으면 했던 행사였다
짝꿍의 손을 잡기가 미안해서
새엄마의 기분내킴 도시락이 싫어서
항상 의례적인 부잣집 아이의 독무대
장기 자랑 시간이 싫어서
어찌보면 비뚤어진 못된 성격처럼 보이지만
난 그런 아이도 못되는 아이였던걸까?
유난히 손에 땀이 많이나서 손잡고 단 일분도
안되어 흐르는 땀때문에
내 짝꿍은 나를 구박했다
시골이고 학년별로 두반뿐인 작은 학교라
전학가서 3년 줄곧 그 친구와 같은반에
둘다 작은 키에 앞자리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둘이었다
왜 꼭 짝꿍 손을 잡고 소풍을 가야했는지
길 잃을까봐?
거의 삼년을 같은 장소로 소풍을 가기에
그럴 일은 없을것이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로인해 죄인 아닌 죄인이되어 약 한시간여를
연신 치맛자락에 닦아가며
짝꿍의 구박을 받아가며 소풍지인 얕으막한
산에 다다르면 난 안도의 숨을 몰아쉬곤 했다
그리곤 이어지는 장기 자랑 시간!
남앞에 노래를 부르고 싶은마음에
시켜줄리 만무한데도
혼자 거을을보며 두손을 가슴앞에
맞잡고 서서 무릎을 박자 맞춰 구부려가며
혼자 노래 연습을하곤 했었는데
항상 그무대는 나에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나라 이야기나
동화속 공주님의 호강 정도로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9살 이전에는
누구보다 자신감이 넘치고 의기양양했던
내게 쉽게 접어지지 않던 꿈이었다
더더욱 잊지못할 사건!
4학년 봄소풍을 발표하던 날!
선생님께서 소풍가서 장기 자랑하고 싶은
사람 손들라고 하시는데 아무도 나서는 친구가
없자 기회다 싶었던 나는 얼른 손을 들었다.
놀래시는 선생님 표정 무리도 아닌것이
나는 선생님에게 낯선 아이였을수도 있을만큼
두드러짐이 전혀 없던아이였다.
내가 그반에 있다는 사실 조차 인식못하셨으리라
선생님께서 한번도 내 이름조차 부르지 안으셨으니까
출석조차도 빈자리만 체크하셨기에....
나는 선생님 성함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데...
어찌됬든 그자리에서 실력을 확인하고 싶으셨는지
앞으로 나오라 하시곤 노래를 한번 불러봐라
명령에 떨리는 가슴 화끈 거리는 얼굴
난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히 걸어나가
단상에 서서 내 끼?를 펼쳐 보였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은행입이란 동요였다.
\'어제 저녁 바람에 찬~서리 내려~
은행잎은 한입 두잎 떨어지고요~\'
이런 가사였다.
하지만 예정된 날짜에 비가 내려 소풍은 미뤄졌고
선생님의 확답도 듣지 못한채....
기억으론 그래도 호응이 괜찬았던 것 같았는데
몇일 뒤 미루어진 소풍을 가던 전날
혼자 몰래 연습을 해두었다
하지만 나의 꿈은
항상 그랬듯이 누구도 기억해지지 않았고
4학년 차례에서 호명된 아이는 내가 아닌
부잣집 딸이었다
그 실망과 무력감에 빠져 마음 고생을 무척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 생각에 한쪽 가슴이
아려오며 선생님의 대한 원망감의 잔재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엄마가 돌아가신후 사람의 대한 불신감이
하나둘 자리 잡는데 커다랗게 작용한 사건있을 듯
그리고 새 엄마의 기분내키는데로 도시락!
그 새엄마는 유난히 변덕이 많았던 여자였다
그 새엄마라 호칭하는 이유는 지금은
다른 분이 아버지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변덕스럼은 항상 부부싸움이 끊이질 않았고
유독 이름 붙여진 날이면 더 심한
부부싸움을 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남에게는 인심이 후해
우리 남매 도시락이라고
솜씨 발휘해서 모양 맘껏 부려
싼 도시락도 남에게 줘버리는 그런 여자였다
그럼 우리는 그 맛있고 모양있는 김밥은 생긴
그대로 그림의 떡이되어 남의 남은 김밥을
먹었던 기억이었거나
부부 싸움후 이불 뒤집어 쓰고
일어나지 않아 아침도 굶고 갔던 소풍이
전부 이기에........
그리고 일 이학년 엄마 살아계신 때의 소풍은
글쎄 왜 기억 조차 없는 것일까?
언제부터 아프셨는지 몰라도
내가 이학년 되던해 5월에 돌아가셔서
소풍은 못갔으리라
일학년 소풍은 아프신 엄마 병원 때문에
이사를하고 전학을 하는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았나 싶다
이래 저래 봄은 나에게
35년이란 시간을 가슴앓이 하게 만들었다